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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 行

설악산 공룡능선

[공룡은 외출 중]

 

가을이 들어 선 자리마다 오랜 기다림이 서려있다. 지난여름 쓰나미 같은 더위를 잘 견뎌내며 마음을 꾹꾹 눌러 가을에 닿았건만, 아직 가을은 멀리 있다. 긴 추석연휴 내내 가을비가 내린다. 비를 핑계로 집에만 있을 수 없어 행여 공룡을 만날 수 있으려나 마음을 다잡았다. 

 

오색에서 대청봉 오르는 길이 모처럼 한산하다. 비를 피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마음이 여유롭거나 적적할 때, 비를 맞으면 운치 있는 풍경이 되지만, 산행 중에 비를 만나는 일은 베테랑 산꾼에게도 적잖은 부담이 된다. 깜깜한 새벽에 우의를 뒤집어쓰고 된 숨을 몰아쉬며 사다리 같은 계단을 오르는 모습에서 일본 식민지 시절 강제 노역에 동원된 징용자가 연상된다. 그들과 다른 점은 자발적인 의지로 비에 맞서며 산에 오른다. 

 

공룡을 만나러 스무 번은 더 올랐던 길이지만, 여전히 힘들다. 하기사 공룡을 쉬 만날 수 있었다면, 공룡이 아니라 도롱뇽이 되었을 것이다. 힘들 때마다 주문을 외듯 '걷다 보면 찾게 되겠지'를 되내며 호흡을 몰아쉰다. 고 박영석 대장은 히말라야를 가장 잘 오르는 방법은 '1미터 앞만 보고 걷는 것'이라 했다. 산을 올려다보면 큰 산의 위용에 좌절하여 포기하는 마음이 자리 잡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깜깜한 밤이라 올려다봐도 산이 보이지 않아 다행이다.

 

폐부까지 차오른 숨을 토해내며 대청봉에 올랐다. 기대했던 일출도 없고 산도 없다. 더 넓은 밤바다 같아 스산하기만 하다. 동해에서 불어온 바람에 쓸려 먼 데서 지친 파도소리가 들린다. 막걸리 병을 비틀어 고수레하듯 들이부으니 파도소리는 한결 가벼워진다. 희운각대피소에서도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산객들 대부분 공룡능선을 포기하고 천불동계곡으로 발길을 돌린다. 이러다 웃비가 들기만 하면 더 멋진 공룡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안고 그를 만나러 나섰다. 공룡능선이 텅 비어 있다. 간혹 맞은편에서 오는 산객들 몇 만났을 뿐이다. 공룡은 비구름을 타고 외출 갔다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지난달 옥룡을 만나러 중국까지 갔지만 만나지 못했다. 설악에서도 공룡을 만나지 못했다. 올 가을은 용과는 인연 닿기가 쉽지 않지만 설악의 단풍은 저절로 곱다. 하루 종일 비 맞고 외로운 길을 걸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끌다가 어떻게 늙어갈지, 쉼 호흡에 딱 맺혔다. 늙어감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내 마음을 추슬렀다. 두려워하기보다는 낙엽이 떨어지듯 자연스럽게 늙어가면 된다. 다시 새 잎이 돋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공룡을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를 품는다. 공룡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

 

[산행 일시] 2025년 10월 9일

[산행 경로] 오색약수터 - 대청봉 - 희운각 대피소 - 공룡능선 - 마등령 - 비선대 - 설악동(20km)

[산행 시간] 10시간

 

바람꽃
참회나무
금마타리
천불동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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