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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수필집[파고만댕이의 여름]

치자꽃

by 桃溪도계 2006.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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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자꽃

 

십년지기 치자나무가 베란다에서 싱그러움을 뽐낸다.

  

처음에는 그 생김이 잡목이었다. 몇 년 전, 생긴대로 자라게 놔두라는 아내의 성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실한 놈 한 줄기만 남기고 곁가지를 다 잘랐다. 가느다란 줄기의 허약함이 안쓰러워 몇 번이나 후회하기도 했다. 속상해 하는 아내의 퉁명스런 대꾸에, 태연한 척하며 조각난 맘을 감추느라 능청이 길어지기도 했다.

  

이제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을 만큼 틀이 제법 그럴싸하다. 이만큼 자라는 동안 맘속으로는 항상 미안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비실비실 축 처진 모습이 애처로웠으며, 좀처럼 생기를 찾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시렸다. 항상 나를 원망하는 듯해서 여간 맘고생을 한 게 아니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해마다 선물해주던 꽃을 접고 토라졌을까.

  

그 즈음 우연찮게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병원에 들어갈 때는 성성하게 들어갔지만, 내 몸에 든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나는 치자나무처럼 가지치기를 당한 셈이었다. 마음은 하늘에 닿는데, 몸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묶여버린 병실에서 나는 치자나무를 닮아갔다.

  

병실 창밖을 내다보면서 하루빨리 퇴원해서 마음껏 먹고 씩씩하게 걷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수시로 내 몸을 찌르는 주사바늘과 약 봉투가 널려진 하얀 병실에 갇혀 옴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치자나무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나 둘 새순을 겨우겨우 내밀면서 살아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오랜 병원생활을 마치고 퇴원하던 날, 베란다 문을 열자 치자꽃 향기가 병고에 지친 나를 왈칵 끌어안는다. 얼떨결에 안겨 궁둥이를 빼 보는데, 실웃음으로 입맞춤하고는 향긋이 웃는다.

  

 순백의 꽃잎마다 저린 아픔일랑 감추고, 희고 고운 눈으로 나를 품는다. 고고하던 햇살 한 줌이 여린 이파리에 머물렀다가 뿜어내는 숨결이 꽃잎에 닿으면 새하얀 꽃잎은 수줍은 각시가 된다.

  

 누구에게나 아픔은 있다. 그러나 아픔을 끌어안고 꿋꿋하게 자라 아름다운 향기를 품어내는 치자꽃에서 나를 배운다.

 

수필집 - 파고만댕이의 여름 p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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