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隨筆, 散文

[ 時論]건국전쟁

by 桃溪도계 2024.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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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80년이 다 되어가지만 우리나라 건국의 역사는 그 당위성이 부정되고 있다. 누구에 의해서, 누구를 위하여 역사는 부정되고 있는 것일까. 
 
2024년 2월에 이승만 대통령의 왜곡된 업적을 바로 잡으려는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이 개봉되었다. 김덕영 감독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독립운동과 정부수립 과정, 정부수립 후 6.25 전쟁 수습과 자유민주주의 정착을 위한 그의 여정을 담담히 그려내고 있다.
 
그동안 중고등학교 역사책에서 단편적으로 다뤘으나 우리는 건국의 역사를 심도 있게 알지 못한다. 물론, 이 영화의 내용을 진실이라고 규정짓기에는 아직 공부가 모자란다. 다만, 우리가 알고 있던 역사 인식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건국의 역사가 부정적인 측면에서 인식되고 폄훼되고 있는 점에 대하여 증언과 사료를 제시하며 옳지 않았던 점에 대하여 꼬집는다.
 
[이승만의 독립운동]
이승만은 1875년 황해도에서 태어났으며, 1890년대 말 고종의 만민공동회 무력진압 과정에서 고종 퇴위를 주장하다가 사형을 선고받고 5년 7개월간 복역하던 중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특별사면 되었다. 그 인연으로 1905년 도미하여 1907년 조지워싱턴 대학 학사학위, 1910년 하버드대학 석사학위, 1910년 프리스턴대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독립을 호소하였으며, 얄타 포츠담 카이로 회담에서 코리아를 적절한 시기에 독립하여야 한다는 문구를 삽입토록 했다. 1919년 초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하였으며, 해방되기 전까지 주로 하와이에서 외교 활동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하였으므로 그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초대 내각]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에 여론은 첨예하게 대립되었다. 남한 만이라도 자체적인 정부를 수립하려는 여론과 통일 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여론이 그것이다. 당시 이승만은 북한의 김일성과 소련의 스탈린의 음모를 간파하고 도저히 통일 정부 수립은 불가능함을 인지하였다. 이미 김일성은 스탈린의 지원하에  실질적으로  북조선 인민 공화국을 수립한 상태였다. 이승만은 남한 단독으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탄생시켜야 한다는 신념으로 선거를 실시하여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당시 김구는 통일 정부 수립을 주장하였으며, 북한에 두 번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나고 군대 사열을 받았다. 북한이 소련제 무기로 중무장하였으며, 경제력은 남한의 40배에 달하므로 절대로 남한은 북한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즉, 북한이 곧 무력으로 남침하여 통일하게 될 것을 직감하였으나, 북한은 무력침략할 의지가 없다고 인터뷰했다. 김구는 김일성의 통일 대통령 제안에 이용당했다고 추측되는 부분이다. 김구는 한국을 방문한 중화민국 장제스 총통의 밀명을 받은 유어만 공사와의 비밀회담에서 어차피 남한은 북한에 의해 통일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에 유어만 공사가 김구에게 이승만 정부 내각 참여를 추천하였으나 참여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김구는 북한의 남침을 기다렸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결과적으로 그동안 우리가 배워 알고 있던 김구는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지만 김구의 독립운동을 폄훼하거나 비판할 생각은 없다.
 
대한민국 초대 내각은 이시영 부통령(임시정부 내무총장)을 비롯하여 17명 전원이 100% 독립운동 경력이 있는 인사들로 구성하였다. 반면에 북한의 김일성 초대 내각은 김영주 부주석(일제강점기 헌병 보조원)을 비롯하여 16명 거의 다 일제강점기 관료나 군부 출신으로 구성하였다. 그동안 우리는 이승만 정부의 초대 내각은 친일파 일색이었고, 북한의 김일성은 독립운동 경력이 있는 사람들로 초대 내각을 구성하여 친일파를 일소하였다고 선전하였으며, 북한이 대한민국보다 국가 정체성이 선명하다고 선동하였는데도 별다른 반론을 펴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매도되어 왔다.
 
[농지개혁]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 중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1950년에 실시한 농지개혁이다. 이 농지개혁을 통하여 70% 이상의 소작농이 자작농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농지개혁의 결과 땅이 생긴 농민들이 6.25 전쟁 때에도 북한 공산당의 선동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만약 북한의 토지 무상 제공이라는 선동에 휘둘렸다면 아마 6.25 전쟁은 참패로 끝났을 것이다. 농지개혁에 대하여 이승만 정부에서 무작위로 몰수했다는 비판이 있었는데 사실이 아니다. 이승만 정부는 지주에게서 땅을 유상으로 매입하였으며, 소작농에게도 장기 상환을 조건으로 유상으로 배분하였다. 전쟁 후에 국가 재건 과정에서도 농지개혁은 우리나라 산업 발전의 초석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북한의 토지 몰수 정책과는 대비되는 자유민주주의 건설의 토대가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6.25 전쟁]
김구는 이승만 정부 내각에 참여하지 않고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였다. 실제로 주한미군은 1949년 철수하였으며 이는 북한의 노림수였다. 주한미군 철수 후 전력의 공백이 생기자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기습 남침을 감행하였다. 그동안 한강대교 폭파 사건에 대하여 이승만 대통령이 민간인 피해를 무시하고 한강대교를 폭파하고 도망갔다고 알려졌다. 이에 대한  진실은 이승만 대통령이 북한의 탱크부대 남하를 저지하기 위하여 한강대교 폭파를 계획하였다. 이를 실행하기 전에 인도용 부교를 설치하고 폭파 준비를 하였으며, 폭파 임박해서는 한강대교와 인도용 부교를 건너지 못하게 경찰이 민간인을 통제하였다. 그 결과 경찰의 인명 피해가 다수 발생하였으나, 민간인 피해는 거의 없었다. 그동안 한강대교 폭파 사진이라고 민간인이 폭파된 철교를 건너는 장면이 사진으로 알려졌었는데, 이 사진은 미국 종군기자 맥스 데스퍼가 찍어서 퓰리처 상을 받은 대동강 철교 폭파 사진임이 밝혀졌다. 
 
[한미수호 방위조약]
6.25 전쟁이 끝나고 이승만 대통령 입장에서는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를 안전하게 정착시키기 위해서 가장 역점을 둔 부분은 굳건한 안보였다. 그 방편으로 한미수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당시 미국 정부의 관료들은 대부분 한미수호방위조약을 반대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외교력을 발휘하여 이를 관철했다. 한미수호방위조약이야 말로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 가운데 농지개혁과 함께 가장 위대한 치적으로 꼽힌다. 한미수호방위조약 체결은 향후 튼튼한 안보를 기반으로 대한민국의 산업 발전과 민주화를 이루는데 초석이 되었다. 이를 두고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미 제국주의의 식민지를 공고화 하는 일이라며 폄훼하는가 하면, 이승만 대통령을 미국의 프락치로 매도하기도 했다.
 
[3.15 부정선거와 4.19의 진실]
1960년 자유당 이승만 후보와 민주당 조병옥 후보가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였는데, 조병옥 후보가  갑자기 신병이 발병하여 미국에서 수술도중 사망하였다. 이승만은 단일 후보가 되어 자동 당선되는 환경이어서 굳이 부정투표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당시 자유당 부통령 후보였던 이기붕이 부정선거를 기획하였으며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 이 사건을 빌미로 4.19 사태까지 일어났다.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 4.19 운동에 가담했다가 서울대학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던 학생을 병문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기붕의 3.15 부정선거로 촉발된 4.19 사태의 폭발성이 워낙 커서 더 이상 대통령직을 고수하지 못하고 이기붕의 부정선거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하야 하였다. 
 
'건국전쟁'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감상하기 위하여 10년에 한 번 갈까 말까 하는 극장에 갔었다. 사실 다큐멘터리 영화는 영화라기보다는 영상물이다. 영화를 보던 중에 속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이승만'이라는 이름은 사실상 금기어였다. 어떤 세력에 의해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자연스럽게 진행되어 왔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고 싶어 하는 세력 중에 북한이 있다. 그들의 목적은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함으로써 조선인민민주주의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남한을 공산당으로 편입하는데 장애물을 제거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남산과 탑골 공원에 있던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없애버린 세력들이 있다. 그들은  왜 정당한 건국의 역사를 부정하려는 것일까. 걔 중에는 명망 있는 역사 학자들도 있다. 그들은 누구인가. 이제 그 음흉한 간괴로 왜곡하고 숨겨왔던 역사의 진실이 하나씩 밝혀지고 있다.

영화가 끝나고 박수를 쳤다. 함께한 사람들이 따라서 박수를 쳤다. 사람들이 다 나갈 때까지 한참을 앉아 있었다. 가슴에 묵직한 무언가가 울컥하게 미어졌다. 가벼운 재미가 있는 영화는 아니지만 뒤틀어진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사명감을 무한히 응원하게 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영국의 처칠, 프랑스의 드골보다 더 위대한 당대 최고의 외교관이었으며 전략가였다. 물론 잘못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범인들이 범접할 수 없는 진성 애국자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된 후 자유민주 국가 건국과 북한의 남침을 견뎌내는 역사의 질곡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임은 자명하다고 확신한다.

영화관을 나오는 나의 가슴이 웅장해졌다.
대한민국 현대 역사의 접점에 있는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꼭 한 번 시청하기를 강력 추천한다. 
 
FREEDOM FIGHT 이승만!
당신을 존경합니다.
 

한강대교 폭파로 인하여 인명피해가 많았다고 왜곡 선동된 사진. 이 사진의 진실은 미국 종군기자 맥스 데스프가 찍어 퓰리처상을 받은 대동강 철교 폭파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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