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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 行

덕유산

 

[컵라면과 덕유산]

 

눈도, 상고대도, 바람도 없는 겨울 덕유산은 신김치에 신맛이 빠진 것처럼 밍밍하다. 스무 번 정도 겨울 덕유산을 찾았지만, 봄 보다 더 봄날 같은 덕유산은 다소 낯설다. 넉넉한 덕을 품은 덕유였기에 큰 욕심 없이 안기곤 했었는데, 눈이 없는 겨울 덕유산은 마음에서 자꾸만 겉돈다. 나는 욕심이 있었던 게야.

 

동엽령에서 중봉으로 이어가는 길에서 마주하던 상고대는 천하 일미였다. 바람 세찬 날에도 씩씩하게 걸어 다녔던 길인데, 바람도 상고대도 없는 산길은 지루하게 느껴진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산주름 깊게 잡힌 골짜기마다 고요히 내려앉은 안개가 산그리매의 맵시를 돋보이게 한다. 부드러운 햇살이 골짜기마다 스며들어 한 멋을 더 보탠다. 동양화 풍경을 연상케 하는 저 골짜기 어디쯤에 신선이 바둑을 두고 있을지도 몰라. 아마도 이런 풍경에서 ‘덕유(德裕)’라는 이름을 얻지 않았을까. 눈이 많았다면 산주름은 경계가 흐려서 자칫 만나지 못했을 풍경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세상은 덧셈도 뺄셈도 아니다. 무엇이 사라져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도 있다.

 

백암봉을 앞두고 바람을 피해 컵라면에 온수를 붓는다. 반은 익히고 반은 불려 허기를 채운다. 막걸리 한 잔에 김치를 곁들이며 넉넉한 덕유를 음미한다. 어쩌면 이 소박한 시간이 산행의 진미일지도 모른다. 겨울 산에 오를 때마다 컵라면을 챙기는 이유다. 추운 산바람 속에서도 따뜻한 국물은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 데워준다. 눈과 상고대를 잔뜩 기대했다가 허탈해진 오늘 같은 날에는, 이 한 컵이 또 다른 위로가 된다.

 

요기를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하늘이 열리며 햇볕이 강해진다. 고글 선글라스를 쓰려 모자에 손을 얹었는데, 손끝에 잡히지 않는다. 아뿔싸. 가방을 뒤지고, 컵라면 먹었던 자리 주변을 샅샅이 살펴봐도 보이지 않는다. 몇 번 끼지도 못한 채 정이 들기도 전에 떠나보내려 하니 약간은 당황스럽다. 이제 막 정이 들려던 참이었는데 가슴 한쪽이 텅 빈다. 또 다른 선글라스를 쓰게 되더라도 덕유산에서 놓쳐버린 너를 쉽게 잊지는 못하겠지. 이미 떠난 것을 어찌하랴. 

 

눈과 상고대를 만나지 못한 겨울 덕유산, 거기에 선글라스까지 잃어버렸으니 마음이 허전하다. 짭조름한 컵라면 국물로도 채워지지 않는 아쉬움이다. 뒷맛을 삼키며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향적봉에는 사람들로 붐빈다. 그들 역시 산호초 같은 하얀 상고대를 기대하며 곤돌라를 타고 올랐을 텐데, 텅 빈 덕유산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컵라면, 선글라스, 눈, 상고대, 산그리매, 그리고 여름의 원추리꽃을 떠올리며 백련사로 하산한다. 허전함이 가득하지만, 오를 때마다 기대를 채워주었다면 내가 원하던 산이었을까. 그것은 부자연스러운 자연이 아닐까. 어쩌면 이런 날이 있어 상고대 가득한 덕유산이 더 풍요롭게 기억될 것이다. 가파른 백련사 하산길에서 아이젠을 차며 다음 산행을 다짐한다.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서 있는데 내 마음만 안달복달이다. 언제쯤 산을 조금이라도 더 닮을 수 있을까.

 

[산  행  지] 덕유산

[산행 일시] 2026년 1월 17일

[산행 경로] 안성분소 - 동엽령 - 백암봉 - 중봉 - 향적봉 - 백련사 - 삼공탐방지원센터(18.5km)

[산행 시간] 5시간 25분

 

중봉
향적봉
향적봉
겨우살이
무주구천동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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