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과 겨울 사이, 그 어디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어리석은 산객이 지리에 든다. 산문의 새벽은 비가 내린 터라 별빛이 보이지 않는다. 언제부터 생긴 습관인지 모르겠지만, 지리산에 오를 때마다 찬란한 일출을 기대한다. 아마 지리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일출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던 것 같다. 비단 나만의 기대감이 아니라 인간에게 잠재된 욕망 같은 것이리라. 일기가 순하지 않으니 일출에 대한 기대감은 호주머니 깊숙이 구겨 넣고 된 호흡을 몰아쉬며 뚜벅뚜벅 노고단을 오른다.
깜깜한 새벽에 랜턴 불을 밝혀 미끄러운 길을 조심스레 더듬는다. 종종 바윗길에 미끄러지는 경험을 한다. 경미하게 넘어져 대수롭잖게 넘기는 경우도 있지만, 가끔 큰 부상을 당하니까 자신의 걸음에 집중해야 한다. 좌고우면 할 것 없이 앞만 보고 걷다가 삼도봉에 이를 때쯤 하늘이 조금 흔들린다. 커튼을 열어 잠깐 맛보기로 해를 보여준다. 5분 남짓 열린 하늘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탄성을 질렀다. 어리석은 산객에게는 넘치는 행운이다.
지리산에 발을 들여놓은 지 20년 되었다. 적잖은 세월 동안 20번의 지리산 종주다. 죽기 전에 딱 한 번은 지리산 종주 능선을 밟아보고 싶어 시작한 산행인데, 매년 한 번 꼴로 지리산 능선에 오른다. 종주 산행이 결코 쉽지는 않다. 단 한 번도 쉬운 마음으로 접근한 적은 없다. 마지막 한 방울 남은 에너지까지 다 쏟아야만 허들을 넘을 수 있도록 허락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연하천대피소에 걸려 있는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를 떠올린다. 꼭 나 자신한테 하는 말 같아서 종종 새기며 마음 매무새를 고친다. 내가 20년 동안 지리산에 들렀다는 것은 적어도 20년 동안 견딜만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행여 가을을 만날 수 있을까" 조급한 마음이었다. 세석산장 이르는 길에 산 굽이 굽이 단풍이 들었지만, 능선 주변에는 이미 고스라져 썩 예쁘지는 않다. 살다 보면 그럴 때도 있지. 세월의 시비를 일일이 헤아릴 수는 없지 않겠나. 세석산장에서 종일 어깨를 짓눌렀던 15kg짜리 배낭을 내리고, 1,580m 고지 평원에서 삼겹살 구워 허기진 만찬을 즐긴다. 지리산정에서 맛보는 한 젓가락의 라면과 한 점의 삼겹살이면 거창하고 잘난척하는 행복 부스러기가 부럽지 않다.
이튿날 깜깜한 새벽을 가려 연하선경을 건넌다. 촛대봉에 올라 일출을 만나지도 못하고 지리산 최고의 연하선경 풍경을 만날 수 없음이 아쉽기는 하지만, 우리의 갈 길은 운명이었으니 무난하게 건널 수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제석봉에 올라 천왕봉을 올려다보는데 상고대가 희끗희끗하다. 이게 웬 떡인가? 가을을 만나러 왔는데, 겨울을 만나다니. 제대로 된 일출을 만나지 못한 아쉬움에 대한 보상이다. 가을이 아직 떠나지 않고 얼쩡거리는 틈에 바람 세찬 천왕봉에서 겨울을 영접했으니 이런 행운이 또 있으랴.
천왕봉에서 경사가 급한 중산리로 하산하면서 얼마나 더 지리산에 오를 수 있을까. 마음 같아서는 오래도록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세상이 울퉁불퉁하니 내 삶의 내일이 오랫동안 견딜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산행 일시] 2025년 11월 1일 ~ 11월 2일(1박 2일)
[산행 경로] 성삼재 - 노고단 - 세석산장(1박) - 천왕봉 - 중산리(34km)
[ 산행 시간] 15시간 30분(운동시간 기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