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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집[파고만댕이의 여름]

시궁쥐가 된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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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궁쥐가 된 고양이


   게으름뱅이 고양이는 살이 디룩디룩 쪘다. 쥐를 잡으려고 입양했는데 발톱은 무뎌지고 콧수염은 꺼칠꺼칠하다. 처음에는 쥐를 잡아서 단숨에 삼키지 않고

놀려가며 사냥공부를 열심히 하더니만, 차츰 어머니가 챙겨주는 생선뼈와 갖가지 맛난 음식에 심통을 덧칠하면서 눈치만 늘어갔다. 바깥에서만 생활하다가 방

안을 점령하면서부터는 터줏대감 행세가 자연스럽다. 밖으로 쫓아내면 꿈쩍도 않고 버티다가 어머니의 성화가 심상찮으면 못 이긴 척 자리를 옮길 줄 아는 융

통성도 생겼다.

  

   하루 종일 느릿느릿 세월을 낭독하며 주는 밥 얻어먹고, 추우면 쇠죽솥 주변에서 온기를 채우고 양껏 낮잠을 즐긴다. 발정에 몸부림치는 도둑고양이가 불러

내는 밤이면, 몸치장을 살피고 수염을 다듬으며 음흉한 웃음으로 연애질에 나서는 바람둥이다. 

  

   그는 야성을 완전히 잃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면서 어머니의 곱살 맞은 애정에 의존해서 놀기만 하는 캥거루족이다. 어쩌다 미운 짓을 해서 어머

니가 밥을 주지 않으면 두세 끼 정도는 굶을 수 있는 인내심으로 무장하였으며, 슬픈 눈짓과 갖은 애교로 동정을 끌어내는 교활한 능숙함을 지녔다.

  

   쥐도 잡지 않으면서 밥만 축내고, 밤에는 집 나온 친구들을 불러내 부엌과 창고를 들락거리면서 광란의 밤을 보내고도 미안함을 갖지 않는다. 아침이면 늦잠

까지 자면서 어머니가 깨워야 겨우 일어나서 억지로 세수하고는 밥을 깨작깨작 먹는다. 꼴 보기 싫다고 쫓아버릴 수도 없고, 하는 꼴 보고 있자니 속이 터진다.

 

   그런 그에게 효도할 기회가 생겼다. 어머니가 광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다. 웬만한 고양이만한 어미 쥐가 새끼를 쳤다. 눈도 안 뜬 빨간 새끼 쥐 여러 마리가

어미 품에서 꿈틀거리며 행복한 꿈에 빠져 있다. 곁에 다가가자 어미 쥐가 새끼들을 뒤로 숨기면서 앞발을 들고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갓 태어난 새끼 쥐를 소주에 담가 먹으면 중풍에 효험이 있다는 민간요법도 있는지라, 약재로 쓸 요량으로 잡고 싶은데 어미 쥐의 저항에 가득 찬 눈빛이 예

사롭지 않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그동안 먹이고 키워 온 미운 살이 덕지덕지 붙은 고양이가 있지 않는가.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왔다.

  

   돌배기 녀석 오줌 싸듯 제멋대로 된 낙서처럼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한 곁살이 삶을 일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는 이정도 쯤이야 가볍다는 듯 우쭐

대는 눈빛으로 게슴츠레하게 웅크린 어깨를 푼다. 이번 사냥은 반드시 성공하여 그동안 바람피우고 게으름 부린 불효를 보란 듯이 씻을 수 있다고 큰소리친다.

어머니는 그의 장담을 믿고 건투를 빌며 광으로 밀어 넣고는 문을 닫았다.

  

   고양이는 당당하게 성큼성큼 다가가더니만 중간쯤 가서는 몸을 낮추면서 걸음이 조심스럽다. 겁을 집어 먹은 것인지, 본능적인 사냥의 모습인지 분간이 어

렵다. 바짝 긴장하며 가까이 다가간다. 어미 쥐는 사시나무 떨듯 부르르 떨면서 고양이를 노려본다. 틈을 주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여

유를 부리던 그가 숨을 고르고 고개를 좌우로 젖히면서 목에 힘을 빼고는 앞발로 어미 쥐의 볼기짝을 툭 건드린다. 그때다. 어미 쥐가 기다렸다는 듯이 와락 뛰

쳐나오며 고양이를 덮친다. 엉겁결에 고개도 채 못 돌리고 혼비백산하여 찢겨진 문풍지 틈으로 도망쳐 나왔다.

  

   어머니가 고양이를 불러 안아주면서 진정시켰다. 연신 심장을 벌렁거리면서 식겁했다는 눈치다. 살살 달래서 용기를 북돋워 주고는 다시 광으로 밀어 넣으

니 들어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며 뒤돌아 나오기 바쁘다.

  

  

   이만큼 세월을 살다 보니 게으름뱅이 고양이는 한 둘이 아닌 듯하다. 휘황찬란한 네온 불빛이 명멸하는 도심의 거리에서도 나는 어릴 적 어머니가 기르던 그

녀석을 쏙 빼어 닮은 고양이들을 종종 만나곤 한다.

  

   그들은 비만해서 순발력이 떨어지고 자신감도 잃었다. 바람피울 때만 고양이 무늬 코트 입고 으스대며 자랑이 대단하다. 친구들을 만나면 열심히 일해서 돈

벌면 뭐하냐며 비아냥거린다.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예쁜 고양이들이 자기만 좋아한다고 껄떡대며 잘난 척하다가 어머니가 지나가면 털을 뉘이며 꼬리를 낮추

고 눈꺼풀을 내리깐다.

  

   자신의 게으르고 무능력함을 위장하려고 갖은 애를 쓰는 고양이를 만나면 쥐들이 안쓰러워 혀를 찬다. 그래도 고양이는 개의치 않는다. 그에게 체면 같은 건

털어버린 지 오래다.   과거에는 어떻게 살아왔던 상관없이 당장 혼자만의 편하고 안락함에 젖어 게으른 바느질로 하루하루를 꿴다. 시궁창을 들락거리는 쥐들

이 반짝이는 눈으로 고양이에게 윙크하면 머쓱한 하품으로 매무새를 고치며 취기에 젖은 네온을 밝힌다.

  

   상처를 무릅쓰고 억지로 사냥할 필요가 없다. 잠 안자고 굶주리며 준비하지 않아도 태양은 어김없이 뜰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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