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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수필집[파고만댕이의 여름]

소매치기의 의리

by 桃溪도계 2006.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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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매치기의 의리


  추석 이틀 전 날, 부드러운 달빛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고향 가는 길에 대구에 내려 친구들을 만났다. 오랜만에 회포를 푼답시고 반주삼아 술 한 잔 씩 걸치고, 불콰해진 얼굴빛을 드러내 놓아도 부끄러움 없이 거리를 나설 수 있는 젊음이 있었다.

 

  친구들 중에 제일 먼저 군대에 간 강호는 휴가 중이라 날을 세운 군복을 입고 나름대로 멋을 부풀리고 있다. 기주는 겁 없이 튀어나온 이빨을 무기처럼 지니고 다니며, 순정과 의리를 목숨처럼 떠들고 다니던 때라 우리들의 행진은 보무도 당당한 외인구단이다.

 

  시내에서 승전보를 얻기 위해 횡단보도도 무시하고 건들거리며 걷는다. 길 가던 아가씨 어깨를 툭툭 치며 상대를 찾는다. 삼덕동에서 대학병원쪽으로 가던 길에 적군의 공격을 알리는 정보가 레이더망에 걸려들었다.

 

  “도둑이야! 도둑이야!” 아가씨의 파르르 떨리는 다급함이 귓전에서 다툰다. 굶주린 매의 눈처럼 반짝이는 안테나가 고급정보를 놓칠 리 없다. 그때다. 맞은편에서 젊은 청년이 후다닥 뛰어 온다. 약속이나 한 듯이 그를 쫓는다. 

 

  그는 소매치기였다. 쫓고 쫓기던 중에 그가 막다른 골목길로 들어선다. 술을 한 잔씩 걸치고 한참을 뛰었기 때문에 숨이 가빴다. 그러던 차에 막다른 골목길을 선택해 준 소매치기가 한편으로는 고마웠다. 아마 그도 주저앉고 싶었을 것이다.

 

  그가 막다른 골목 벽에 다가서자 두리번거리다 뒤돌아섰다. 그리고는 뒷주머니에서 번득이는 칼을 꺼내들고

 

  “비켜라” 하고 섬뜩한 일침을 가한다. 달빛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골목 안을 환히 들여다보는 가운데 우리는 서로 마주보며 대치했다. 등줄기에 식은땀 한줄기가 쭈르륵 미끄러져 내린다.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태연한척 하지만, 연신 쿵쾅거리는 심장은 눈치 없이 가슴을 세게 두들긴다.

 

  잠시 긴장이 흐르고 있는 틈을 타서 왜 뛰어 왔는지를 생각해 본다. 이유가 없다. 그냥 뛰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외인구단의 본능과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 지는 영웅심리가 작용한 것 같다. 그것도 아니면 반주로 마셨던 술기운에 뛰었을까.

 

  적이 서서히 다가오며 공격 채비를 한다. 그가 다가오는 대로 슬슬 물러서며 한 치의 틈도 허락치 않을 요량으로 그의 칼끝에 시선을 집중시킨다. 막다른 골목길을 벗어나면 그를 잡기 어렵다. 더 이상 밀리면 안 되는데 자꾸 밀린다. 순간 그는 돌파를 시도한다. 틈을 내 주고 말았다. 칼의 두려움을 이기기에는 아직 공력이 부족한 탓이다.

 

  다시 쫓고 쫓기는 긴박한 달리기가 시작되었고, 그의 호흡을 느낄 만큼 가까이 다가섰을 때 그는 지갑을 던졌다. 그것이 목표물이 아니었으므로 아랑곳 하지 않고 긴박한 호흡을 놓치지 않으려고 바짝 뒤쫓는다. 앞서가던 강호가 군화발로 그의 뒤꿈치를 간신히 건드리자 그는 순간 균형을 잃고 비틀거린다. 뒤 따르던 내가 이단 옆차기 하듯 그의 등짝을 찍는다. 그는 길바닥에 꼬꾸라진다.

 

  기주가 되돌아가서 지갑을 찾아왔다.

 

  “뭐하는 놈이냐, 왜 이런 짓을 했어” 라는 다그침에, 고향 갈 차비가 없어서 지갑을 털치기 했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그래도 그렇치 젊은 놈이 어디 할 짓이 없어서 이런 짓을 해” 라며 기주가 귀사대기를 후려 갈겼다. 씩씩거리는 눈으로 째려본다.

 

  “이 새끼가 어디 째려보냐” 며 내가 주먹으로 아귀를 날렸다. 그의 기가 다소 꺾였다.

  멱살을 잡고, 아까 그 칼 내 놓으라고 다잡았다. 그가 내놓은 것은 칼이 아니라 도끼빗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그는 처음 이런 짓을 했다며 용서를 구했다. 다시는 이런 짓을 안 하겠다며 매달린다. 순정파 기주의 마음이 좀 누그러진다.

 

  그때 골목 끝에서 경찰 두 명이 아가씨의 신고를 받고 털레털레 오고 있다. 그들은 도둑 잡으러 오는 건지, 산책 오는 건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태평스럽다.

 

  순간적으로 젊은 소매치기 초범을 놔줘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냥 그 자리에서 돌려 보내주기는 아쉽고, 교육을 시키고 차비도 좀 줘서 보내야 성이 풀릴 것 같았다. 내일아침 10시에 시내 목화다방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사나이의 의리에 오점을 남기지 않도록 반드시 나올 것을 다짐받고 보냈다.

 

  경찰이 다가왔다.

 

  “언놈이야” 라며 제법 경찰의 위엄을 세웠다. 지갑을 찾았기 때문에 보내줬다고 얘기했다. 경찰은 한 건수 놓친 것을 몹시 아쉬워했다. 지갑을 아가씨에게 건넸다. 경찰은 다음부터는 그냥 보내주면 안된다며 퉁명스럽게 던지고는 가버렸다.

 

  아가씨는 방천시장에 어머니 심부름 가는 중 이었다. 거금 육 만원이 든 지갑이다. 아가씨가 고맙다며 차라도 한잔 대접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한껏 멋을 부리면서

 

  “차는 뭔 찹니꺼 빨리 엄마 심부름이나 가이소.”

 

  “담에 인연되면 그때 얻어 묵을께요” 라며 아가씨를 보냈다.

 

  1승을 올린 외인구단의 가슴은 뿌듯해지고, 정의를 안주삼아 마시는 맥주잔 속으로 달빛이 녹아들어 세상은 평온해 진다.

 

  다음날 아침 10시에 목화다방에서 그를 기다린다.

 

  소매치기는 의리가 없다.

 

  달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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