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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수필집[파고만댕이의 여름]

파고만댕이의 여름

by 桃溪도계 2006.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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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만댕이의 여름


   여름날이면 우리는 소를 몰고 뒷산에 있는 앵곡*을 지나 우리들의 천국인 파고만댕이*로 올라갔다. 올라가자마자 소 이까리를 소뿔에 칭칭 감아 단단히 동

여매어 풀밭에 풀어놓고는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아까시나무로 만든 칼을 꺼내서 신나게 칼싸움 놀이를 한판 벌인다.

  

   얼굴은 모두 꼬질꼬질하게 새까맣고 옷에는 땀내가 진동한다. 그렇지만 칼을 쓰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두 손으로 칼을 들고 적을 향해 눈을 부라리는 폼이

그제 저녁 가설극장에서 봤던 ‘돌아온 검객’의 마지막 결투장면과 흡사하다.

  

   파고만댕이는 산등성이가 꼭 방목장처럼 생겼다. 멀리 아스라이 구름다리 밑으로 타래실같이 가늘게 경부선 기차가 긴 호흡으로 오르락내리락거리고, 앞쪽

으로 화악산이 금방 손에 잡힐 듯 위엄 있게 버티고 있다.

 

   장마가 끝나고 땡볕이 내리쬐는 8월의 오후, 하늘엔 고추잠자리가 쉼 없이 조잘거리며 비행을 하고, 하루살이떼가 앞다투어 생을 마감하는 의식을 준비하느

라 분주하다. 한판 칼싸움 놀이에 허기를 느낄 때쯤, 형들 중 한 사람이 나를 부른다.

 

    “호박 따와라. 잘 익은 놈으로” 그리고는 다른 친구를 불러 “야! 넌 찰흙 구해와”, 각자에게 임무가 주어진다.

  

   친구 한 명과 함께 호박 서리하러 간다. 튼실하게 잘 익되 늙지 않은 놈을 골라 귀에 대고 퉁퉁 때려본다. 호박은 덜 익으면 풋내가 나고 너무 익어도 퍽퍽해

서 맛이 떨어진다. 아직 등에 푸른 테를 다 벗지 못한 놈이 제격이다. 하나씩 골라서 주인에게 들키지 않도록 포복과 은폐, 엄호 등 각개전투의 기본적인 전술을

완벽하게 구사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

 

   삐질삐질 흘리는 땀을 훔치고 호흡을 몰아쉬며 오리나무와 칡넝쿨을 이용해서 만든 원두막에 도착한다. 형들이 원두막 그늘에 말린 야생초 잎으로 담배를

말아 피우며 으스대고 있다.

  

   형들은 능숙한 솜씨로 호박에다 찰흙을 바른다. 적당한 두께로 골고루 잘 발라야 제대로 익는다. 큰 돌 서너 개 걸치고 찰흙 바른 호박을 얹고 불을 지핀다.

한참 동안 불을 때다가 불을 끄고 좀 더 기다린다. 침이 꼴깍거리며 목줄을 타고 내려가는 소리가 커진다. 빙 둘러 앉아서 형의 손놀림 하나하나에 까만 눈동자가 따라 다니며 긴장된 호기심을 풀지 않는다. 뜸이 다 들었을 때를 기다렸다가 호박을 내려놓고 찰흙을 걷어낸다. 찰흙은 콩깍지 터지듯 툭툭 떨어지며 우리

들의 입맛을 돋운다.

  

   집게칼을 꺼내서 호박을 가른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구수하고 달착지근한 냄새에 콧구멍이 벌렁거리고 목이 길어진다. 손바닥만하게 하나씩 배급받고는 뜨

거워서 손을 바쁘게 옮겨가며 허겁지겁 핥듯이 먹는다.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고는 또 한 개 더 얻어먹고 실웃음에 행복감을 억지로 감춘다. 천하일미다. 진시

황이 즐겨먹던 산해진미도 찰흙에 구운 호박 맛에 비할 수 있을까.

  

   서쪽 하늘에 해가 뉘엿뉘엿 고장 난 시곗바늘처럼 갈 듯 말 듯 걸쳐 있고, 온 세상이 노을에 흠뻑 젖어들 때쯤 소를 찾아 나선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소가

열심히 풀을 뜯어 먹지 않은 것이다. 우리 소는 숫송아지라서 고삐를 바짝 잡고 일일이 풀을 뜯어 먹이지 않으면 제 맘대로 뛰어 놀기만 하거나, 암내 맡으러 다

니느라 딴청만 부린다.

  

   산 그림자만 길게 끌고 다니며 넘어가지 않을 것 같던 해는 어느새 숨어버리고 파고만댕이에 어둠이 내려오면 마음이 다급해진다. 소 배는 아직 절반도 차지

않았는데 친구들은 귀가를 서두른다.

  

   아버지가 아시면 내일부터는 소 먹이러 가지 말라 할 게 분명하다. 나는 궁리 끝에 처음에 올라왔던 앵곡으로 내려가지 않고 못도랑이 있는 검바우*로 내려

갔다. 일단 도랑에 들이대면 소는 머리를 처박고 물을 쭉쭉 들이 마신다. 그런 다음 동네 형들이 가르쳐 준대로 도랑 옆에 있는 고추밭에 가서 약이 바싹 오른

고추 서너 개 따다가, 소고삐를 잡고 고추를 분질러서 문지르면 소는 매워서 어쩔 줄 모른다. 다시 도랑에 들이대면 소는 미친 듯이 물을 마셔댄다. 정상적으로

풀을 뜯어 먹은 소보다 더 배가 불러온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배에서 물이 출렁이는 소리가 들리는 소를 몰고 보무도 당당하게 집으로 들어간다. 아버지께서 수고했다고 했다. 나는 꼴로 채워야할 배

에 물만 가득 채우고 모기 물어뜯는 여름밤을 보낼 소를 생각하니 맘이 짠했다. 아버지 몰래 어제 먹다 남은 꼴을 넣어준다. 그래도 미안하여 모깃불을 정성들

여 피워준다.

  

   평상에 누워 잠을 청하면서도 자꾸 외양간에 눈길이 멈춘다. 내일 파고만댕이에서 놀 생각과, 소에 대한 미안함이 교차되어 어린 가슴은 쉽게 잠을 이루지 못

한다.

  

   그리운 고향에서 함께 뛰놀던 친구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오늘 밤 꿈에서 오랜만에 만나 칼싸움 놀이나 질펀하게 한 판 벌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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