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한 새벽, 비가 오락가락하는 갈등을 재우며 지리 능선에 오른다. 나의 지리산 종주 산행은 단순하게 산을 오르는 행위라기보다는 엄숙한 의식이다. 지리에 대한 경외심을 시험하려는 듯 비와 바람과 어둠이 길을 막는다. 행여 일출을 만날 수 있으려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침이 열리는 삼도봉에 다다랐다. 해는 구름뒤에 가려 있고 운해가 끝없이 펼쳐져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연신 탄성만 질러댄다. 얼마만의 영광인가.
장쾌한 산맥을 따라 걷는 걸음이 가볍다. 숲길에는 새소리 바람소리가 장단을 맞히고, 그 소리들 틈에 들리는 나의 숨소리를 저미며 자아를 뒤적거려 본다. 매번 산에 오를 때마다 힘이 들지만, 햇볕과 구름, 새소리 바람소리가 반겨주니 토라질 이유가 없다. 운해는 종일 걷히지 않아 꼭 비행기를 타고 구름 위에 떠 있는 느낌이어서 그대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인다. 인생 최고의 풍경을 만났으니 분명 행운이다.
세석대피소에서 여장을 푸니 하루 종일 힘들었을 해가 넘어가고 달이 뜬다. 피곤에 지친 산인(山人)들의 코 고는 소리 리듬에 맞춰 하늘의 별들도 깜빡인다. 다시 새벽을 깨워 촛대봉에서 일출을 맞는다. 어제의 여운이 남은 구름이 걸쳐져 있는 틈을 비집고 해가 뜬다. 산에서 이틀을 보내는 동안 운해와 일출을 함께 맞는 행운이 좋기는 하지만, 다음에 아무것도 만나지 못할 일을 생각하여 경거망동하지 말자. 바람이 세찬 연하선경을 건너면서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장터목에 다다랐다. 뜨끈한 라면 국물로 온기를 채운다.
천왕봉에 오를 때마다 춥고 바람이 많아 쫓기듯 내려왔었지만, 모처럼 하늘이 맑고 바람도 잦아들어 편안하고 느긋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다. 지리산 주능선에서 아름다운 이틀을 여유 있게 보낼 수 있었던 시간이 고맙기만 하다. 산인(山人)은 산을 얼마나 빨리 다니느냐가 아니라, 산에 얼마나 오래 머무를 수 있느냐가 진정한 산인의 가치 기준이다. 오랜만에 참 산인이 된 기분이 꽤 솔솔 하지만, 단전에 힘을 모아 웃자란 기분을 꽉 잡아내자.
[산행 일시] 2025년 5월 17~18일
[산행 경로] 성삼재 - 노고단 - 세석대피소 - 천왕봉 - 중산리(33.5km)
[산행 시간] 20시간 30분(숙박시간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