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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山 行

지리산 종주(17)

by 桃溪도계 2023.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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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아름다움이다.
단풍 마중 갔다가 생각지도 못한  겨울 산호초를 만났다.  상고대를 만날 수 있으려나 기대하면서 겨울 산을 뒤질 때에도 시절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만나기가 쉽지 않다. 뜻밖의 행운이 있어 가을산에 들렀다가 상고대를 만나는 기분은 별유천지다.  지리산은 또 다른 아름다움을 위해 가을을 열심히 밀어내고 있었다.

산에 닿으면 스트레스로 가득 찼던 가슴이 비워지면서 그 빈자리에 산향기로 가득 채워진다. 산을 외면할 수 없는 이유다. 행여 견딜만하거든 지리산에 오지 말라했건만, 세상살이에서 견딜만한 사람이 어디 있으랴. 역설적이게도 지리산을 꼭 오라는 당부일 것이다. 나는 내 삶에 여유가 생길 때마다 산에 오르는 게 아니라, 산에 올라서  여유를 찾는다.

지리산을 처음 오르며 가슴 벅찼던 일을 떠올리며 별이 총총하게 박힌 노고단에 올라서면 설레었던 호흡이 차분하게 제 자리를 찾는다. 적당한 긴장감으로 차분하게 산행하리라 매번 다짐하지만, 허겁지겁 분간 없이 산행하는 습관이 쉬 정제되지 않는다. 장거리 산행일수록 좀 더 느긋한 마음으로 진행해야 하는데, 반대로 조급하게 서두는 악습이 있다.

연하천에서 지리의 일출을 만나 호흡을 고르고 벽소령 대피소에 이르러 지나온 길을 살피고 나아갈 길을 가늠하는데, 천왕봉 정수리에 상고대가 피었다. 갈 길이 멀지만 만나보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시간이 지날수록 해가 높아지고 상고대가 옅어지니 마음은 초조해진다. 촛대봉에 이르렀을 때쯤에는 포기해야겠다고 마음을 정리했다. 장터목 대피소에 도착하니 먹구름이 몰려오고 한 치 앞을 분간하기 힘들 만큼 바람이 거세다. 천왕봉에는 한기가 만만찮을 것 같아 무장을 하고 오른다.

제석봉에 오르자 구름이 바람에 떠밀려 가면서 나뭇가지에 하얗게 흔적을 남긴다. 바람이 거셀수록 산호초 군락이 더 넓어진다. 천왕봉 오르는 길에는 계절이 바뀌었다. 가을 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겨울을 만났으니 행운이다. 산정에서 두 계절을 만나니 신선이 된 느낌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를 들여다본 기분은 가슴 벅찬 자랑이다. 천왕봉에는 바람이 많아 체감온도가 낮지만 인정숏을 남기려 줄을 선 사람들은 긴 줄에도 동요 없이 꿋꿋하게 기다린다.

천왕봉 정상석과 포옹도 못한 채 뒤돌아 내려오는 길. 오늘의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가늠해 본다. 가을인가. 겨울인가. 가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닌 그 어디쯤. 어디에 서 있든지 똑바로 서 있을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채근하지 말자. 있는 그대로를 순하게 받아들이자.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길은 아름다움이다.

[산행 일시] 2023년 10월 21일
[산행 경로] 성삼재 - 노고단 - 연하천 대피소 - 세석 대피소 - 장터목 대피소 - 천왕봉 - 중산리(32.5km)
[산행 시간] 11시간 10분


 

 

벽소령 대피소
세석 대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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