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지은이 : 서동욱(철학자, 시인)
저서 : 차이와 타자, 들뢰즈의 철학, 일상의 모험 등
발행일 : 2024. 01. 12.
다소 생경한 느낌의 책 제목에서 호기심을 느꼈다. 서문에서 날씨가 우리를 만드는 것이지 우리가 날씨를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선언한다. 생각 또는 철학도 날씨가 만들어 낸다. 독일의 검은 숲 속에 오두막을 짓고 숨기 좋아했던 하이데거는 오두막에 폭풍이 치고 눈이 오면 그때가 철학자의 시간이라고 말했다. 오두막을 눈으로 덮어 따뜻하게 만드는 날씨는 생각의 알을 암탉의 체온으로 데우는 부화기다.
중요한 것은 반대 방향에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날씨가 만드는 사상이 아니라 날씨를 만드는 사상은 없는가? 헤라클레이토스는 폭우로부터 가뭄을 만들어 낼 능력이 있는가? 라며 날씨를 만드는 착상을 최초로 사상사에 끌어들였다.
니체 역시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날씨를 바꾸고자 한다. ‘떠도는 구름’으로부터 ‘청명한 하늘’로, 그러니까 구름 뒤에 숨은 인간들을 억압하는 원리들로부터 자유로. 나는 자유와 하늘의 청명함을 푸른색 종처럼 모든 것 위에 펼쳐놓았다고 자라투스트라는 말한다. 날씨는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땅을 정복하거나 나라를 세우듯 날씨를 바꿀 수는 없다.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날씨는 늘 인간에게 겸손에 대해 알려준다. 결국, 날씨는 인간의 계획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 바람 불고 싶으면 바람 불고 비를 내리고 싶으면 비를 내릴 뿐이다. 인간은 날씨에 대해서 뭘 어쩔 수 없다. 날씨를 정확히 예측하는 것조차 매번 좌절을 겪는다.
작가는 누군가에게 날씨를 선물하듯 일기예보로 날씨를 알려주어 불확실성에 노출된 이에게 위로하듯 구제책을 조언하기 위하여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야말로 비와 바람과 햇살과 추위와 더위가 넘쳐나는, 울고 괴로워하며 웃고 또 씁쓸해하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어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쉬어가기를 주문한다.
책의 구성은 ‘1부 우리는 성숙할 수 있을까. 2부 세상을 견뎌내기 위하여. 3부 위안의 말. 4부 예술과 세월과 그 그림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신의 철학적 경험이나 고대 철학자부터 근대 철학자들의 논거를 아우르며 다양한 철학적 지식으로 독자들에게 설파한다. 그러나 독자들 나름이겠지만, 개인적으로 철학적 용어가 많고 부르기조차 어려운 이름을 가진 철학자들의 말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책을 읽으면서도 겉도는 느낌이다. 책을 읽은 후에도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이해가 어렵다. 이해력이 떨어지고, 기억력이 아둔한 나이 탓도 한몫했을 것이다.
책 내용 가운데 가장 이해가 쉽고 지침이 될 만한 장을 소개하며 저 자신의 이해력을 복습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바보와 천재]
요즘 ‘천재’는 흔한 말이 되었다. 먹방 천재도 있고, 등산 천재도 있다. 좀 더 과학적인 접근으로는 아이큐가 얼마 이상이면 천재라고 한다. 그런데 인간의 능력은 무한하다고 할 만큼 다채로운 능력에 비추어 볼 때, 아이큐 같은 기준은 임의적일 뿐이어서 별다른 유의미한 척도가 되지 못한다. 이와 관련해 볼테르의 ‘철학사전’을 뒤져 보자.
‘천재라는 단어는 대단한 재능을 통틀어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창의성이 개입된 재능을 지칭한다. 아무리 자기 분야에서 완벽한 예술가라도 창의성이나 독창적인 면이 전혀 없다면 결코 천재라는 명성을 얻지 못한다. 체스의 최초 발명자보다 체스를 더 잘 두는 사람이 여럿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체스의 발명자는 천재였고, 그와 체스를 두어, 이길 사람들은 천재가 아닐 수 있다’
여기서 볼테르는 천재의 핵심적인 요소로 ‘창조성’을 내세운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도 그의 ‘판단력 비판’에서 천재의 4가지 면모를 제시했다.
첫째, ‘천재란 어떠한 특정한 규칙도 주어지지 않는 것을 만들어 내는 재능’이다. 이는 볼테르가 제시한 천재의 정의와 상통한다. 둘째, 아무리 독자적인 생산물이더라도 무의미한 것을 천재의 소산이라고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천재의 작품은 다른 작품들이 좋은 작품인지 좋지 않은 작품인지 판정할 수 있는 표준 역할을 할 수 있는 ‘범형’이다. 셋째, 천재는 독창적인 규칙의 새로운 작품을 창시하지만 어떻게 그런 작품이 나왔는지 설명할 수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작품을 창작하도록 가르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천재는 학자가 아니며, 천재의 산물은 학문에 속하지 않는다. 학자는 자신의 학문적 생산물이 어떻게 나왔는지 설명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동류의 성과물을 얻도록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천재는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일일이 인식하기보다는, 마치 과실나무가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경이로운 열매를 생산하듯 자연의 일부인 양 창조한다. 넷째, 자연은 자연 속의 모든 것들을 자신의 규칙(자연과학의 법칙 등)에 따라 생산한다. 그러나 자연은 독특한 산물인 예술작품에 대해선 ‘천재를 사용해’ 규칙을 부여한다.
우리에게 바보는 주저 없이 쓰면 안 되는 말이 되었다. 즉 바보는 욕이다. 그런데 바보는 그렇게 나쁜 것일까? 바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까?
바보는 늘 매력적이었고, 오래전부터 문학의 주인공으로 흔적을 남겼다. 현대에 와서도 바보는 그 매력을 유지한다. ‘포레스트 검프’ 같은 영화를 통해 ‘바보는 모든 일을 영악하고 똑똑한 아이들보다 잘 처리한다’는 메시지를 남긴다.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에서 이반은 형들이 이기지 못한 악마를 이긴다. 이반은 악마를 이기려 하지 않았는데도 악마 스스로 이반에게 진다. 이반이 악마를 이길 수 있었던 점은 일반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순수성’에서 나온다. 바보의 순수성은 사람들이 쫓는 일반적인 가치를 쫓는 게 아니라, 그런 가치를 무심히 건너뛰어 버린다. 사람들이 매달리는 기존 가치에 반응하지 않는 바보의 등장 자체가 세상을 지배해 온 그 가치들을 의문에 부치고 초라하게 만든다. 악마가 바보에게 지는 이유는 기존의 가치와 규칙을 활용해 제압하는 데 특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바보는 악마의 기술을 아무 생각 없이 간단히 뛰어넘어버린다.. 이런 바보의 방식으로 기존의 세상을 허무하게 만들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발판을 마련한 이들이 있다. 석가와 그리스도가 그렇다. 결국, 바보가 물정 모르는 바보인 까닭은 세상을 지배하는 기존의 가치와 단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속의 통상적인 가치와 단절한 바보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봄으로써 그 자신을 바보 취급하는 세상이 실은 어리석은 탐욕과 악덕으로 가득 차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천재가 새로운 규칙을 창조해 기존에 없던 것을 만들어 낸다면, 바보는 그 순수성으로 세상에 통용되는 규칙과 가치를 무력화해 세상을 텅 비워낸다. 둘 다 세상이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길을 연다. 결국, 바보와 천재는 서로 전혀 다른 인물들이고 전혀 다른 길을 가지만, 궁극적으로는 같은 일을 하는 것이다.
[산책]
걷는다는 것은 비효율적으로 느린 이동 방식 같지만, 실은 시간을 버는 일이다. 걷는 중에 생각할 수 있고, 나중에 사람들과 해야 할 말을 가다듬을 수도 있으며, 행운과도 같은 햇살을 만날 수도, 잎사귀에 부딪히는 빗소리도 들을 수 있다. 이러한 걷는 행위 중에 정수는 ‘산책’이다.
산책이 걷기와 다른 점은 이동하는 실용적 목적을 지니지 않는다. 산책자는 정처 없이 방랑하지 않으며, 길을 잃는 법이 없다, 산책은 운동경기와 같이 이기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 신체의 능력과 에너지를 극한으로 발휘하려는 노력이 없는 행위이다. 산책자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안달하는 자가 아니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처럼, 걷기를 천천히 수행하는 태평한 자이다. 즉, 건강도 산책의 궁극 목적은 아니다.
잠시 관심에서 멀어져 모르는 사이 자라난 화초처럼, 산책하는 동안 생겨나는 것은 ‘생각’이다. 산책은 유쾌한 명상, 두서없는 생각들을 만들어 낸다. 머리에 떠오르는 상태 그대로의 생각이 산책길에는 있다. 산책은 책상 앞에 앉아 계획을 세우고 하는 공부와는 전혀 다른 생각의 창이다. 니체는 사상이란 산책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지, 책상 앞에 앉아 책에 몰두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강변했다.
산책은 지구 위를 걸어 다니는 생명의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 그 자체이므로, 산책 중 얻게 되는 착상 역시 어디선가 날아온 씨앗이 꽃으로 피어나듯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가공하지 않은 원석 같은 것이다.
[철학은 날씨를 바꾸지 못했다]
작가는 본 작품을 통하여 자신의 철학적 신념을 위주로 기술했다. 에세이 형식을 빌어 일반인들이 습득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철학적 사고를 강요한다. 그런 점에서 서문에서 저자가 밝혔던 편히 쉬어가라는 주문은 다소 무리가 있다. 독자의 이해력에 한계는 분명히 있지만, 철학적 예시를 중언부언 지나치게 제시함으로써 오히려 지루하고 헷갈리게 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또한, 제한된 지면에 많은 철학적 사고를 주입하려고 애쓴 점은 충분히 이해가 되나, 그럼으로써 오히려 논점이 흐려지고 저자가 의도한 만큼 정보가 전달되지 않는 점은 아쉽다.
책 전체를 통하여 제목을 붙여 이해력을 높이려 했던 점은 칭찬할만하다. 그 가운데서도 독자가 이해하기 편하고 감동이었던 ‘바보와 천재’ ‘산책’ 두 편을 요약해서 정리했다. 특히 ‘바보와 천재’ 편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하는 바이다. 책 한 권 읽기 힘든 바쁜 현대인들에게 ‘바보와 천재’ 편만큼은 꼭 권하고 싶다.
결론적으로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는 반어법으로 책 제목을 달고 글을 썼던 작가의 의도대로
작가가 선물한 일기예보에 따라, 독자들이 우산을 준비하고, 바람막이를 준비할 수 있게 하려던 계획은 일부 성공한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단정한다. 하지만, ‘바보와 천재’와 ‘산책’ 두 편을 통하여 제시된 작가의 통찰과 철학적 신념은 충분히 전달되었으리라 생각하며, 한 권을 모두 읽은 독자는 충분하지는 못하지만 적당한 보상은 되었으므로 아쉬움을 거둔다. 날씨는 철학을 바꾸지만, 철학은 날씨를 바꾸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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