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日抒情
새삼 두근거린다.
오랫동안 비워두었던 교정에 들어서는 것도 설레는 일이지만,
오랜 친구들을 만난다는 설렘은 뭐라 말할 수 없는 기쁨이다.
너무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어서 그럴까.
손을 쭈욱 내밀어도 손가락이 오므린다.
그렇지만 서먹한 기운을 풀어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는 않다.
35년 전에
콘크리트 비벼서 건물을 지을 때,
마냥 신기하게만 여겨졌던 교사는 아직 늠름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진홍색 가을이 스며드는 운동장 가장자리에는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나무는 흔적을 감추고
그 자리에 느티나무들이 들어서서 교정의 향기를 추스른다.
가을이 마음껏 익어가는 교정에는
하나 둘 친구들이 모여들고
노란 이파리들은 설겅설겅 부는 바람을 핑계 삼아
오랜 삶의 궤적들을 늘어놓는다.
큰길을 별 애로 없이 마음껏 달려온 친구들이나,
꼬불꼬불 산길을 걸오 온 친구들이나,
강을 건너면서 고무신에 물을 잔뜩 담고서 질겅질겅 걸어온 친구나 할거 없이
하나의 나뭇잎일 뿐 색깔의 명암을 다투지 않는다.
손을 맞잡아보고, 안아보고,
깔깔깔 웃어보아도 성에 차지 않는다.
진한 그리움도 아니고 들뜬 기쁨도 아니다.
지금은 빛바랜 꿈이었지만,
한 때는 같은 꿈을 담았던 가슴들이다.
오늘 다시 마음껏 웃으며 행복한 꿈들을 기억하자.
마셔라. 부어라.
혀가 꼬부라지는 마디마다 흥이 맺힌다.
각자가 살아온 삶을 막 쏟아놓고 비벼본다.
그동안 맛보지 못했던 별미다.
제각각의 양념을 넣고서 비비면 입맛을 돋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그렇다.
내가 살아가는 삶에서 가끔은 식상하고 향기가 시들해지거든
그때마다 이렇게 비벼보자.
거기서 기운을 찾고 향기를 찾자.
가을이 머물렀다가 뒷걸음질 치는 자리에
까치밥으로 남겨두었던 홍시 서너 개.
오늘은 넋을 잃고 우리들을 시샘한다.
홍시야!
침만 흘리지 말게나.
네가 흘리는 침 속에 단물까지 쭉 빠져버리면
까치도 너를 거두지 않을 테야.
오늘 일은 너와 나만의 비밀로 약속하마.
아직 다리가 번쩍번쩍 올라가는 걸 보니
우리 자주 만나도 흔들리지는 않을 거야.
힘들면 서로 맞들어 격려하고
기쁘면 길길이 뛰면서 웃어보자꾸나.
내 배꼽이 먼저 빠지든지.
네 배꼽이 먼저 빠지든지.
그게 뭔 대수랴.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새로 들여왔던 농구대가 아직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큰 괴물 같은 농구대를 옮기려고 고사리 같은 손들을 모으면
움직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농구대가 잠시 방심하는 순간
우리는 함성을 지르며 굴렸던 기억이 가슴에 맺힌다.
우리를 마음껏 기쁘게 해 주었던 농구대였는데,
지금은 푹 고꾸라진 모습이 안쓰럽다.
학생도 많이 줄었는지 교정은 한산하고 농구대에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한 길이나 될 것 같았던 작은 연못이 이제는 간장종지 만하게 느껴진다.
그나마 물도 바싹 말라버려서 연못이었다는 느낌마저 쇠잔하다.
6학년 4반 교사 옆에서 항상 우리의 꿈을 담았던 연못이 지쳐가는 만큼
나도 많이 살았나 보다.
내 가슴에도 이제는 풍부한 아량보다도 메마른 긴장이 더 많이 차지해 버렸다.
언제, 짬나거든 물을 조금이라도 담아주렴..
그때 내가 너를 찾으마.
그래서 내 가슴에 메말라가는 인정을 게워내어 촉촉하게 적셔보고 싶다.
샛 노란 국화도 빛을 잃어가는 계절에
우리는 향기를 찾으러 이렇게 만났다.
더없이 행복했고
더 많이 즐거웠다.
가을날의 하루를 이렇게만 기억하자.
친구들아!
세상일에 치여도 슬퍼하지 말자.
행여 그런 일이 있거든
그때 만나서 마음껏 웃어보자.
다음에 또 만날 약속만을 가슴에 채워도 행복해지는 이유를 알겠다.
* 일 시 : 2009년 11월 8일
* 장 소 : 이서초등학교 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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