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桃溪遊錄

어머님 전 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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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별고 없으신지요?

 

지난 설날에는 진중하게 정을 나눌 겨를도 없이 도깨비에게 쫒기 듯 서둘러 다녀오느라 어머님을 뵙고 되돌아오는 길이 내내 편치 않았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어머님께서는 자식의 머리에 백발이 늘어가는 걸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렇지만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아마 세상의 때(시절)를 짊어진 사람들을 가려서 잘 살펴주려고 표식을 하기 위하여 하늘이 정한 일인 듯합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편하게 받아들이면 될 듯합니다.

 

어머님께서는 경기가 나빠서 많이 걱정되시겠지만 너무 심려치 마세요. 경기가 잠시 비틀거리는 것도 하늘의 일이라 우려만으로 어두운 터널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은 듯합니다. 오르막을 힘차게 오르면 내리막이 있고, 내리막을 수월하게 내려가면 오르막을 만나듯이 세상은 리듬을 따라 움직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내리막을 수월하게 내려왔나 봅니다. 이제 다시 오르막을 올라야 하는 초입에 서 있을 뿐 혼란스러워야 할 사항은 아닙니다. 오르막을 오를 때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쉼 호흡을 길게 다듬으며 의지를 다지면 됩니다. 세상이 아무리 힘들어도 제게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어머님의 든든한 기도가 있어서 결코 두려움은 없습니다.

 

겨울이 깊어가는 계절이면 어머님과 산에 나무하러 다니던 30년 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아버지는 농번기를 맞아 학비를 보태기 위하여 울산에 있는 건설현장에서 혹독한 추위와 고된 노동을 이겨가며 자식 뒷바라지에 안간힘을 쓰시고, 어머님과 저는 그 해 겨울 내내 산에서 땔나무를 하던 일이 제게는 잊히지 않는 기억입니다. 그전에도 아버지와는 나무하러 많이 다녔지만, 어머님과 나무했던 기억은 그해가 처음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힘들었지만 희망이 겁 없이 부풀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객지로 떠나보내야 하는 자식의 앞날에 희망을 걸고 추위와 힘든 일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때를 생각하면 제가 좀 더 열심히 공부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항상 송구함을 떨치지 못하고 가슴에 품고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굳이 용서를 바랄 일은 아닙니다.

용서보다는 제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겠습니다.

 

해가 거듭될수록 어머님께서는 병치레를 떨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관절염이 깊어져서 비뚤어져가는 손가락을 볼 때마다 제 가슴은 늘 짠합니다. 위장이나 대장 때문에 고생하시는 모습을 생각하면 잠을 설치기도 합니다. 이제는 허리 디스크 증상도 있으시다 하니 마음이 더 무겁습니다. 물론 나이를 드시면 자연스레 모든 병에 약하기 마련이지만, 자식의 입장에서는 마음이 영 편치 않습니다. 아플 때마다 병원에 자주 다니시라는 말씀 밖에 드리지 못하는 불효자입니다.

 

어머님.

저는 어머님에게 효도를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효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를뿐더러 효도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릅니다.

무심하고 못난 자식일 뿐입니다.

 

일단은 손자 손녀들 어느 정도 뒷바라지 하고 나면 제게도 조금의 여유가 생기겠지요. 그때는 좀 더 어머님 곁에 다가갈 수 있으리라 다짐해 봅니다.  저도 어머님보다는 제 자식에게 먼저 마음을 주고 손을 뻗는 그저 평범한 자식입니다. 

어머님께서는 이렇게 미운 짓만 하는 자식도 언제나 사랑스럽기만 하겠지요.

 

어머님.

이제는 일 욕심도 조금씩 줄여 가시기를 바랍니다. 일 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주저하지 마시고 편안하게 하세요. 혹시 목돈 쓸 일 있으면 숨기지 마시고 이야기하세요.

날씨가 많이 풀렸다 하지만 아직은 겨울인지라 몸조심하시고 식사 잘 챙겨 드세요.

다음에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어머님.

사랑합니다.

 

기축년(2009년) 정월, 큰 아들

 

2024년 추석을 앞두고 지난날의 어머님을 떠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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