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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桃溪遊錄

아버님 전 상서

by 桃溪도계 2022.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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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말없이 흘러 이십오 년이 되었습니다.
대구 경북대학병원에서 산소호흡기에 의존해 앰뷸런스를 타고 밤길을 재촉하던 때, 며칠 묵으러 집에 들렀던 외할머니께서는 급한 통기를 받고 사위의 죽음을 마주할 수 없어서 황급히 집을 떠나 쫓기듯 친척집으로 옮기던 날 세상이 참 혼란스러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집에 도착하셔서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한 시간 정도 지났을 즈음 고개를 떨구셨습니다.
 
평생을 별러 지은 대궐 같은 집 안방 병풍 뒤에 아버지를 모시고 빈소를 차려 상주 복장으로 하객을 맞으려 서 있는데 앞뒤 분간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상례 절차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저 슬픈 마음만 조아리고 있는데 작은아버지와 당숙부님을 비롯해 집안 어른들께서 상례를 의논하고 부고를 작성하는 등 정신을 바짝 차린 시간은 바삐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전화 연락이 닿지 않는 먼 친척에게는 이튿날 아침에 직접 인편을 보내고 집안 아지매와 형수님들은 우리 집으로 모여들어 각자 맡을 일을 분담하여 시장을 보고 음식을 장만하는 등 손님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이튿날 낮에는 마음만 바빴지 일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오후부터는 차츰 구색이 갖춰지고 음식도 어느 정도 준비되었습니다. 저녁부터는 대문 밖에 조화가 늘어서고 손님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장자인 저의 손님은 주로 서울에서 먼 길을 내려오고, 동생들 손님은 가까운 대구에서 오는데 인원이 너무 많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당에 천막 비닐을 깔고 재실에 있는 재기와 상을 몽땅 가져와 상을 펴고 손님을 맞았습니다. 마침 딸기 수확철이라 싱싱한 딸기를 양껏 내놓으니 손님들께서 흡족해하는 것 같아 다행이었습니다. 특히 멀리서 오신 손님들께서 굽이굽이 깜깜한 시골길을 물어 어렵게 찾아왔는데 두어 시간 앉았다가 다시 밤길을 재촉해 돌아가는 길이 마음에 쓰여 이십오 년이 지난 지금에 생각해도 편치 않은 송구 함입니다.
 
미처 장지를 마련하지 못한 터라 상례를 치르면서도 안정되지 못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어머님께서 일러주시기를 아랫동네 아재(영길)께서 평소에 아버지한테 '현 형! 나중에 죽게 되면 자기 산소 주변에 묏자리 하나 줄 테니 죽어서 떨어져 있지 말고 함께 영생하세나' 라며 하시던 말씀을 떠올리셔서 당숙부님께 묏자리 청을 당부했습니다. 늦은 밤에 당숙부님께서 허락을 받아오셨는데 가슴이 덜컹 내려앉고 쌓였던 피곤이 싹 사라져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그제야 나는 처음으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이왕 터진 거 마음 놓고 울었습니다.
 
지관을 불러 묘터를 잡고, 포클레인으로 산 길을 내어 준비작업을 진행하는 시간들이 어떻게 지나가는 줄도 모르게 후딱 지나갔습니다. 상여가 나가는 날 여섯 살배기 맏손주 동훈이가 영정사진을 들고 정든 집을 떠나는데 저는 울음도 나지 않고 울 줄도 몰랐습니다. 당신께서는 상여를 붙들고 땅이 꺼져라 울며 슬픔을 달래 줄 딸자식이 없으니까 상여 떠나는 자리가 왠지 허전하게 느껴졌습니다. 아버님의 상례 이후 지금까지 집에 빈소를 차리고 예를 올리는 재래식 조문을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상례를 마치고 난 뒤에도 산소에는 뒷 일이 많았습니다. 앞에는 석축을 쌓고 뒤로는 물길을 내어 땅을 고르고 잔디를 심었습니다. 몇 날 며칠 영후가 그 많은 일들을 묵묵히 해내었습니다. 어머님께서도 석축 쌓는 인부들 새참이며 식사를 준비해서 머리에 이고 하루에 두 세 번씩 산 길을 드나들며 힘든 줄도 모르고 마무리했습니다. 그 후에도 영후는 종종 경운기에 물을 싣고 잔디를 살리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 덕분에 잔디가 새파랗게 잘 살아나 아버지께서도 좋으셨지요. 
 
세월이 이만큼 흘러 이제는 아버지 산소를 예전만큼 자주 뵙지도 못합니다. 많이 게을러진 탓이지만 제가 살아생전에는 꼭 마음먹고 양심껏 관리하겠습니다. 엊그제 아버님 제사 때 산소에 들렀더니 제비꽃이 마냥 피어있고 석축 앞에 심었던 철쭉들이 보송보송한 꽃봉오리를 달고 산소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산소를 내려오며 흥얼거렸습니다. ' 울 아버지 산소에 제비꽃이 피었다. 양지꽃도 수줍어 샛노랗게 웃는다. 그저 피는 꽃들이 예쁘기는 하여도 자주 오지 못하는 날 꾸짖는 것만 같다'
 
아버님!
당신의 바람대로 손주들은 모두 자기 직분에 충실하며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 다음 달 오월에는 맏손주 동훈이가 장가를 듭니다.
대사를 치르며 허둥대기는 하여도 진심을 담아 곱게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 아버님께서 계신다면 얼마나 든든하고 자랑스럽겠습니까.
다음에는 새 며느리와 함께 인사드리러 오겠습니다.
국화 한 다발 안고 행복한 마음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아버지도 기뻐지요..
 
[일    시] 2022년 4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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