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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 行

백령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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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의 경계]

 

공군부대에 보수공사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백령도 들어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안개가 많아 배가 예정대로 뜨니 마니 말이 많았지만 다행히 입도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 섬에 닿자마자 점심을 간단히 해결하고는 여장도 풀지 않은 채 현장으로 들어갔다. 레이다 기지였던 현장은 산 꼭대기에 위치해 있는데도 안개가 자욱해 주변이 온통 먹먹했다.

 

남은 오후 시간을 짜임새 있게 이용하려 일을 시작했는데 예상치 못한 일들이 생겨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다. 부대에 작업시간이 지체되어 마무리가 좀 늦을 수 있음을 양해를 구하고 일을 하고 있었는데, 오후 5시 일과 시간을 넘기면서부터는 감독 군인이 수시로 끝나는 시간을 체크했다. 레미탈 혼합을 하던 김 씨를 비롯하여 참석 인원 전원이 시간에 쫓기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 바삐 움직이던 시간.

 

오후 6시 50분경 콘크리트 거푸집에 문제가 생겨 레미탈 혼합을 하던 김 씨는 잠깐 쉴 틈이 생겼다. 다시 일을 시작하려 레미탈 혼합 비율을 상의하던 김 씨가 갑자기 뒤로 맥없이 쓰러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경황이 없는데 김 씨는 이내 사지가 뒤틀리고 호흡이 온전치 않음을 직감했다. 응겹결에 심폐소생술을 하는데 간간히 신음소리만 낼뿐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긴급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신속하게 부대와 119에 신고하고 번갈아가며 흉부압박과 인공호흡을 하며 진땀을 빼고 있는데, 김 씨는 호흡을 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기도가 트이지 않아 고통스러워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세포의 간극이 조금씩 느슨해지는 느낌이 든다. 얼굴빛은 창백해지고 눈자위가 초점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십 분은 족히 지났을 즈음 부대 의무대 구급차가 와서 김 씨를 싣고 떠났다.

 

우리는 초조한 시간을 버티며 견뎌야 했다. 구급차가 떠난 지 5분 정도 지나서 부대 수사 관계자분들이 들이닥쳐 폴리스 라인을 치고 사진을 찍고는 우리들에게 사건의 자초지종을 캐묻는다. 오후 8시 10분경 백령병원으로부터 김 씨가 사망했다는 정보가 타전된다. 허탈감을 감출 수 없었다. 사람의 생명이 이렇게 간단하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어찌 이럴 수 있는가. 곧바로 백령파출소 경찰들이 현장을 방문하여 기본조사를 비롯한 초등수사 단계 매뉴얼을 진행했다. 초등수사를 마친 우리는 경찰과 함께 현장을 빠져나와 백령파출소에서 새벽 3시까지 목격자 진술과 조서를 꾸몄다.

 

새벽 3시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소주 한 병을 병째로 들이켰다. 처음에는 맹물 같았는데 시간이 좀 지나니 취기가 오른다. 적잖은 충격을 재우지 못하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김 씨는 62년생 범띠였으며 아내와 슬하에 딸 한 명 있다고 한다. 또래 나이의 사람이 갑자기 분홍빛 해당화가 지천으로 피어있는 백령도의 짙은 안갯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점심 먹을 때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농담도 했는데 이제는 마주 대할 수도 없는 두꺼운 간극이 생긴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백지 한 장의 두께도 아닌데 영원히 그를 볼 수 없다니 믿기지 않는다. 불현듯 인간은 왜 태어나고 왜 죽는지를 담담히 자문해본다. 살아 있다는 행위는 순간일 뿐이다. 순간과 순간을 슬기롭게 이어가면 살아있는 것이고 이 순간이 무너지면 죽음이다. 순간과 순간을 슬기롭게 이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열심히 호흡하고 명상하여야 한다. 삶과 죽음은 다르지 않다. 굳이 다르다는 정의를 억지로 내세울 필요도 없다.

 

살아 있음은 죽음의 전주곡이고, 죽음은 살아있음의 후속곡이다.

그냥 무생물처럼 존재하는 듯 그러지 않은 듯 개의치 말자.

자연은 늘 그러하다.

 

[일시] 2021년 6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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