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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 行

지리산(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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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지리산.
장쾌한 산맥의 설렘을 느껴본지가 얼마만인가. 족히 오 년은 된 듯하다.
처음 산을 다녀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도 지리산을 오르기 위함이었다. 그로부터 십 수년을 연례행사처럼 종주 길을 다녔었는데, 시절 따라 마음이 흔들리고 방황이 길어져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다시 뵙는구나. 산은 변함없이 눈도 꿈쩍 않고 덤덤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때로는 꺾이기도 하겠지만 흔들림 없이 자라고 있는 나무와 철 따라 피고 지며 향기를 내놓는 꽃들을 만나니 더욱 반갑다. 제 철을 만난 산새들은 쉼 없이 재잘대며 텃세를 부린다.

지리산의 새벽 공기는 콧속을 뻥 뚫고 가슴으로 훅 들어오는 신선함이 세파에 찌든 갈증을 씻어준다. 노고단에 올라 새벽 별빛을 따라 지리의 능선을 쉼 없이 앞만 보고 걷는다. 보이지 않으니 번뇌도 없다. 아주 보지 못한다면 더 많은 번뇌로 세상을 탓할 수도 있었겠지만 별 빛이 그려주는 산 길을 따라 걷는 마음은 자애롭다.

삼도봉에 도착할 무렵 여명이 열리고 해가 돋는다. 산 그리매가 흐릿하게 보이고 그다지 맑지 않은 뿌연 하늘을 향해 한 두 톨 불만을 던진다. 새벽과 아침 사이 잠깐의 간극에 인간의 마음은 간사한 욕망에 따라 채색을 달리한다. 무채색이었을 때에는 욕망도 단순하여 절제가 쉬운데, 유채색의 캔버스에는 간섭이 늘어난다.

욕망은 쉽게 채워지지도 않을뿐더러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은 진리의 범주다. 마치 깨진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것과 같아서 욕망의 본성은 끝없는 공허함과 갈증을 느끼게 한다. 그렇지만 어차피 채우지 못할 욕망인 줄 알면서도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다면 가뭄에 말라비틀어져버린 꽃잎처럼 씨앗을 맺을 수 없는 영혼이 될 것이다. 산에 오르는 궁극의 목적이 행복이었다면 작은 마음으로 세상을 담자.

장터목을 지나 천왕봉을 오르는 길은 언제나 힘들다. 잠을 설쳐 산문을 연 새벽부터 25km 정도 걸었으니 피곤이 쌓이고 지루한 산행 길에 마음도 지쳐간다. 지나 온 길이 험하고 고달플지라도 원망을 말자. 앞으로 남은 길 또한 힘들겠지만 좌절은 말자. 인생 길이 본디 그런 것이었거늘 달리 편함을 구하지 말자. 지금 이 순간 두 발로 이 길을 걸을 수 있으니 행복임을 새기자.

천왕봉에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댄다. 산에 오른 사람들 모두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러 왔으리라. 정작 산을 내려갈 때에는 지나친 욕망은 부질없음을 알게 될 것이지만, 그것을 깨닫는 순간 또 다른 욕망으로 갈증을 느끼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서 지울 수 없는 암각화 같은 것일 것이다. 산에 올라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바라기보다는 좀 더 겸손하게 자신을 살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중산리로 하산하는 길은 여전히 지루하고 힘들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내리막 길을 내려오면서 왜 이 길을 걷고 있는지 잠깐의 후회를 섞어가며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반드시 길이 끝날 것이라는 믿음을 새기며 힘을 낸다. 하지만 그 길이 끝나는 지점이 또 다른 길의 시작임을 알면서도 일단은 쉬고 싶다.

나의 산은 길에서 시작하고 길에서 맺는다.


[산행 일시] 2022년 6월 4일
[산행 경로] 성삼재 - 노고단 - 연하천 - 벽소령 - 세석 - 장터목 - 천왕봉 - 중산리(33km)
[산행 시간] 13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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