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쏘다째]
미련이 남은 가을은 동문수학 친구들 가슴을 기웃거린다. 그냥 보내기는 아쉽고, 놀자니 딱히 집히는 것도 없다. 햇살이 쩨쩨하게 파고드는 틈을 타 오래 묵힌 안부들이 두런두런 고개를 든다. ‘쪼르륵’ 목 말랐던 가을 향기가 먼저 막걸리 잔을 비운다.
"그동안 잘 지냈는가?" "반갑다"
북한산 둘레길 7구간, 옛성길을 거슬러 옛 영화가 남은 자락을 더듬었다. 탕춘대성은 인적이 뜸하다. 늦깎이 가을을 쪼아대던 딱따구리에게 쫓겨난 듯 고즈넉하다. 구기동을 지나 6구간 평창마을길에 들어서자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다. 늘 스쳐 지나기만 했던 길을 천천히 걷는 건 처음이다. 급할 것도, 두려울 것도 없으니 사소한 풍경들까지 다 눈에 들어온다.
감나무에 감잎이 떨어져 빨간 감만 오종종 매달려 가을 햇살에 까치밥을 뜸 들이고 있다. 듬성듬성 남은 모과는 못난 성질을 이기지 못해 삐뚤삐뚤 입을 내밀고 앉아 있다.
성을 닮은 담벼락 너머로 소나무는 깔끔히 단장한 채 객을 맞는다. 길에 개미 한 마리 얼쩡거리지 않아, 우리는 초대받지 못한 이방인 같은 기분이다. 저 높은 담 속 사람들은 서로의 울타리 너머 세상 풍경을 얼마나 알고 살까. 벤치에 앉아 막걸리 잔을 휘휘 저어 들이키니, 담 안의 사람들은 담 밖의 우리들을 부러워 할 것이다.
평창마을길 중간쯤에 갤러리를 연상케 하는 건물이 서 있다. 두리번거려 보니 카페가 영업 중이다. 간판도 없고 손님도 많지 않다. 그 흔한 간판 하나 없는 이유가 뭘까.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못했다. 옥상에 올라가 평창동을 조망하며 커피를 시켰다. 아메리카노 한 잔에 14,000원이다. 내 인생 최고 비싼 커피를 받아 들었다. 조망권이 제 값을 한다 하더라도 서민이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비싸다. 객기를 부렸으니 물러설 수는 없는 일. 커피를 들고 입에 살짝 대고는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어이쿠나. 딴짓하다가 몽땅 엎질렀다. "니가 쏘다째"
옆에 있던 H도 서너 모금 마시고 뭔 일로 얼쩡거리다가 퍽 쏟았다. "니가 쏘다째", "내가 쏘다따" 인생 최고 비싼 커피를 들고 제대로 맛을 보지도 못하고 쏟았으니 이를 어째. 그런데 별 억울하지는 않다. 어차피 비싼 커피 마실 수 있을 만큼의 덕을 쌓지 못했으니 내 탓이오.
형제봉 입구에서 하산을 결정하고 식사하기 위해 통인시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예전에 한가했던 기억이 있는데, 문전성시를 이룬다. 외국 관광객들이 길거리 음식 맛을 보기 위하여 줄을 길게 서 있는 풍경이 이채롭다. 그동안 핫플레이스였던 광장시장이 최근에 바가지요금과 "양 대비 가격이 높다"는 평을 받으며 이미지 타격을 입어 썰렁해졌다는 후문과 달리 통인시장은 발 디딜 틈이 없다. 전통과 위생, 그리고 합리적인 가격, 양질의 서비스를 견고히 하지 않으면 한순간에 거품 꺼지듯 풀썩 고꾸라질 수 있다는 점은 인생사와 별다르지 않다. 값비싼 커피도 쏟아버리면 아무 의미 없듯이 인생이 그런 거지 뭐. 별거 있나.
가을햇살에 수다를 늘어놓으며 함께 한 시간. 비싼 커피를 쏟았다는 추억 한 자락 챙겼다. 막걸리 한 병 값의 열 배가 넘는 커피를 쏟았으니 아마 한동안 귓가에 쟁쟁거리겠다.
[산행일시] 2025년 11월 15일
[산행경로] 불광역 - 장미공원 - 탕춘대 - 구기동 - 평창동 - 형제봉 입구(7.5km)
[산행시간 ] 4시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