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지은이 : 리처드 도킨스
1941년 케냐 나이로비 출생
영국 옥스퍼더 대 졸업
현재 옥스퍼드대 석좌교수
(저서) 이기적 유전자, 눈먼 시계공, 풀리는 무지개 등
옮긴 이 : 이 한 음
서울대 생물학과 졸업
(저서) 신이 되고 싶은 컴퓨터
(번역) 자연의 빈자리, 복제양 돌리 등
발행일 : 1쇄 (2007. 07. 20)
64쇄 (2016. 01. 27)
페이지 : 608쪽
1941년생인 저자는 케냐 나이로비 출생으로 국적은 영국이다. 진화생물학 분야 세계적인 권위자인 그는 대표적인 저서 ‘이기적 유전자’에서 유전자는 자신을 복제하는데 유리한 방향으로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진화생물학뿐 아니라 심리학, 사회학, 철학 등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세계 25개 이상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수백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다. 이 외에도 눈먼 시계공, 에덴의 강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의 역작인 ‘만들어진 신’ 역시 세계적으로 3천만 부 이상 판매된 초 베스트셀러다. 이 책에서 그는 신은 만들어진 개념이며, 인간은 신 없이도 도덕적이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책이 발간된 후로 종교계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지만, 그의 과학적 사고에 입각한 무신론을 꺾지는 않았다.
그는 다윈의 진화론 신봉자로서 종교에서 말하는 천지 창조론에 반기를 든다. 즉 종교의 근간인 ‘신’에게 도전장을 내민 셈이다. 그에게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종교가 만든 가설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솔직히 독후감을 어떻게 정리할까 고민이 된다. 달리 말하면 독후감을 쓸 내용도 별로 없고 쓸 수도 없다. 책의 원문 제목은 ‘THE GOD DELUSION’이다. ‘망상의 신’이라고’ 직역할 수 있다. 저자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명료하게 선언한 셈이다. 책을 통하여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각종 사례 및 자료들을 제시하면서 하나하나 반박한다. 책의 내용이 일으킬 반향이 워낙 크니까 저자는 어설프게 접근하지 않고 치밀하게 논박을 한다. 일반 저서라기보다는 논문 형태로 기술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자칫 역공을 당할 수 있으니까 미리 그것을 염두에 두고 저작한 느낌이 강하다.
아무튼, 이 책은 무신론자의 바이블 같은 위치에 자리했다. 그에 반해 천지 창조론을 신봉하는 종교계에서 엄청난 반발이 일어났으며, 이 책을 비판하는 도서도 부지기수로 발간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저자는 특히 종교 중에서도 유일신을 주창하는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 종교는 유일신을 강조하기 때문에 천지 창조론과 맞닿아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다 신을 믿는 종교에서는 천지 창조에 대한 믿음이 그리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솔직히 독자는 이 책을 읽기가 수월치 않았다. 일단 생물 과학자가 아니어서 진화론 관련 설명이나 제시되는 사례에 둔감할 수밖에 없다. 또한, 아브라함 관련 종교를 깊이 있게 공부한 경험이 없어서 종교의 역사나 등장인물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한계를 느끼기 때문이다.
책을 요약하는 형태로 독후감을 길게 쓸 생각은 없다. 저자가 제시하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례와 진화의 증거라는 사례를 중심으로 몇몇 발췌해서 의견을 개진할 것이다.
[들어가는 말]
[나는 확신한다. 부모의 종교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막연한 느낌과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고 있으면서도 종교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당신이 그들 중 하나라면 이 책은 당신을 위한 것이다.]
책머리에 무신론자를 대변하는 말을 대뜸 걸었다. 이 문장의 속내는 절대로 자식들한테 종교라는 이유로 강요하지 말라고 주문한다. 아이의 의식이 미성숙 단계에서 세뇌되어 버리면 그 아이는 정상적인 사고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편향된 종교에 종속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종교는 아이에게 멍에가 될 수 있으므로 강요하게 되면 부모 자격으로서 빵점이 된다는 논리다. 아니 빵점보다도 더 모자라는 행위라는 것이다.
[존 레넌의 노랫말처럼 “상상해 보라, 종교 없는 세상을”, 자살 폭파범도 없고, 911도, 런던 폭탄테러도, 십자군도, 마녀사냥도, 화약 음모 사건도, 인도 분할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도,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서 벌어진 대량 학살도, 유대인을 ‘예수 살인자’라고 박해하는 것도, 북아일랜드 ‘분쟁’도, 명예살인도,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번들거리는 양복을 빼입은 채 텔레비전에 나와 순진한 사람들의 돈을 우려먹는 복음 전도사도 없다고 상상해 보라, 고대 석상을 폭파하는 탈레반도, 신성 모독자에 대한 공개처형도, 속살을 살짝 보였다는 죄로 여성에게 채찍질을 가하는 행위도 없다고 상상해 보라, 내 동료 데즈먼드 머리스는 미국에서 존 레넌의 노래를 부를 때에는 “종교 없는”이라는 가사를 빼고 “한 종교는 있는”이라고 가사를 바꿔 부르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종교의 폐해를 예시로 들었다. 종교라는 이유로 이뤄진 갖은 박해를 나열하려면 수도 없을 것이다. 물론 종교의 순기능을 폄훼할 생각은 없다. 종교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이 갱생의 길을 걷고 새로운 에너지를 얻어 생명을 건진 일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종교의 순기능을 부정하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다. 그런 면에서는 반드시 종교가 필요한 부분도 있지만, 종교가 만들어낸 악 기능에 대해서도 간과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대단히 종교적인 불신자]
종교계에서는 20세기 대표적인 과학자인 아인슈타인의 “종교 없는 과학은 불구이고, 과학 없는 종교는 장님이다”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아인슈타인이 종교에 대한 긍정적인 세계관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말도 했다.
[물론 당신이 내 종교적 확신에 관해 읽은 것은 거짓말, 체계적으로 되풀이된 거짓말이었다. 나는 인격 신을 믿지 않는다. 나는 그 점을 결코, 부정하지 않고 명확히 표현해 왔다.. 내 안에 종교적인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 과학이 밝혀낼 수 있는 세계의 구조에 관한 무한한 찬탄이다.]
- 종교계는 어떻게든 아인슈타인을 신의 세계로 끌어들이려고 무지 노력을 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1940년 “나는 인격 신을 믿지 않는다”라는 말을 정당화하는 유명한 논문을 썼다. 이에 종교인들은 항의하고, 심지어 유대인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틀린 것이라고 우기기도 했다. ‘신은 영혼의 일종이기 때문에 망원경이나 현미경으로 발견할 수 없을 뿐이다’라며 설득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를 비판한 모든, 유신론자들이 간파한 사실 중 하나는 아인슈타인이 그들 편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신 가설]
신의 존재 여부에 관한 논쟁 중 유신론자 일부는 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라고 주장한다. 이는 논리적으로 가당치 않은 요구다. 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면서 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라는 것은 입을 틀어막겠다는 막무가내식 주장이다. 이에 대한 ‘버트런드 러셀’의 찻주전자 우화를 들춰보자.
[내가 지구와 화성 사이에 타원형 궤도를 따라 태양을 도는 중국 찻주전자가 하나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찻주전자가 우리의 가장 강력한 망원경으로도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작다는 단서를 신중하게 덧붙인다면, 아무도 내 주장을 반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 주장이 반증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을 의심하는 것은, 인간 이성에 대한 용납하기 어려운 억측이라고까지 내가 말한다면 그건 헛소리로 여겨져야 옳다. 하지만 그런 찻주전자가 존재한다고 옛 서적에 명확히 나와 있고, 일요일마다 그를 신성한 진리라고 가르치며, 학교에서도 그를 정신에 주입시킨다면]
- 우주를 도는 찻주전자는 존재하는가? 이 경우 우주에 찻주전자를 상상할 수는 있지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다면 찻주전자는 존재한다는 것인가.
[유신론자가 신에 관해 주장하는 바는 신이 크거나 작은 모든 것을 창조하거나 보존하거나 없앨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신은 자연법칙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신은 자연법칙을 만들며 그것을 변경하거나 보류할 수 있다. 원한다면 말이다.]
신이 자연을 창조했다면, 자연에서 일어나는 자연적인 현상 즉, 화산폭발이나 지진 등을 왜 굳이 발생시킬까 설명할 수 없다면, 꼭 필요치 않은데 그런 것을 만든 이유를 단 한 번도 설득력 있게 들어본 적이 없다. 그냥 심심해서 불꽃놀이 하듯이 한 번 만들어 본 것일까.
미국 보스턴 심신의학연구소의 심장학자 ‘허버트 벤슨’의 지휘로 연구를 진행했다. 1,802명의 심장 동맥 우회술을 받은 환자들을 세 집단으로 나눴다. 첫 번째 집단은 기도를 받지 않았고 그 사실을 모르도록 했다. 두 번째 집단은 기도를 받았고 그 사실을 모르도록 했다. 세 번째 집단은 기도를 받았고 자신을 위해 누군가 기도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심신에 효과가 나타나는지를 밝히는 연구를 했다. 기도자들은 미네소타주, 매사추세츠주, 미주리주에 있는 세 교회에서 기도를 올렸다. 모두 병원과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연구결과는 명쾌했다. 기도를 받은 환자들과 그렇지 않은 환자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자신이 기도를 받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는 한 가지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 차이는 예상을 완전히 깨는 것이었다. 자신이 기도의 혜택을 받았다는 것을 안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심한 합병증에 시달렸다.]
이 한 번의 연구결과로 객관적인 결과를 얻었다고 특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기도를 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어떤 인과관계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신이 있다면 왜 기도를 받은 사람에게 좋은 결과를 주지 않았을까. 특히 기도를 받은 줄 아는 표본에서 합병증이 많이 생겼다는 것은, 그들이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 자신을 위해 기도를 함으로써 빨리 나아야 한다는 스트레스를 받은 것은 아닐까 추정한다. 신학자들은 이 연구에 대하여 당연히 반박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유사한 연구를 수차례 시행하여 기도의 효험을 입증하고 반박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을 텐데, 그렇게 하지는 않고 기도가 효험이 있다고 논거 없이 주장하고 간증만을 되풀이한다.
[신의 존재를 옹호하는 논증들]
수 세기 동안 신학자들이 신의 존재를 옹호하는 논증들을 펼쳐왔지만 아무도 증명하지는 못했다. 저자는 신학자 토마스아퀴나스의 논증 중 가장 설득력 있다는 신이 세상 만물을 설계했다는 설계 논증에 대해서도 터무니없는 망상으로 취급한다.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논증의 사례 중, 우스꽝스러운 결말이 난 논증을 제시한다. 아주 독실하고 성숙한 친구가 대학교 때 여자 친구와 캠핑하던 중, 한밤중에 악마의 목소리를 듣고는 사탄임을 확신했다. 그 일은 그가 사제의 길을 택한 이유가 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동물학자에게 그 경험을 얘기했다. 그 악마의 소리는 악마 같은 울음소리 때문에 ‘악마 새’라는 이름을 얻은 새였다는 것이다. 신과 사탄의 존재를 굳게 믿었던 그는 존재하지도 않은 악마 소리의 경험으로 자신의 인생행로에 큰 영향을 받은 셈이다.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신의 존재를 입증하려는 시도는 무수히 많았다. 그렇지만 그들이 신봉하는 성서가 언제, 누구에 의해 완성되었을까. 결국, 성서도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그 내용의 진실성에 대해서는 100% 담보할 수 없는 게 객관적인 논리다. 성서는 종교인들을 규합하고 의식화할 수 있는 도구일 뿐, 역사 기록이라고 단정하여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무리한 가정이다.
[신이 없는 것이 거의 확실한 이유]
창조론의 논리는 과학자들이 자연 현상은 우연의 선택을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는 주장에 대해 통계적으로 너무나 가능성이 희박하고 복잡하고 아름답고 경이롭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우연의 대안은 오로지 설계뿐이다. 즉, 자연은 설계자(신)에 의해 정교하게 설계되었다는 논리다. 이 논리에 대한 과학의 대답은 설계는 우연의 유일한 대안이 아니다. 자연선택이 지금까지 제시된 해답 중 유일하게 유효하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진화론을 신봉하는 다윈주의자다. 그에 따르면 진화한 기관들은 뛰어나고 효율적이지만 종종 결함도 보인다. 그것이 바로 그 기관들이 진화된 증거라는 것이다. 요통, 탈장, 자궁탈출증 등 인간의 질병 중 많은 것은 수억 년에 걸쳐 자연선택의 냉혹함과 낭비성이 우리의 의식을 일깨운다는 것이다. 만약, 설계자에 의해 설계되었다면 굳이 질병을 설계했을 리가 없다는 주장이다.
시계 같은 인공물의 경우, 지적인 공학자가 설계자였다. 같은 논리를 눈이나 날개나 거미나 사람에게 적용한다면 설계자는 누구인가? 그 설계자는 누가 설계했는가? 이러한 모순을 정확한 설명 없이 ‘신’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 넘어갈 수는 없다. 인간세계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 가장 독창적이고 설득력 있는 것은 자연선택을 통한 다윈의 진화다. 이에 반박할 논리를 명징하게 개발하지 못하는 한 신은 나타날 수가 없다.
[종교의 뿌리]
종교에 독실한 사람들은 자신의 신을 위해 죽었고 신을 위해 살인을 했다. 신을 위해 자신의 등에 피가 나도록 채찍질을 했고 오로지 종교에 봉사하기 위해 평생 독신으로 있거나 고독한 침묵 수행을 맹세했다. 그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일까? 종교의 혜택은 과연 무엇일까? 다윈주의에서의 ‘혜택’은 보통 개체가 지닌 유전자들의 생존에 어떻게든 기여한다는 의미다.
종교와 다윈주의자들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종교는 분명 스트레스나 질병으로부터 신앙 치료 사례 등 몇몇 선한 영향을 끼친 부분이 있지만, 그 이상으로 악한 영향을 남긴 부분에 대해서도 간과할 수 없다. 그에 비해 다윈주의자들이 진화의 영역에 대해서 생물 개체는 자신의 무한 능력 확장을 위해 열정적으로 변화하고 노력하여 자신의 생존능력을 확장하는 결과를 얻는다는 것이다. 만약에 신이 존재했다면, 유전자의 능력이 환경을 극복하면서 증대되는 점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신은 애초에 설계에 실패했기 때문에 지금도 설계를 계속 수정하여 업그레이드한다는 얘기인가? 그렇다면 당초에 설계했던 신은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라 어딘가 많이 모자라는 인간을 꼭 닮은 신이란 말인가?
[도덕의 뿌리 : 우리는 왜 선한가?]
종교인들은 종교 없이 인간이 선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 그렇지만 종교가 인간을 선함으로 이끄는데, 도움은 되겠지만 선함이 종교로서만이 발현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인간 본성에 이미 선함이 존재해 있다. 종교인들이 종교만이 선함을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착각이다. 타 종교 간에 엄청난 박해와 멸시와 질투, 그리고 전쟁까지 불사하는 그들에게서 어떻게 선함이 종교를 바탕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신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선 하려 애쓰겠는가? 종교인이 이렇게 질문한다면, “당신이 선 하고자 애쓰는 이유가 오로지 신의 인정과 보답을 얻거나 신의 불만과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말인가요?” 이렇게 반문하고 싶다. 오로지 처벌이 겁나서, 그리고 보상을 바라기 때문에 사람들이 선 한 것이라면 인간은 참으로 딱한 존재다. 결국, 신과 선함의 관계는 어떤 인과관계가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1969년 캐나다 몬트리올 경찰이 파업에 들어가자마자 은행 강도 사건이 벌어졌다. 공항 손님을 서로 차지하려고 실랑이 부리던 택시 기사들은 리무진을 불태웠고, 저격수가 경관을 살해하고, 폭도들이 호텔과 레스토랑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한 의사는 자기 집에 침입한 강도를 죽였다. 시 당국이 질서회복을 위해 군대와 기마경찰대를 요청할 때까지 은행 여섯 군데가 털렸고, 100곳의 상점이 약탈당했다. 몬트리올 시민들 대다수는 신을 믿었을 것이다. 이들은 경찰의 눈을 피할 수 있게 되자 신까지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일까? 과연 신은 존재한다는 가정에 의문을 가지지 않아도 될까.
[‘선한’ 책과 변화하는 시대정신]
노아 이야기에 깊이 물들고 성서의 가르침 외의 다른 것에는 무지한 그들을 과연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는가? 자신들이 받은 교육 때문에, 그들은 자연재해로 지각판 변동 같은 자연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인간의 비행에 대한 응징으로 보게 되었다. 신이 관련된 대규모의 지진들이 언제나 인간과 관련이 있다고 믿는 것은 지극히 자기 중심주의다..
종교인 중 일부는 현재도 노아 이야기를 비롯한 성서에 기재된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에게는 오직 신만이 구원할 수 있는 능력자로 규정하고 다른 이론이나 이의에 대해 귀를 닫아 버린다. 누가 이들에게 귀를 열어 바르게 구원할 수 있겠는가. 스스로 귀가 먼 그들을 보면 어떤 면에서는 안타깝다. 그들을 신으로 인도하여 눈을 멀게 한 것은, 죄를 짓는 게 아닐까.
[노벨상을 받은 미국의 물리학자 와인버그는 이런 말을 했다. “종교는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한다. 그것이 있든 없든, 선한 사람은 선을 행하고 나쁜 사람은 악행을 한다. 하지만, 선한 사람이 악행을 한다면 그것은 종교 때문이다.” 파스칼도 비슷한 말을 했다. “사람은 종교적 확신을 가졌을 때 가장 철저하고 자발적으로 악행을 저지른다.”]
독자는 와인버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선한 사람은 어떤 조건이나 환경에서도 선을 행하고, 악한 사람은 아무리 종교인이라도 악을 행한다. 그런 면에서 종교와 선행은 어떤 인과관계가 성립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신이 우리를 용서하고 싶다면 스스로 고문당하고 처형당하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 그냥 용서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굳이 그렇게 함으로써 먼 미래 세대의 유대인들이 ‘그리스도 살해자’라고 박해받고 학살당하도록 한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예수는 일종의 혁명가다. 신은 왜 그에게 그토록 가혹한 형벌을 내려야 했을까. 독자는 항상 그것이 궁금했다. 예수를 메시아로 신의 계시를 따르게 할 것이었다면 굳이 그를 형벌로 다스릴 이유는 없다. 그로 인해 유대인들이 2,000년 동안 박해를 받게 했다는 것은 신이 잠시 망령이 든 게 아니라면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종교에 적대적인 이유]
저자는 근본주의 창조론자에 맞서 진화를 지지하는 증거가 압도적으로 강력하다고 주장한다. 근본주의자들은 자신의 성스러운 책과 모순되기 때문에 그것을 보지 않으려 한다는 점을 몹시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보다 더 비극인 것은, 진화의 진리들이 과학적으로 밝혀진 사실에 대하여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에 반해 저자는 자신의 주장에 반하는 불가피한 증거가 나온다면 기꺼이 마음을 바꿀 것이라 주장한다. 그런데 근본주의 창조론자들은 절대로 마음을 바꾸지 않을뿐더러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런 신념은 자기모순이다. 신의 존재가 절대 진리였다면 인정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새로운 가설이 등장하거나 바뀐 진실에 대하여, 입증 가능하다면 수용해야 마땅하거늘 그렇지 못한 것은, 그들이 신봉하는 신의 존재에 대한 신념이 허점투성이라는 반증이다.
종교를 신봉하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삶의 질의 향상과 행복 추구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 국가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으며, 기독교 국가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영국에서는 현재도 불경죄가 법전에 남아 있으며, 그에 따른 범법자들은 고발을 피할 수 없다.
기독교 국가에서는 동성애도 범법 행위다. 컴퓨터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한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닝’이 동성애자라는 혐의로 유죄 선고를 받고 화학적 거세를 강요받자 자살을 선택했다. 독자는 개인적으로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지만, 그것이 범법행위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기독교에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범죄가 되는 것이다. 또한, 낙태에 대하여 기독교는 절대 반대한다. 아직 인간이 아닌 미성숙의 배아 단계에 있는 상태에 대해서는 인간 존중을 내세워 낙태를 금지하는 데 반하여, 사형 집행에 대해서는 관용이 없다. 인간 존중을 표방하는 종교 이념과 대비해 보면 모순이다.
2005년 7월 영국 런던에서는 동시다발적인 폭탄 공격이 일어났다. 이 일을 저지른 사람은 젊은 영국 시민이었다. 그들이 왜 이렇게 끔찍한 짓을 했는지 도무지 해답을 찾을 수 없다. 그들에게 이런 미친 짓을 저지르게 할 만큼 강력한 동기는 오로지 종교 신앙뿐이다. 그들은 코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 세계무역센터를 폭파한 빈라덴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천국으로 간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자살 테러범들은 자신들의 종교 학교에서 배운 것을 진심으로 믿기 때문에, 이런 끔찍한 짓을 서슴지 않고 저지른다. 이런 경우 아이들에게 신앙이 절대 선이며, 미덕이라고 가르치고 강요하는 것은, 악이다. 아직 자신의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았으며, 선택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이 형성되지 않은 단계에서 신앙이라는 포장지를 씌워 아이가 올바른 세계관을 정립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케 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미친 행위다.
[종교로부터의 도피]
1858년 이태리 볼라냐에서 유대인 부모와 함께 살던 여섯 살짜리 ‘에드가르도 모르타라’가 종교재판소의 명령을 받은 교황청 경찰에게 합법적으로 강탈당했다. 그는 부모와 강제로 격리되어 가톨릭교도로 성장했다. 그의 부모는 사제들의 엄중한 감시하에 잠깐 면회만 허용되었다. 이 일화의 발단은 14살의 ‘안나 모리시’라는 문맹의 가톨릭 소녀가 모르타라를 돌보게 되었을 때, 아기가 아파 그녀는 전전긍긍했다. 세례를 못 받고 죽게 되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믿음 때문에 이웃의 가톨릭교도에게 세례 하는 법을 배웠다. 집으로 돌아온 소녀는 양동이에 담긴 물을 모르타라에게 조금 끼얹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세례 하노라”. 그것이 다였다. 그 순간부터 모르타라는 법적으로 기독교인이 되었기 때문에 유대인인 부모와 격리되게 된 것이다. 물을 뿌리고 짧은 주문을 외우는 것으로 아이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게 된 것이다. 이런 경우, 종교의 신념은 무엇인가. 아이의 행복보다 더 소중한 가치가 무엇이란 말인가.
종교인들이 증거도 없이 자신들이 태어날 때 지닌 신앙이 참된 신앙이며 다른 모든 신앙은 정도를 벗어났거나 전적으로 틀렸다고 생각하는 뻔뻔함에 대하여 아연실색할 정도다. 교황청은 자신들이 저지른 일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인지조차 하지 못한다는 점은 안타까울 뿐이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들이 아이의 미래를 행복하게 보장하는 절차를 당연하게 이행했다고 생각하는 점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1955년 페루 산악지대에서 얼어붙은 채 발견된 500년 전 잉카 소녀의 유해를 발견한 인류학자들은 소녀가 희생제의 제물이었다고 발표했다.
[잉카 사제들의 영적인 헌신에 경이를 느끼고, 영예롭게도 희생자로 뽑혔다는 자부심과 흥분에 가득하여 마지막 여행을 떠난 소녀의 심정에 공감하라는 텔레비전 다큐 프로그램의 메시지는 사실상 인간 희생제가 나름대로 찬란한 문화적 창조물이라는 것이었다.]
저자는 다큐 프로그램에 대하여 어리석고 자만심에 가득하고 미신에 사로잡힌 무지한 어른들이 무력한 어린이를 살해한 사실에 대하여 텔레비전을 보는 시청자들에게 의식을 빙자하여 살인행위를 합리화한다고 분개한다. 어떻게 부도덕한 행위를 지켜보면서 선을 찾으라는 것인가.
잉카의 소녀는 자신의 양육 배경인 종교를 충실하게 믿었을 것이, 분명하다. 소녀는 눈부신 태양신의 열기를 받으면서 영원한 낙원으로 간다고 진심으로 믿었을 것이다. 아니면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소녀는 신앙의 희생양이 되었다. 만약에 소녀가 낙원에 대한 확신도 없고, 죽으면 현실적으로 어떻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희생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 너무 어려 태양에 대한 숭배 여부를 판단할 수 없는 어린아이에게 자신들의 신앙을 주입했다는 점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종교인들은 자신들의 종교가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그것이야말로 배척되어야 할 가치다. 특히 어린아이들에게 서로 자신들의 종교가 우월하다고 가르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힌두교인이든 유대인이든 이슬람교도든 기독교인이든 누구나 자신의 신앙이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서로 배타적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어떤 종교든 타 종교보다 우월할 수는 없다. 아이들에게만큼이라도 서로 다른 신앙에 대하여 알게 하고, 그것들이 화합할 수 없음을 알아차리게 하고, 그 불화합성이 어떤 결과들을 빚어낼지 스스로 결론을 내리게 하도록 도와야 한다. 어느 것이, 타당한지는 충분히 자란 뒤에 스스로 결정 내리게 해야 한다.
[신이 우리에게 주는 것들]
종교는 인간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우리의 존재 자체와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의 특성을 설명하고자 했다.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도덕적 가치를 명령했다. 또한, 인간에게 위로와 영감을 주기도 했다.
신은 아마 없을 것이고 도덕에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니라고 인정하면서도 신을 최후 수단으로 여기고 되돌아가는 사람들은 심리적 정서적 필요에 의한 것이다.
[맺음말]
이 책을 통하여 ‘리처드 도킨스’를 처음 만났다. 그의 전작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그의 책들은 이 책의 서술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 그만큼 저자는 철두철미하게 자신을 가두는 느낌마저 든다. 학자니까 논문 형식의 글을 가장 잘 쓰기도 하겠지만, 독자는 여전히 책 읽기가 쉽지 않다.
저자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배경으로 깔고, 그것을 논증하려고 이 책을 썼다고 생각한다.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논증이 필요한 이유는 나름대로 있겠지만, 독자의 입장은 단순하다.
과학은 입증이 될 수 있으나 신의 존재는 입증 불가하다. 그냥 있다고 믿는 것이다. 결국, 신을 믿는 사람에게는 신이 존재하는 것이고, 신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에게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유신론자 입장에서 신의 존재를 입증할 수 없다는 것은 맹목적인 종교가 될 수 있다. 이럴 경우, 신이 꼭 존재해야 하는가. 신이 없는 종교는 불가능한가 반문하게 된다. 현실적으로 신이 없는 종교도 존재한다. 불교가 그렇다. 불교는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해 어떤 가설도 성립되지 않는다. 어쩌면 철학적인 논제와 가르침을 바탕으로 해서 성립된 종교라 할 수 있다.
나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자다. 굳이 신이 있다면, 나의 신은 나 자신이다. 저자는 우주 및 생물, 기도 등 다양한 방법으로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입증했다. 결론적으로 현재까지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 누구도 입증하여 도킨스에게 반박하지 못한다.
신이 존재한다면 결국 신은 인간이 만든 피조물이다. 그리고 신은 단 하나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상의 인구 수 만큼 존재한다.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자신만의 신이 있어서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그 신과 동행한다.
독자가 청년일 때 이 책을 읽었다면 지금과는 사뭇 다른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뭔가 반항적이고 호기심이 많았던 청년 시절이었으면 리처드 도킨스를 많이 응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책을 읽는 감정은 그리 특별하지 않다. 아마도 독자 자신이 삶을 살면서 신에 대한 경외심이 많이 누그러졌을뿐더러 자신과 의견이 다른 주장에 대해 예전처럼 흥분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연에 적응하면서 신체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정신적 환경적 변화를 겪는다. 예를 들어 한국인의 평균 키가 70년 전보다 10cm 정도 커졌다. 이런 현상은 환경에 적응하면서 진화하고 있다는 증거다. 신이 설계했다면, 굳이 환경에 따른 변화를 겪지 않아도 되도록 설계했을 것이다. 그것이 신의 능력이다.
수많은 과학자와 신학자들이 신의 존재 여부를 놓고 수 세기 동안 논쟁을 벌인다는 것은 의미 없는 낭비다. 신은 그를 신봉하는 사람에게는 존재하는 것이고, 신봉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의 존재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은 이 책을 읽고 신의 존재를 부정하기 위해 쏟는 에너지는 낭비다.
저자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 공격받지 않기 위해 너무 많은 사례를 곁들였다. 지나친 면이 있어서 오히려 독자가 독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신이 존재하든 그렇지 않든 인간세계에서 종교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바람이 있다면, 자신의 신이나 종교가 더 우월하다는 배타의식만큼은 사라졌으면 좋겠다. 그래야만 종교 간 갈등이 줄어들 것이고, 종교의 역기능이 줄어들고 종교의 순기능이 더 빛을 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벽돌만 한 책을 두 번씩 읽고 독후감을 쓰려해도 특별히 쓸 말이 없다. 책에서 제시한 많은 사례를 눈가는 대로 읽고 그러려니 이해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특별히 반론할 것도 없지만, 설령 반론한다 해도 무의미하다. 제 개인적인 입장을 다시 한번 정리하면,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인간 각 개인에게는 그들만의 신이 존재할 뿐이다. 세상 모두를 구원할 신이 존재한다면, 세상에서 발생하는 불합리한 모순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오로지 나만의 신이 나와 함께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나의 신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면, 나는 그의 명령에 따라 세상의 구원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오만하거나 경박한 개똥철학 같은 주장이지만, 근본적으로 신을 믿지 않는 개인적인 신념을 바꿀 생각은 없다.
2025년 9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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