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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 行

삼각산 성도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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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과 등산]

억새에 이는 바람 속에 아직 다정함이 남아 있을 때 우리는 그를 맞으러 나서야 한다.
마라톤을 잠시 접어놓고 북한산 가을의 허리춤을 다투 잡고 따라나선 길에는 발자국마다 따뜻한 온기로 가득하다.

마라톤으로 맺은 인연이 벌써 15년도 넘은 시간이다.
오랜 세월 동안 무탈하게 마라톤의 끈을 놓치 않고 큰 부상 없이 이어온 것은 행운이다.
그동안 무수한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면서 서로를 응원하고 기운을 북돋워주어서 똑바로 걸을 수 있는 에너지를 얻은 것은 내 삶의 보너스다.

탕춘대 능선에 올라서서 콩알만 한 크기의 문수봉을 바라보면서 '들판에서 일할 때는 들판의 끝을 바라보지 말라'는 프랑스 속담을 떠올린다. 갈 길이 먼 들판의 끝을 바라보게 되면 기운이 빠져서 일하기 싫어짐을 경계하는 말인데, 문수봉이 멀어 보여도 한 발 한 발 가다 보면 어느새 닿을 수 있다는 긍정을 꾹꾹 밟으며 산행을 이어간다.

마라톤을 함께하는 사람들은 모두 마라톤 친구다.
아버지뻘 되시는 김 사장님은 친구로 지내기에는 다소 부담이 될 수도 있지만 달리기에 대한 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오히려 젊은 내가 부끄럽다. 평소에는 세심하시고 용의주도한 면이 있어서 절대 실수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성격이지만 목표에 대한 열정과 철저한 자기 관리와 겸손한 삶의 자세가 훌륭한 배움이다.

큰 형님뻘 되시는 구사장님은 내가 가끔은 버릇없이 말을 툭툭 내뱉어 거슬릴 텐데도 내색을 않고 꾹 삼켜내신다. 마라톤을 하면서 자신을 컨트롤하는 내공이 많이 쌓인 것인지, 아니면 태생부터 인품이 그러신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배우고 익혀야 할 지혜다. 또한 자신의 울타리를 쌓아놓고 옆 길에는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성실하고 꾸준하게 끝까지 버텨내는 인내심을 꼭 배우고 싶다. 그리고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생활습관은 정말 모범이 된다. 가끔은 제가 객기를 부리며 핀잔을 섞기도 하지만 내 속마음은 부러워하는 것이다.

마라톤은 출발할 때 짤막하게 '파이팅' 하고 나면 끝나고 나서 지나온 여정의 힘듦을 서로 위로하고 막걸리 한 잔에 여독을 풀어내는 과정인데 반하여 등산은 산행 내내 서로 의견을 구하고 자잘하게 대담을 이어갈 수 있으며,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면 막걸리 한 잔을 풀어 땀을 식혀갈 수 있어서 좋다. 또한 힘든 구간에서는 서로의 손을 잡아끌어주고 밀어주며 행복한 에너지를 나눌 수 있어서 좋다.

탕춘대 능선에서 비봉 능선에 오를 때까지는 앞 길이 멀어 보이기만 하지만 비봉 능선에 올라서니 시야가 터이고 지나온 길이 대견스러워 보여 없던 힘도 솟는다. 비봉능선을 소담 소담 걸어 문수봉 길목에서 안전한 길을 택할 것인가 다소 난이도 있는 길을 택할 것인가 선택하여야 한다. 우리는 힘들지만 성취감이 남다른 난이도 있는 길을 선택해서 문수봉 정상에 오르니 세상 부러울 게 없다. 이 순간 내가, 아니 우리가 승자다.

하산 길은 의상능선이다. 삼각산 산행 코스 중에 나름 브랜드 있는 코스다. 어려운 코스를 선택한 사람들을 마주하며 그들에게서 힘든 모습보다는 의기에 찬 모습을 보면서 서로가 기운을 주고받는다. 산이 주는 또 다른 매력일 것이다. 북한산성입구 날머리를 통과하면서 지나온 길을 되짚어 본다.

눈앞의 목표나 성공에 집착하지는 않았는지.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하지는 않았는지.
언제나 다정함이 있는 산문을 나서며 나는 또 하나의 교훈을 되새긴다.
산은 엄하지만 부드럽고, 편하지만 만만하지는 않다.

[산행 일시] 2021년 10월 24일
[산행 경로] 불광역 - 장미공원 - 탕춘대 능선 - 비봉능선 - 문수봉 - 의상능선(나월봉, 나한봉, 증취봉, 용혈봉, 용출봉,
의상봉) - 북한산성입구 (12km)
[산행 시간] 6시간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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