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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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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암살의 배경

by 桃溪도계 2008.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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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암살의 배경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2분, 궁정동(宮井洞)의 밀실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 박정희(朴正熙)를 암살하였다. 우발적인 측면도 있었으나 한국 현대사에 큰 의미를 지니는 궁정동의 총성이 울리기까지의 전개과정은 매우 복잡하다.

   박 정권 18년간은 거의 전 기간을 통해 미국과 갈등관계였다. 박정희 씨는 미국을 신뢰하지 않았다.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는 나라로 한국과의 안보약속을 충실히 지킬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1972년 10월 17일 유신 선포이후 한미 관계는 계속 충돌하였다. 박동선과 김한조 박사의 코리아 게이트, 한국의 인권 문제 등이 겉으로 드러난 문제였으나, 실제는 미사일과 핵무기 개발 문제였다.

   유신체제 자체가 적어도 명분상으로는 국제정세변화에 대한 대응과 안보를 위한 것이었다. 1969년 7월에 닉슨 미국 대통령이 “아시아인의 안보는 아시아인의 손으로”라는 선언이 핵심 내용인 괌(Guam) 독트린을 발표했을 때만 해도 박정희 씨는 반신반의했다. 당시 한국은 베트남전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5만여 명의 병력을 파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년 뒤인 1970년 7월, 윌리엄 로저스 미 국무장관은 사이공에서 개최된 베트남 참전국 회의에서 최규하 당시 외무부 장관에게 ‘주한미군 2만 명 철수’를 통고했다. 70년 8월에는 애그뉴 부통령이 방한, 박 대통령에게 직접 통보했고 대만으로 가는 비행기에서는 “5년 이내에 주한미군을 완전히 철수할 것”이라는 폭탄선언까지 했다.

   이에 한국정부는「先안보보장 後철군」을 미국정부에 강력히 요구했다. 결국 양국은「1개 사단 철수에 따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미국은 한국군 장비 현대화 5개년 계획(71~75년)에 매년 약 3억 달러의 무상 군사원조를 제공하기로」합의하였다. 

   예정대로 1971년 3월 주한 미 제 7사단 병력 2만 명이 철수했을 때, 박정희 정부는 자주국방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 대통령이 핵무기 개발 결심을 굳힌 것은 이때였다.

   1970년 8월 6일 국방과학연구소(ADD : Agency for Defense Development)가 설립되어 71년 겨울부터 무기 국산화에 착수하였다. 71년 11월 11일 ADD로 “총포탄약 등 재래식 경무기와 주요 군수장비를 4개월 내에 국산화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ADD 연구원들은 역설계 공법(reverse engineering)으로 국산화를 했다.  

   박대통령은 오원철 경제2 수석 비서관, 국방부장관, 상공부장관, 과학기술처장관, ADD소장 등으로 구성된 무기개발위원회(WEC)를 비밀리에 운영했다. 그러나 이들의 움직임은 미국 정보망에 잡혔다.

   1971년을 기점으로 박정권은 ‘한국군 장비현대화 5개년 계획’을 추진했고 이 계획이 끝난 1975년부터는 ‘국군 전력 증강 계획’을 추진했다.

   이보다 앞서 한국군 현대화 계획은 월남 파병이 본격화된 1966년에 미국의 약속에 의해 추진됐었다. 이른바 브라운 각서에 따라 미국은 파병의 선행조건으로 한국의 방위력 강화를 위한 지원을 다짐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지원 약속은 매우 소극적인 것이었다. 한국측의 요구에 마지못해 약속하는 형편이었고 이행도 지지부진했다.

   결국 핵무기 개발을 결정한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11월 청와대에 경제 2수석실을 신설했다. 이 부서는 방위 산업을 전담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서였으나 핵무기 개발에서 총괄 조정역도 맡았다. 박 대통령은 1972년 7월 20일 국방 대학원 졸업식에서 핵무기 개발을 암시했다.


   “우리나라는 우리 국민이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의연한 자세로 강력히 추진할 때, 그리고 미국이 도와주지 않더라도 우리는 끝내 해낼 수 있다는 능력을 보여줄 때 비로소 미국은 협조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주 국방입니다.”


   1973년 7월 3일 포항제철 준공식이 있었다. 1970년 4월에 기공하여 3년 3개월 만에 완공된 것이다. 선진국 전문가들이 불가능이라고 한 마당에 연산 1백3만 톤 생산능력의 제철 공장 건설은 당시 한국 형편으로는 기적에 가까운 것이었다.

   연구 인력 확보를 위해 미국의 감시를 피하면서 재미 한국인 과학자의 초빙을 추진하였다. 1973년 3월 주재양 박사가 원자력 연구소 제1부소장에 취임 핵무기 개발 전담부서를 맡았다. 주 박사는 최형섭 과학 기술처 장관(71년 6월~78년 12월 역임. 취임 즉시 원자력 개발 15년 계획을 수립함)이 직접 스카우트했다. 주재양 박사는 서울대 화학공학과 재학중 미국유학을 떠나 텍사스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MIT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핵연료 분야의 권위자였다. 주 박사는 1973년 5월 23일에서 7월 12일까지 핵과학자 유치를 위해 미국과 캐나다를 방문했다. 주 박사는 미 육군 연구소에서 일하던 김철 박사 등 10여 명의 과학자를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모두 100명 가량의 핵무기 제조 관련분야 과학자를 유치했다.

   한편 북한은 1974년에 핵공학자 경원하 박사를 유치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미국의 핵무기 산실인 로스 알라모스(Los Alamos) 연구소에서 직접 핵폭탄 제조에 참여했었다. 캐나다에서 대학 교수로 있다가 많은 기밀 자료를 갖고 북한에 들어가 핵무기 개발에 큰 기여를 했다.

   1973년 겨울 핵무기 개발 계획서가 박정희씨에게 보고되었다. 개발 비용은 15~20억 달러, 개발완료 예상기간은 6~10년으로 잡았다. 개발 예정의 핵폭탄은 20㏏의 위력을 가진 것으로플루토늄으로 제조할 생각이었다. 투하방식은 폭격기에서의 공중투하식이었다(1978년 미사일 개발로 미사일 탑재식으로 수정됨).


   핵무기 제조의 핵심은 순도가 100%에 가까운 플루토늄을 확보하는 것인데 이것은 원자로를 가동한 후에 타고 남은 핵연료를 재처리(reprocessing)해서 얻는다. 박정권은 핵연료의 재처리 시설과 관련 기술의 도입은 프랑스를 상대로 교섭했고, 연구용 원자로는 캐나다로부터 도입하려 했다. 별도로 벨기에와도 교섭했다.

   1972년 5월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이 프랑스를 방문, 프랑스와 오르톨리 산업기술부 장관으로부터 재처리 기술 등을 제공받기로 확답을 받았다. 프랑스는 미국이 주도하는 핵확산금지조약(NPT : Non-Proliferation Treaty)을 지키기보다는 재처리 기술과 시설을 판매해 얻는 경제적 이익에 관심이 있었다. 프랑스는 한국과의 사업을 최우선 국책사업으로 선정하기까지 했다. 72년 10월부터 한국의 원자력 연구소와 프랑스 원자력 위원회(CEA :

 Commissariat a l'energie atomique)간에 실무접촉이 활발해졌다. 그 결과 재처리 시설의 협력선으로는 CEA산하 용역 회사인 상고방(SGN) 社가, 핵연료 가공시설 협력선으로는 CERCA 社가 선정되었다. 1973년 10월에는 서울~파리간 직항로가 개설되었다.

1974년 11월 9일에서 12월 10일 까지 朱載陽 원자력 연구소 제 1부장, 尹錫昊 원자력 연구소 화공개발실장, 朴元玖 원자력 연구소 핵연료연구실장 3인이 프랑스를 방문․체류했다. 프랑스 정부는 이 과학자들에게 재처리 공장, 핵연료 가공 공장, 원자력 연구소 등 관련 시설들을 모두 보여 주었다. 이들은 상고방 社와 CERCA 社와 가계약을 체결했다. 본계약은 다음해에 체결되었다. 1975년 1월 15일 원자력 연구소는 프랑스의 CERCA社와 ‘핵연료 성형가공 연구시설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또한 1975년 4월 12일 원자력 연구소는 프랑스의 상고방社와 ‘재처리 연구시설 공급 및 기술용역 시설 도입 계약’을 체결했다. 상고방 社의 포앙세 사장이 한국을 방문해 尹容九 원자력연구소장과 원자력 병원 회의실에 숨어서 서명했다. 1975년에는 벨기에와도 ‘혼합 핵연료 가공 기술 도입 계약’이 맺어졌다.


   1973년 4월 존 그레이 캐나다 원자력 공사(AECL) 사장이 방한, 月城 1호기 원자력 발전소를 캐나다형 중수로(CANDU : Canadian Deuterium Uranium)로 할 경우 3만kw짜리 연구용 원자로(NRX)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했다. 미국이 발전시킨 輕水爐와 달리 캐나다의 重水爐는 농축이나 재변환 절차없이 천연 우라늄을 연료로 쓸 수 있었다. 고도의 제조 기술이 필요한 重水는 캐나다에서 수입하면 되고 더구나 캐나다에는 천연 우라늄이 풍부해 한국측에 유리했다. 한국 최초의 중수로 원자력 발전소인 월성 1호기 건설 계획이 1973년 11월 24일 확정되었다.

   원자력 발전소의 원자로는 핵연료를 오래 태우기 때문에 타고 남은 핵연료 속에 플루토늄이 너무 적게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연구용 원자로는 태우는 속도를 조절함으로써 순도 높은 타고 남은 핵연료를 얻을 수 있다. 이 무렵 印度는 이 NRX 원자로에서 추출한 플루토늄을 이용해 원자폭탄 개발이 한창이었다.

   주재양 박사가 대표로 나선 캐나다 측과의 협상은 원활히 진행되어, 1975년 중반에는 성사단계에 이르렀다. 연구용 원자로와 재처리 시설만 확보하면 핵폭탄의 원료인 플루토늄 생산은 시간 문제였다.

   그러나 1974년 5월 18일, 인도가 핵실험을 성공시켜 핵무기 보유국이 되자(참고로 말하면 1945년 미국 원자폭탄 개발, 1949년 소련 원폭 실험 성공, 1952년 영국 원폭 개발, 같은 해 미국 수소폭탄 개발, 1953년 소련 수소폭탄 개발, 1960년 프랑스 원폭 개발, 1964년 중국 원폭 개발, 1965년 이스라엘이 원자폭탄을 개발하였다), 상황이 일변했다. 인도는 캐나다로부터 수입한 NRX 실험로를 이용해, ‘사용 후 핵연료’를 확보한 다음 이를 재처리해서 플루토늄을 추출했었다(핵무기 개발의 대가는 컸다. 인도는 핵무기 개발에 국력을 많이 기울인 데다 세계적으로 경제 제재조치를 받아 경제난에 빠졌다. 결국 인도 국민회의 당은 77년 선거에서 대패하고 정권은 야당 연합에 넘어 갔다. 한 나라가 핵무기를 개발하려면 파키스탄의 알리 부토 수상이 ‘풀뿌리를 먹고 사는 한이 있어도 핵무기를 개발하겠다’라고 말한 것처럼 결연한 의지가 필수 조건이다).


   이에 충격 받은 미국은 정보채널을 총동원해 각국의 핵무기 개발 여부를 예의주시했다. 미국 정보당국은 핵무기 관련 자재에 대한 각국의 수입 자료를 면밀히 분석하기 시작했다.    미국 정부는 핵무기 개발과 관련된 많은 물자들이 남한으로 들어간 것을 곧 알아내었다. 1974년 11월 주한 미 대사관은 남한이 “핵개발 계획의 제1 단계를 추진하고 있는 중이다”  라고 본국에 타전했다.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은 주한 미국 대사관에 다음과 같은 전문을 타전하였다.


   남한의 전략적 위치를 볼 때 남한 정부의 핵무기 개발 노력이 이웃 나라, 특히 북한과 일본에 영향을 미칠 것이므로 미국은 심각하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남한의 핵무기 보유는 일본뿐만 아니라 소련과 중국을 포함해 동북아 지역 전체의 안정을 저해하는 중대한 요인이 될 것이다. 그것은 곧 전쟁이 일어날 경우 소련과 중국이 북한에 핵무기를 지원해 준다는 약속으로 이어질 수 있다…

대한민국의 핵무기 개발 추진은 남한 정부가 미국의 안보 공약을 불신하게 되었고 미국에 대한 군사적 자주성을 확보하려는 박 대통령의 염원을 반영하고 있다는 복잡성을 띄고 있다.        


   미국의 대응책은 “대한민국 정부의 핵무기 개발을 저지하고 핵 실험이나 핵무기 운반 체제 개발 능력을 최대한 억제하는 것” 이었다.

   미국 정부는 원자력 발전소 수출국들과 함께 ‘런던 클럽’을 결성, 핵기술 후진국에 대한 핵물질과 장비의 수출은 물론 재처리, 농축, 重水제조 등 민감한 기술의 국가간 이전을 엄격히 제한하는 핵 확산 금지조치를 강화해 나갔다.

   이와 함께 당시 핵무기 개발을 본격 추진하던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키스탄 등과 이들 국가에 핵기술을 제공하려던 프랑스, 서독 등에 압력을 넣어 핵기술 이전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1974년 12월 18일자『로스 앤젤레스 타임즈』에는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예비역 미해군 소장의 기고문이 실렸다.


          U.S. Sould Leave Korea - For Money, Security

                              (By Gene La Rocque)

 In between his recent visits to Japan and Vladivostok President Ford squeezed in a short trip in South Korea to perpetuate American support for the military dictatorship of that country. Specifically, Mr. Ford promised to keep 38,000 U.S. troops in South Korea indefinitely and to give more millions of dollars to support the Korean military.

  As President Ford, faced with a worsening U.S. economy, seeks ways to ameliorate hardship at home without contributing to inflation, he would be wise to reverse signals about South Korea. That is one area of the world where our military budget could be cut-with positive advantages to U.S. national security. Savings and security could be combined-simply by withdrawing all American soldiers from South Korea.

  Prompt withdrawal could save more than $1 billion in the Defense Department budget. Since the end of the Korean war, we have poured $11 billion into maintaining U.S. troops in South Korea. What we have bought for our money is the regime of Gen. Park Chung Hee whose despotism is embarrassing us diplomatically and hurting us strategically.

  Militarily, we have done more than enough. The South Koreans simply don't need us any more. They have a powerful force of 625,000 men equipped with modern aircraft, tanks and surface-to-air missiles. South Korea, with a population twice that of North Korea and a gross national product three times greater, has the fifth largest military force in the world. Even Secretary of Defense James R. Schlesinger conceded recently that “South Korea has the manpower, firepower and defensive position to repulse a North Korean attack without U.S. ground support..”

  In no way does our presence contribute to the defense of the United States. In fact, stationing troops in South Korea weakens our national security. Just by being there, they could cause our automatic involvement in another costly land war on the Asian mainland, whether triggered by President Park or the North Koreans. Our 38,000 troops, in short, would be hostages requiring help from other U.S. forces to prevent their capture.

The largest U.S. contingent now deployed there is the 2nd Infantry Division, which has been stationed near the North Korean border for more than 20 years. If fighting flared, this division would certainly be the first unit to become involved regardless of who attacked first - and regardless, too, of military problem that might be arising elsewhere in the world. (Danger of this kind would become particularly acute as our oil stores diminish.)

  The presence of a great number of U.S. weapons in South Korea - many of which can be armed with nuclear warheads - also presents a problem of enormous gravity. These weapons are vulnerable to capture by enemy forces in time of war or by various groups, perhaps terrorists, in South Korea itself. Beyond that, their withdrawal would save us the expense of storing and protecting them on Korean soil.

  Given the potential for political turmoil in South Korea, U.S. nuclear weapons could become political weapons in efforts to involve this country in war against the north. Thus the withdrawal of such weapons - they are now deployed in forward areas - would enhance, not weaken, U.S. security. (Indeed, we should reexamine our general policy of stationing nuclear weapons in many parts of the world.)              

  The military rationale for U.S. troops in Korea no longer makes sense - and I am not alone in holding this view. Let me once again quote Secretary Schlesinger, who told a congressional committee this year that “The justification for those forces is no longer primarily a military one - the political purpose is primary now.”

  Yet, unless the United States recognizes the negative political consequence of its close identification with President Park's oppressive political regime, we may repeat in South Korea our experience in Greece where, in order to hold onto military bases, we supported a military dictatorship, lost the good will of the people - and, in the bargain, probably weakened our long-term security interests in the area.

  A stepping down of our military involvement in Korea, accompanied by diminished support for Park's dictatorship, would permit the political situation in South Korea to evolve in a more democratic and stable direction, benefitting both that country and our own.

  One specific benefit to the United States - in addition to a saving of about $1 billion - is that we would regain our option of whether to go to war again in Korea if war were to break out there. Our withdrawal, in fact, might well ameliorate hostility between North and South Korea, for once their forces have achieved relative parity, they might learn to live with one another.

  Thus, if President Ford means what he says about budget reductions, one place to start is South Korea. It is, of course, in the best interest of the United States to maintain a strong national defense, but this does not mean that the proposed military budget should be swallowed whole. Far from contributing to our defense posture, the presence of U.S. troops and weaponry in South Korea is as counterproductive as it is wasteful.    


  Gene La Rocque, a retired U.S. Navy rear admiral, is director of the Center for Defense Information in Washington. He is a former assistant director of the Strategic Plans Division of the Chief of Naval Operations and also served as a strategic planner for the Joint Chiefs of Staff.


  미묘한 뉘앙스를 지닌 이 글은 박정권에 대한 미국 영향력의 한계를 인정하며 또한 한국의 핵무기 보유에 대한 미국의 두려움을 보여준다.


  미국은 처음에는 한국 정부에 직접 압력을 행사하지 않고 우회적인 방법을 썼다. 스나이더 대사는 피에르 랑디(Pierre Landy) 주한 프랑스 대사를 만나 “미국은 남한 정부가 플루토늄을 군사적 목적에 사용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고 넌지시 경고했다. 그러나 랑디 대사는 남한이 먼저 포기하지 않는 한 프랑스가 먼저 핵 기술 판매를 포기할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미국은 캐나다와 벨기에에도 한국과 맺은 계약을 취소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1974년 12월 미 의회는 미군철수에 따라 지원하기로 한 對韓 군사원조에 제동을 걸었다. 미 의회는 1975년 한국에 대한 미 행정부의 2억3천8백만 달러 군사원조 요구를 1억4천5백만 달러로 삭감했다. 그러면서 만약 포드 미 대통령이 한국의 인권수준 개선을 의회에 보증한다면 1억6천5백만 달러의 추가지원을 제공할 것이라고 제시했다.

  그러나 포드 대통령은 보증을 하지 않았고 對韓 군사 원조는 삭감된 채로 집행되었다. 미 제 7사단 철수의 대가라는 성격을 띠고 무상원조로 진행된 이 한국군 장비 현대화 계획은 1971년을 기점으로 실시되었으나 결국 2년이나 지체되었고, 소요 비용도 처음 합의와 달리 총액의 3분의 1이상을 한국측이 부담해야 했다.


   남부 베트남이 1975년 4월 30일 북부 베트남에 의해 무력으로 흡수 통일이 되어 한국에 큰 충격을 주었다. 민심은 동요했고 미국이민 신청자가 급증했다. 75년 6월 박정희 대통령은「Washington Post」지와의 회견에서 “한국이 미국의 핵우산 보호를 받지 못한다면 핵무기 개발을 포함한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하겠다”고 말했다.



Rowland Evans and Robert Nov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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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orea : Park's Inflexibility


 SEOUL-President Park Chung Hee, vowing to fight for the last inch of land even if U.S. forces leave Korea, told us South Korea could and would develop its own nuclear weapons if the U.S. nuclear umbrella is withdrawn.

  In one of his rare interviews, the Korean strong man also declared he would not relax tough internal security measures while the military threat from North Korea lasts. Recognizing that restoration of full civil liberties would help him in the U.S. Congress, he insisted such relaxation could make Korea another Vietnam and therefore gave no hope for major change.

  Thus, Gen. Park is set apart from other East Asian leaders traumatized by the Indochina debacle and looking for accommodation with the rising Communist tide. Facing the gun barrels of the North Korean garrison state, Park relies heavily on his U.S. alliance. But he will not appease American critics by actions he says would weaken security and is prepared to go it alone if necessary.

  Park gave responsive, often blunt answers for nearly two hours in his office at the Blue House-his first meeting with a foreign reporter in eight months. Small to the point of frailty, the 57-year-old professional soldier in his 15th year of rule seemed in excellent health and supremely confident the course he follows is correct.

  While declaring his own faith in official U. S. reaffirmations of support for South Korea, Park told us, “There were and still are quite a number of Koreans doubting the commitment of the United States” since the fall of Vietnam. What if those doubts are well founded? “Even without assistance, our people are determined to fight to the last man and not to concede an inch of our territory.”

  He next confirm!ed for the first time South Korea, if abandoned by the U. S., would go nuclear. “We have the capability,” the president said, but are not developing it and are honoring the 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 Then he bluntly added : “If the U.S. nuclear umbrella were to be removed, we have to start developing our nuclear capability to save our selves.”

  The nuclear umbrella and airpower comprise the major U.S. deterrent to a Communist attack, but Park also argued the U.S. 2d infantry division here plays “an essential role in deterring attack.” If American ground troops were removed, “the enemy will be inclined to make a miscalculation” and “American word would carry far less credibility.” Chuckling, Park said the U.S. soldiers play the role of fullback in soccer football as a last line of defense. In other words, the 2nd division would not be in the heart of ground combat.

  As for his May 13 decree banning internal dissent, the president said that otherwise “we might become another Vietnam.” Is there hope for relaxation? “It depends on the actions of the North Koreans. If the threat from the North Koreans is reduced, we should be able to relax security measures. If it is heightened, we would have to take tighter restrictions. There is no other way.”

  Park seemed to fully appreciate the difficulty his crackdown causes him in Washington, calling it “one of my headaches.” Many Americans would say “very nice”(Park speaking in Korean, used the English words “very nice”) if students were allowed to demonstrate. But, he added, that would undermine security and make the nation vulnerable to Communist attack.

  Park cited three examples of democracies curtailing civil liberties under extraordinary conditions : Canada's crackdown on Quebec separatists, Gen. de Gaulle's authoritarian measures during the Algerian crisis and U.S. internment (in “concentration camp,” said Park) of Nisei Japanese during World War Ⅱ. Granting that human rights are abridged in South Korea, said the president, Americans should note there is “no trace of human rights” in North Korea.

  Other Park pronouncements :             

  ● Provocation : If instead of a frontal attack North Korea makes a provocation by  attacking South Korea's five small western islands, retaliation against North Korean rear areas “would play into the hands of the Communists.” Instead, the islands, nestled along the North Korean coast, should be made “invulnerable” to attack.

  ● Airpower : Combined U.S. and South Korean airpower is in “precarious balance” with North Korea's. But since “there is no guarantee that Americans will remain in Korea forever,” South Korea needs more of its own planes.

  ● Four-power pact : The plan by opposition leaders here for the U.S., Soviet Union, China and Japan to guarantee Korean peace is “highly unrealistic.” Great power guarantees did not work in Indochina and would “not be backed by any strength” in Korea.

  Park Chung Hee is clearly not inclined toward new arrangements in handling his menacing northern neighbor. His insistence on harsh internal security measures, his appeal for continued U.S. military presence here and his determination to survive-even to the point of going nuclear-if the Americans leave are all linked to an iron resolve that Korea. shall not become a domino. That resolve, rare in nervous East Asia after Vietnam, may more than compensate for the aggravation caused U.S. officials by Park's inflexibility.


           


                Korea : Park's Inflexibility


 서울-박정희 대통령은 미군이 한국에서 떠나더라도 최후까지 싸우겠다고 다짐하면서,  미국의 핵우산이 철회되면 한국은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으며 개발할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했다.

  이 한국의 스트롱맨은 또한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 지속되는 한 엄격한 국내 안보 조치를 완화하지 않을 것이라고 오랫만에 하는 이 인터뷰에서 천명했다. 그는 (제한된) 민권을 완전히 회복시키는 조치가 미 의회의 지지를 얻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러한 유화조처가 한국을 제 2의 월남으로 만들 수 있으며 따라서 크게 완화시킬 뜻이 없음을 비추었다.

  이것을 보면, 박정희 장군은 월남의 패망으로 충격을 받고는 기세가 오른 공산주의 세력과 타협하려는 다른 동아시아 지도자들과 구별된다. 병영국가인 북한의 총구를 눈앞에 둔,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과의 동맹에 (안보를)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생각하기에 안보약화를 초래할 조치를 취해 미국의 비난을 피하지는 않을 것이며 필요하면 계속 현 상황을 유지할 것이다.

  청와대 집무실에서 8개월만에 처음 갖는 외국 기자와의 기자회견에서, 박 대통령은 거의 2시간 동안 거침없이, 때로는 퉁명스럽게 답변했다. 약해 보일 정도로 체구가 작으며, 집권 15년째인 57세의 직업군인 출신인 그는 매우 좋은 건강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그가 취하는 노선이 옳다고 극단적으로 확신하고 있다.

  미국의 對韓 안보 공약 공식 재천명에 신뢰를 표시한 박정희 대통령은, 베트남 패망 이후로 “많은 한국인들이 미국의 공약을 여전히 의심하고 있다”고 우리에게 말했다. 그런 의심이 근거가 있으면 어찌할까? “외부의 도움이 없더라도, 우리 국민은 마지막 1인까지 싸우고 한치의 우리 땅도 넘겨주지 않을 결심이오.” 

  그 다음에 그는 미국이 한국을 포기하면 핵무장을 할 것이라고 처음으로 확언했다. “우리는 제조  능력이 있으나 개발하고 있지는 않으며 핵무기 비확산 조약을 준수하고 있다”고 대통령은 말했다. 그리고 무뚝뚝하게 덧붙였다 : “미국의 핵우산이 철회되면, 우리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핵무기 개발을 시작해야 한다.”

  핵우산과 공군력이 북한의 공격에 대한 미국의 주요 억제력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또한 주한미군 제 2사단이 “침략을 막는데 있어 핵심 역할을”한다고 주장했다. 미 지상군이 철수하면, “적은 오판하게 될 것이며 미국의 공약은 신뢰가 떨어질 것이다.” 파안대소하면서 박 대통령은, 미군은 축구경기에서 최후방을 맡는 풀백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제 2사단은 지상전의 중심이 아닐 것이라는 뜻이다.

  반대의견을 금지하는 5월 13일의 포고령(역주: 긴급조치 9호)에 대해,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제 2의 베트남이 될 지도 모른다”고 대통령은 말했다. 조치를 완화할 가능성은 있는가? “북한의 행동에 달려 있다. 북한의 위협이 감소하면, 우리는 안보 조치를 완화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위협이 증가하면, 더 엄격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다른 방법은 없다.”

  박 대통령은 그의 탄압 조치로 인해서 미국과의 관계에 어려움이 생긴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듯, 그것을 “내 골치 덩어리”라고 말했다. 만약 학생들의 시위를 허용하면 많은 미국인들은 “very nice”라고 말할 것이다(한국어로 말하던 박 대통령은, “very nice”란 영단어를 썼다). 그러나, 그러면 안보에 해가 되며 나라가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에 취약해질 것이라고 덧붙여 말했다.

  박 대통령은 비상시에 민주 국가로서 민권을 제한했던 3가지 예를 들었다. : 퀘벡 분리주의자에 대한 캐나다 정부의 탄압, 알제리 위기 시 드골 장군의 독재 조치와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의 재미 일본인 수용소 감금조치[역주 :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하자 미국정부는 재미 일본인들이 미국 시민권자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전쟁기간 중 수용소에 유배시켰다. 40여 년이 지나 Bush 행정부는 과오를 인정하고 1인당 2만 달러를 배상하였다]. 한국에서 인권이 제약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미국인들은 “북한에는 인권이 전혀 없다는 점에” 미국인들은 유의해야 한다고 대통령은 말했다.

  박 대통령의 다른 발언들 :             

  ● 북한의 국지적 도발 : 북한이 정면 공격을 하지 않고 서해의 작은 5개 도서를 공격하는 국지적 도발을 할 경우, 북한의 후방에 대해 보복 공격을 하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의 계략에 말려드는 것이다.” 대신에, 북한 해안에 근접해 있는 이들 섬들은, 공격에 당하지 않도록 대비해야 한다.

  ● 공군력 : 한국에 있는 미 공군과 한국 공군력을 합하면 북한의 공군력과 “미묘한 균형”을 이룬다. 그러나 “미군이 영원히 주둔한다는 보장이 없으므로,” 한국은 더 많은 자체보유 공군기가 필요하다.

  ● 4대 강대국 조약 : 미국, 소련, 중공 그리고 일본이 한반도의 평화를 보장하게 한다는 한국 야당의 계획은 “매우 비현실적이다.” 강대국의 보장은 인도차이나에서 효과가 없었고 한반도에서는 “어떠한 세력에 의해서도 보장되지 않을 것”이다.

  박정희는 위협적인 북한을 다루는 데 있어 새로운 조치를 취할 의향이 전혀 없다. 가혹한 국내 보안조치에 대한 고집, 미군의 계속적인 주둔 요청과 미군이 철수 할 경우 핵무장을 해서라도 생존하려는 결심, 이 모든 것이 한국이 베트남같이 되지 않겠다는 강철같은 의지와 연결돼 있다. 베트남 패망이후 불안정한 동아시아에서는 희귀한 이러한 의지는, 박대통령의 비타협성 때문에 미국관리들이 느끼는 어려움을 보상하는 그 이상의 것인지도 모른다. 


         


   거의 같은 시기에 영자지「Korea Times」는 “한국은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기술적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최형섭 과학 기술처 장관의 말을 보도했다.

   같은 달 리차드 스나이더(Richard Sneider) 주한 미국대사는 자신의 견해를 상세하게 담은 보고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했다. 다음은 그 일부이다.


   미국의 현 한반도 정책은 잘못된 것이며, 미국은 남한이 미국의 속국이라는 구시대적 발상을 토대로 삼고 있다. 이런 식의 접근으로는 장차 중견 국가로 성장할 남한에 대한 장기적 접근이 불가능하다. 남한 정부는 미국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미국 정부는 한반도 문제에 대해 임기응변식으로 대응할 수 밖에 없게 될 것이다. 예컨대 미국 정부는 주한미군의 장기 주둔 여부에 대해 아직까지도 남한 정부에 분명하게 답을 준 적이 없다. 또한 자체적으로 첨단 무기를 개발하려는 박 대통령의 노력을 저지하면서도 정작 미국 정부가 남한에 제공할 수 있는 군사기술은 무엇인지 분명하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이와 같이 불확실한 상황 때문에 박 대통령은 언젠가 다가올 미군 철수에 대비하고 있고 그 대책으로 남한 내에서 탄압 조치를 강화하는 한편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북한은 언젠가 미군이 철수할 날을 고대하고 있는 반면 일본은 미국의 신뢰성을 의심하며 남한의 장래에 대해서 불안감을 품고 있다.             


   핵무기 개발 포기를 위한 미국의 압박은 더욱 거세고 집요해졌다.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 압력과 함께 상업․재정 차관 제공을 중단했다. 당시 남해 화학이 여천에 건설 중이던 비료 공장은 미국의 차관 중단으로 공사에 차질을 빚었다. 1975년 8월 23일 리처드 스나이더 주한 미국 대사는 핵무기 개발을 포기시키기 위해 최형섭 장관을 방문했다. 그는 국제정치 불안을 내세워 핵무기 개발 포기를 요구했다.

   미국은 박정권으로 하여금 핵무기 확산 금지조약(NPT)에 가입토록 하는 한편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 계획의 포기를 선언토록 했다. 1975년 8월 박정희 대통령은 일생일대의 굴욕을 맛보았다. 미국에 핵무기 포기 각서를 써주고 만 것이다. 75년 8월 25~28일간 열린 한미 연례안보 협의회에 참석한다는 명목으로 이례적으로 한국을 찾은 제임스 슐레진저 국방장관은 박정희 대통령을 협박해서 핵무기 포기 각서를 받아냈다.

   그는 미국 원자력 위원회 위원장과 CIA 국장을 역임한 핵문제 전문가이다. 하버드대 동창인 키신저 국무장관과의 불화로 75년 11월 포드 행정부에서 물러난 뒤 76년 카터 행정부 출범 당시 다시 에너지 장관으로 기용되었던 인물이다. 핵무기 포기 각서를 받아낸 대가로 ‘북한전쟁 도발시 선제 핵사용’ ‘한국 수도권 방위 9일 속결전’ 등의 강력한 대한(對韓)방위 공약을 제공했다.

   1976년 1월 미국은 최후 통첩을 전하기 위해 국무성 관리들을 보냈다. 마이런 크런처 해양․국제 환경․과학 담당 차관보 서리를 단장으로 한 미국 교섭단 일행은 1월 22~23일 주한 미 대사관에서 최형섭 장관을 대표로 한 한국측 관계자들과 협상을 벌였다. 실제로는 협상이 아니라 한국측을 심문하는 자리였다. 미국측은 재처리 시설 도입을 포기하지 않으면 고리 1호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핵연료 공급을 중단하고 핵우산도 철거하겠다고 협박했다. 이들 일행은 회담에 앞서 박정희를 만나 ‘재처리 시설 도입 강행시 군사 원조 중단’ 방침을 통고한 상태였다.

   결국 한국정부는 프랑스로부터의 재처리시설 도입을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한국과의 사업을 최우선 국책사업으로 선정했던 프랑스도 미국의 압력을 버틸 수 없었다. 1976년 1월 23일 한국과 프랑스와의 계약은 공식파기 되었다. 캐나다에서 수입하기로 한 연구용 원자로 도입 계획도 좌절되었다(다만 월성 1호기는 76년 착공되어 83년에 완공되었다). 벨기에와 함께 추진 중이던 혼합핵 연료 사업도 77년 11월 11일 공식 중단됐다. 미국은 핵무기 개발 감시를 위해 미 대사관에 과학관을 76년부터 파견했다.

   그러나 비슷한 시점인 1975년 12월 6일 일본은 순 일본산 플루토늄 생산에 성공했다. 일관된 정책과 외교력, 미국의 유화 정책이 빚은 결과였다.

   미국의 동북아 전략의 핵심에는 일본이 놓여 있으며, 한국은 그 뒷마당에 불과하다. 한국이 핵무기를 보유하는 순간 미국의 대한 통제력은 결정적으로 약화되며, 일본도 미국의 핵우산에서 벗어나 핵무장를 하게 된다. 미국이 한국의 핵무기 보유를 결사 저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박정희 씨는 결코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지 않았다. 미국의 엄중한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1976년 1월 말 핵연료 재처리 사업은 ‘화학 처리 대체사업’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연구용 원자로는 자체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코리아 게이트로 한미관계가 위기로 치닫고 있던 1976년 가을 박 정권은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을 위한 의욕적인 작업을 착수했다. 76년 10월 한국 원자력 기술 공사가 설립되었고 12월에는 한국 핵연료 개발공단이 창설되었다. 핵연료 개발공단의 초대 소장에는 주재양 박사가 임명되었다. 원자력 개발을 위한 표면상의 최대 이유는 원자력 발전과 핵연료 국산화 및 방사선 동위원소 이용기술 개발이었다.

   75년부터 착수된 국군 전력증강 계획이 바로 이해부터 시작된 원자력 개발정책과 병행되었다는 사실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밝혀진 원자력 개발 정책의 주요 목표는 원자력 발전 기술 개발, 핵연료 국산화, 방사선 동위원소 이용 기술 개발, 안전성 확보, 원자력 인력개발 등 다섯 가지였다. 그러나 당시의 밝혀지지 않은 최대의 목표는 핵무기 개발이었다.

   정부는 1977년 무렵부터 대전 대덕지역에 대대적인 연구단지를 조성, 원자력 기술 개발을 위한 연구시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광활한 이 연구 단지야말로 박정희 씨가 야심을 갖고 착수한 핵무기 개발센터였던 것이다. 여기서 실험용 원자로를 이용한 플루토늄의 생산과 핵탄두의 운반체 (미사일) 개발이 추진되었다.

   핵연료 재처리 사업은 우라늄 정련(精鍊) 시설, 전환 시설, 핵연료 가공시설, 조사(照射)후 시험 시설, 방사성 페기물 처리 시설 등을 프랑스에서 들여와 재처리 시설을 갖추려는 것이었다. 미국에게는 국내에 매장된 우라늄을 캐내 핵연료로 가공하는 것이 대체 사업이라고 둘러댔지만 미국측은 믿지 않았다. 각종 시설들을 제공하는 프랑스측에도 핵무기 개발 사실을 숨겨야 했다.

   연구용 원자로(NRX) 개발 사업은 金東勳 박사가 이끄는 원자력 연구소 장치개발부가 맡았다. 30명 정도의 연구원이 참가했다. 설계․기술 자료 등은 캐나다와 연구용 원자료 도입 교섭을 할 때 상당수 확보했었고 대만에서도 많은 자료를 얻어 왔다. 이 사업 역시 미국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사업 명칭을 처음에는 ‘열 중성자 시험 시설 사업’으로 위장했다가 나중에는 ‘기기장치 개발 사업’으로 바꾸었다. 

   1978년 10월에 핵연료 가공 시설이 완공됐다. 1979년 5월에는 우라늄 정련․전환 공장 건설이 시작됐다.  

  

 핵무기 포기 각서를 받아낸 이후로도 미국은 경계의 눈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미 대사관에 파견된 과학관이며 CIA 요원인 로버트 스텔러는 불시에 개발 공단을 찾아와 감시를 했다. 카터 정권에 들어와서 주한미군 철수를 추진한 이래 미국은 한국이 자주국방을 위한 대안으로서, 한때 중단한 핵무기 개발을 재추진할 가능성이 있음을 감지했다. CIA 같은 정보기관이나 의회보고서, 민간 연구 기관에서는 한국이 독자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할 능력을 보유하고 있음과 그 전망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다.

   

   박 정권이 추진한 핵무기 개발 계획에 관한 최초의 공식 기록은 미하원 국제관계위원회의 국제기구소위원회(Subcommittee on International Organization)가 1978년 10월 31일 발간한 한․미 관계 조사보고서(Investigation of Korean-American Relations)였다. Donald M. Fraser 의원이 위원장이었던 관계로『프레이저 보고서』라고도 알려진 이 보고서는 1976년에 일어난 코리아게이트 사건을 계기로 한미관계를 조사․연구한 최종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에서 한국의 자주 국방계획과 핵무기 개발에 관해 언급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196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한국정부는 상황이 요구하는 데 따라, 미국정부와 결속하거나 독자적으로 방위산업의 영역을 광범위하게 발전시키기 위해 분투하였다. 한국 정부는 미국의 철군 선언이 있던 시기인 1970년 말에 방위 기구 2개를 설립하였다. 국방과학연구소(ADD)와 무기개발위원회(WEC : Weapons Exploitation Committee)가 그것이다. ADD는 공개적으로 군사연구와 무기개발, 무기체제, 장비, 한국 군사물자의 개발을 실행하였고 방위산업 영역의 기술개발을 지원했다. 1973년과 1975년 사이에 ADD는 그 인력과 예산을 배 이상 증가시켰다. 그것은 한국에서의 생산이라는 면을 고려하여 전형적인 군수품의 고안과 실험 등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다른 한편, WEC는 군수조달과 생산에 대해 청와대의 책임을 지는 비밀특별위원회였다. 경제문제 제 2 수석 비서관인 오원철과 다른 고위 청와대 관리들이 참가자에 포함되어 있었다.

   WEC의 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분명히 WEC의 멤버들은 노르웨이․프랑스․스위스의 무기 공장을 견학하였고, 1972년에는 생산시설을 조사하고 무기생산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이스라엘에 갔다. 이스라엘에서 WEC 멤버들은 아이젠버그(Shoul Eisenburg)의 초청손님이었다고 한다. 1972년 가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WEC에 대해, 아이젠버그가 한국에 판매하려고 시도하고 있던 이스라엘제 가브리엘 지대지미사일의 구입을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이 일은, 그 미사일 체제가 미국의 군사원조 프로그램의 상당분을 위태롭게 할 것이라는 미군부의 반대와, 가브리엘 미사일은 2급의 체제로서 그것의 조달은 미국측의 강력한 부정적 반응을 초래할 것이라는 한국군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졌다(미국은 이전에 代案차원의 미사일 체제를 공급하라는 한국의 요구를 거절한 적이 있다)

   보고된 바에 의하면, 미군부는 미국의 부정적인 대응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한국정부가 가브리엘의 조달을 진전시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은 명백히 그 견해를 수정했고 미사일 체제에 대한 미국의 기술을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1978년 9월 27일 한국 정부는 나이키-허큘리스(Nike-Hercules)의 개량형인 최초의 한국산 지대지미사일의 실험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1970년대의 방위계획과 생산에 있어서 한국의 핵정책 만큼 대미 독자성의 증대 정도를 잘 나타내준 것은 없다. 미 행정부는 이 문제를 예민한 것으로 간주하여 계속되는 정보 요청에도 불구하고, 국무성은 응하지 않았다. 이 무제에 대한 본 소위원회의 관심은 한국정부가 핵무기 제조능력의 발전을 위해 취한 조치에 앞서서 미국과 논의하거나 통고하지 않았다는 명백한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1970년대 초반에 한국이 핵무기개발계획을 위해 몇 가지 조치들을 취했다는 표시가 있었다. 이 문제에 관한 상세한 내막은 WEC의 멤버였던 전 한국정부 고위관리와 가진 본 소위원회 조사위원 인터뷰에서 밝혀졌다(1978년 2월 28일). 그는 본 소위원회에서 WEC가 만장일치로 핵무기 개발에 착수하기로 결정했다고 얘기했다. 결과, 한국정부는 프랑스로부터 핵연료 재처리 시설을, 벨기에로부터 합성산화연료 처리시설의 구입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1974년 4월 캐나다 NRX 실험원자로의 도움으로 생산된 분열물질을 이용한 인도의 핵장치 폭발은 핵기술공급국의 주의를 환기시켰고, 벨기에와 캐나다는 기술제공을 철회하였다. 한국과 프랑스의 협상은 재처리공장건에 대래 얼마간 지속되었다. 결국 1975년 경, 한국의 모든 핵무기계획은 취소되었고, 연료재처리 시설의 구매협상은 종료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핵정책이 명백해짐에 따라 미국은 한국의 핵개발계획의 확장에 적극적으로 협력했고, 표면적으로 한국정부와의 에너지관계의 형식과 내용 모두를 개선시켜 온 과정에서 미국의 상업적 원자로를 판매하기로 약속했다.

   위의 사건은, 전지역적인 안보이해와 다른 강대국들과의 군축협상을 포함하고 있는 미국의 강력한 관심영역에서조차도 한국정부는 명백히 독자적인 행동을 취하려 한다는 사실을 나타내 준다.

   1974년의 외교적 노력이 한국의 핵무기 생산에 대한 독자적인 조치를 붕쇄하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재래식 무기에 있어서의 유사한 조치들이 제한되지 않고 있었다. 1976년, 한국정부가 그들의 재래식 무기조달과 생산능력 확장을 위한 다른 공급원을 모색하려는 일방적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는 신호가 나타났다….』

                                                                                                                                    1978년 11월 4일자 로스 엔젤레스 타임즈지는 핵무기 개발로 인한 그간의 한미간의 갈등을 알리는 보도를 했다. 다음은 그 내용의 일부이다.

 

                                                                                                                             「1974년 5월 18일 인도의 충격적인 핵폭발 실험을 계기로 여타 국가들의 핵무기 개발 계획을 탐지하기 위해 미국은 핵기술 전문가를 포함한 특별 정보반을 설치하여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기술 및 지원 목록을 작성, 플루토늄, 붕소, 베릴륨 및 특수 폭발 장치 등에 대한 각국 정부의 대미 구매 신청 상황을 추적함으로써 한국 정부의 핵무기 개발계획을 알게 된 것이며 미국 내 한국 과학자들의 연구 및 한국의 평화적인 핵에너지 계획에 대해서도 정보를 수집한 결과 ‘한국이 핵무기 생산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는 명백한 결론을 내리고 이를 포기토록 하기 위해 프랑스로부터의 핵연료 재처리 시설 도입과 미국 웨스팅하우스사로부터의 원자로 구매 교섭에 압력을 가하는 한편, 캐나다 정부를 설득, 한국과의 핵장비 교섭을 중지시켰다. 포드 대통령이 이끄는 미 행정부의 압력에 의하여 결국 한국 정부는 핵무기 개발계획을 포기했고 그 대신 미국은 한국에 대한 지속적인 원자력 발전 설비의 공급을 약속했다.」


   미사일 개발도 핵무기 개발과 비슷한 시기에 추진됐다. 미사일은 날아다니는 종합과학이다. 유도 조정, 구조 해석, 風洞시험, 추진제 등 각 분야의 고급 기술이 농축된 무기 체계의 정화이다. 1971년 12월 26일 박정희 씨는 지대지 미사일을 개발하라고 특별 지시를 내렸다. 미사일 개발 작업은 ‘항공 공업 사업’이라는 위장 명칭으로 불렸다. 12명의 개발 계획단이 구성되어 1972년 5월 16일서부터 7월 4일까지 미국의 미사일 연구소를 견학했다. 72년 9월 30일에 항공 공업 추진 계획서가 완성됐다. 이 계획에 따르면 74년 말까지 중거리 무유도 로켓, 76년 말까지 중거리 지대지 미사일, 79년 말까지 장거리 지대지 미사일을 개발한다는 것이다. 1973년 2월 23일에 연구장비 심의 위원회가 설치되어 필요 장비 구입계획이 작성되었다.

   1974년 5월 미사일 개발은 율곡 사업의 하나로 확정되었다. 박정희 씨는 최단 시일 안에 목표를 달성하라고 재촉했다. ADD는 이때부터 기술도입 계획을 추진하고 해외 과학자 유치에 나섰다. 재미 과학자들은 미국에서 채용되어 곧바로 연구팀에 합류했고, 국내 연구원들은 입소식을 마치고 기술 습득을 위해 해외로 출장갔다.


   미사일 개발 과정은 험난했다. 한국 전자산업이 진공관․트랜지스터 수준에서 반도체로 겨우 넘어가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미사일 선진국의 제조 기술과 생산 장비를 들여오는 방법밖에 없었다. 연구진은 미국․영국․프랑스를 오가며 추진제와 미사일 본체 제조 기술을 얻어냈다. 미사일 제조 기술을 얻기 위해 한국은 나이스 허큘리스(NH) 미사일의 주 설계 회사인 맥도널 더글러스(MD) 社와 교섭을 벌였다. MD 社에 나이스 허큘리스 미사일 사정거리를 180km에서 240km로 늘리는 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하자고 제의했다. 공동 사업은 기초 조사, 설계, 개발 생산 3단계로 나누기로 하고 1단계만 계약했다. 李景瑞, 洪在鶴, 崔浩顯, 具尙會 박사 등 10명의 연구진은 1975년 초 로스앤젤레스의 MD 社에서 6개월 동안 기초 설계 방법 등을 익혔다.

   6개월이 지났을 때 미 국무성은 ‘기술 인도 不可’판정을 내렸다. 그러나 6개월 동안 ADD연구원들은 미사일 설계에 필요한 자료와 기술을 확보하게 됐다. 2, 3단계 계약이 취소되자 독자 개발로 들어갔다. 다음 문제는 추진제 제조 시설과 기술 확보였다. 추진제는 미사일의 동력으로 자동차의 엔진과 같은 것이다. 추진제는 高價이나 즉시 발사가 가능한 고체식 추진제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나이스 허큘리스 추진제를 생산하는 다이아콜 社와 교섭을 벌였으나 미 국무성의 허가가 나오지 않았다. 목영일 박사가 추진제 제조 시설 및 기술이전을 프랑스 SNPE 社와 교섭했다. SNPE 社는 당시 세계 3위의 화약회사로 대륙간 탄도탄 추진제를 생산하기도 했다.


   이 무렵 미국의 록히드社 계열의 추진기관 제조회사(LPC)가 파산해 추진제 공장을 매각하려 했다. 추진제는 일종의 폭약인데 다량의 가스체를 고속으로 일정 시간에 걸쳐 분출해야만 한다. 그래서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데 어떤 화학물질을 어떻게 배합해야 하는가가 추진제 제조기술의 노하우이다. 화학물질의 배합에는 믹서라는 장치가 필수인데 한국형 미사일을 만들려면 용량이 300갤론인 믹서가 필요했다. 그런데 이때 300갤론 믹서를 생산하는 나라는 미국이 유일했다. LPC에서는 용량이 300갤론인 믹서를 2개 보유하고 있었고 용량이 작은 믹서도 여분으로 있었다. 기술은 얻을 수 없었으나 공장은 사서 통채로 한국으로 옮겼다. 프랑스의 SNPE 社에서는 추진제 제조 기술과 원료를 도입했다. 영국의 한 회사로부터는 유도 조정 장치 제작 기술을 습득했다. 록히드 社로부터 매입한 추진제 공장을 대전으로 뜯어 와 1976년 12월 2일 대전 기계창을 준공하였다. 기계창은 미사일 개발을 위한 위장 명칭이었다.


   미국의 카터 대통령은 1977년 1월 20일 취임하면서 한국에 배치했던 전술핵탄두와 미사일 부대를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은「전쟁 억지력의 보존」이란 측면에서 전술핵의 잔류를 미국 정부에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의 미사일 부대는 한국정부에 통고도 없이 1977년 4월부터 철수를 시작했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1977년에 미사일 보유를 서두르기 위해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로부터 핵탄두 운반이 가능한 소련제 미사일을 公海상에서 인도받는 형식으로 들어오려고 한 적도 있었다. 이것은 신형식(申炯稙) 건설부 장관의 건의로 기획된 것으로 중동(中東)의 한 건설 회사를 중개인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거액의 선금까지 지불한 이 거래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강력히 반대하는 바람에 포기했다.

   미국 정치와 언론은 유태인이 지배한다. 이스라엘 최대의 적인 PLO와의 무기 거래가 미국에 알려지면 한미관계에 어떤 파장이 일지는 예측을 불허하는 일이었다. 정보부장의 반대는 이를 우려한 것이었는데 여기서 박정희씨와 김재규의 미국을 바라보는 시각차가 확연히 드러난다.    


   처음에 미국정부는 미사일 개발 자체를 반대하였으나, 미사일 개발이 상당히 진행되자 한국 정부와 타협, 기술이전을 해주는 대가로 사정거리를 180km를 넘지 않도록 요구했다. ADD는 시간이 촉박하므로 사정거리는 얼마든지 늘릴 수 있다고 판단, ‘180km 제한 합의서’를 썼는데 이것이 나중에 외교 문서가 되었다. 미국은 미 합동군사고문단(JUSMAC-K) 요원 6명을 대전 기계창에 보내 미사일 개발 상황을 감시했다.

   1978년 4월 NHK-1 미사일 제 1호가 시험 제작 됐으며 9월 초 제 8호가 나왔다. 1978년 9월 26일 충남 서산군 서해안 안흥 종합 기지에서 박 정희를 비롯한 3부요인과 군수뇌부, 베시 주한미군 사령관 등이 보는 가운데 제 9호 미사일 발사는 성공하였다. 이로써 한국은 자본주의 진영에서 7번째의 미사일 개발국이 되었다.

   일본의 매스컴들은 일제히 9월 27일자 조간에 이를 크게 보도하면서 아시아의 세력균형에 큰 변수로 작용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요미우리 신문은『북한보다 10년 늦게 70년대 초부터 방위산업 개발에 착수한 한국은 이번의 미사일 발사 실험성공으로 북한을 앞지른 것으로 평가되며, 특히 북한이 보유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핵무기 운반체를 보유했다는 것은 안보상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논평했다.

   소련 국방성 기관지「적성(赤星)」1978년 9월 29일자에서「한국의 미사일 생산은 핵무기 생산의 예고」라는 제하의 기사를 싣고,『한국의 장거리 지대지 미사일 발사 성공은 곧 핵무기의 자체생산을 예고하는 것이다. 한국은 오래 전부터 탱크, 군함, 대구경포 등을 자체생산하고 있었으며 총 예산의 35.9%를 국방비에 사용해 급격한 국방력 강화작업을 서두르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 국방부 대변인은『우리는 주한미군 사령관의 보고를 받을 때까지 한국의 미사일 발사에 대해 논평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계획은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미사일 개발로 원자 폭탄의 운반 방식도 공중투하 계획에서 미사일 탑재식으로 수정됐다. 유도 조정 장치를 관성항법 장치(INS : inertial navigation system, 이 기술은 1979년 봄 영국의 Ferranti 社에서 도입했다)로 개량한 NHK-2(현무) 사업에 들어갔다. 인공 위성 사업도 시작했다. 대전 기계창 상공은 비행금지 구역이었다. 그러나 미사일 발사 시험 성공후 미군 비행기가 수시로 날아와 저공 비행을 하며 항공 촬영을 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핵무기 개발 계획과 관련된 일련의 보고서 가운데 가장 포괄적인 것은 1979년 4월에 나온 브루킹즈 연구소의 한 보고서였다. 〈제 3세계에서의 핵무장-미국의 정책적 딜레마〉라는 타이틀이 붙은 이 보고서는 브루킹즈 연구소의 외교 정책 담당 연구원이며 조지타운 대학 교수였던 어니스트 레피버가 집필한 것이었다. 이 보고서 가운데 한국 관계 부분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한국의 핵무장 동기는 북한의 군사 위험이 증가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계속해서 직면해야하는 불안성의 증대와 불확실성의 증가, 그리고 미국이 안보 지원을 감소시키거나 아예 포기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끊임없는 공포 때문이다.

   만약 한국의 중요성에 대한 미국의 평가가 심하게 떨어진다면 그것은 한국에 뚜렷한 불안감을 조성할 것이며 핵무장 지지자들은 그것을 이용할 수가 있다.

   한국은 1985년에 가서 소규모의 방위용 핵군사력을, 2000년엔 보다 주목되는 핵군사력을 보유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 한국의 핵군사력 유지는 한반도의 세력 균형에 새로운 힘의 요소를 가미, 재래식 혹은 핵전쟁을 유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한국의 핵무장 가능성은 주한 미군 철수정책을 위협할 것이며 미국의 강력한 대한 방위공약을 유도할 것이다. 카터의 철군정책은 한국으로 하여금 독자적인 핵방위 능력을 강화토록 촉발했다.

   한국은 북한이 중공이나 소련으로부터 지원을 받지 않는 상태에서 공격해 온다면 이를 단독으로 저지할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소련, 중공이 북한을 돕고 미국이 한국을 지원하지 않을 경우라면 한반도 적화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미국이 대한(對韓) 안보 공약을 약화시키고 80년대에 가서 모든 지상군을 철수시킨다면 한국은 소규모로나마 독자적인 핵군사력을 창설할 수 밖에 없으며 북한이 이런 사태 발전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한국의 핵군사력은 방어력으로 남을 수도, 혹은 공격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의 핵무기 개발 욕구는 사이공 함락, 소련과 쿠바에 의한 앙골라 赤化 및 카터의 철군 정책에서 강화되었다. 한국인과 정부는 미국이 방위 공약을 철회함으로써 고립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를 품어 왔다. 만약 한국이 재정적인 부담과 정치적인 위험을 무릅쓰고 핵무기를 생산해 낸다면 그들은 현재 보유하고 있는 F-4기나 어네스트 존 미사일 등에 이를 장착할 수 있으며 이는 북한에 대한 강력한 억제력이 될 것이다.

   한국은 지난 75년 고체연료에 의한 로키트 추진 장비를 록히드 회사로부터 구매했으며 한국 기술자들은 미니트맨이나 폴라리스 미사일에 응용되고 있는 고체연료 추진 과정을 익히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미국편에 놓여 있다. 미국이 한국에 대해 강력한 군사지원 공약을 이행하는냐의 여부에 한국의 핵개발 여부가 달려 있다. 한국의 지도자들이 장래를 위해 핵무기 건조를 계획하고 연구하려는 것은 미국의 대한방위결의를 확고히 믿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박정희씨 암살 사건이 있기까지의 수년간 한미 간에는 사실상 신뢰성이 완전히 상실되고 만 형편이었다. 미국은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박 정권의 핵개발 정책을 추적하고 있었다. 연례안보 협의회와 이를 계기로 한미국방 당국자의 방한은 그 목적의 하나가 핵무기를 포함한 한국 방위 산업의 현지 점검이었다. 1970년대 말, 한국을 방문한 미국 군사 정책의 입안자나 국방 책임자들이 일반 부대 시찰은 간단히 둘러보는 데 그쳤던 반면, 방위 군사 시설과 방위산업 시설에 대해서는 집중적인 관심을 갖고 둘러 본 까닭도 이런 데에 그 이유가 있었다. 1978년 11월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이 방한하여 방위산업을 시찰했을 때, 워싱턴의 일부 소식통들은 브라운 장관의 방한 시찰이 반드시 한국의 방위산업 육성을 위한 평가적 의미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한국의 군수 시설과 능력이 혹시 미국이 '통제하고 협조할' 단계를 넘어선 측면은 없는가를 확인하려는 데도 목적이 있다고 전했다.


   유신 선포 이후 한국은 언론통제가 극심했고 이에 따라 유언비어도 많아졌다. 대부분은 반정부 인사들이 만들어 유포시켰는데 그들의 희망 사항을 담고 있었으면서도 어느 정도 현실을 반영하였다. 다음은 그 일부이다.


   “미국의 공화당은 도청사건으로 닉슨이 물러나고 포드가 계승했으나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에게 참패했다. 민주당은 인권을 중히 여기는 정당이니 민주당이 승리한 이상 한국의 유신 독재는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박정희는 미국의 민주화 압력에 견디지 못하여 미국의 간섭이 귀찮으니까 소련을 한국에 끌어들이려고 일본에 있는 소련 대사관을 통해서 진주, 마산, 제주도를 소련에 조차해주기로 약속했다. 그는 그의 앞잡이 유정회 소속 국회의원들을 시켜 외무위원회에서 공공연하게 진해, 마산, 제주도를 소련에 빌려주자고 발언시키고 있다. 그래서 박정희는 조만간 미국에 의해서 제거된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세력은 또 군사쿠데타로 전복된다. 박정희와 김종필의 군사쿠데타에 의한 집권은 육사 11기 이후의 정규 사관학교 출신이 사단장 급으로 진급이 될 때 그들의 군사쿠데타로 끝장이 난다.”


   1970년대 내내 박 정권에 반정부 세력이 치열하게 도전하였으나 국민의 지지가 적은 상황에서 역부족이었다. 1976년에는 이른바 코리아게이트가 발발하여 박 정권과 미국과의 갈등이 공공연히 드러났다. 박 정권의 몰락이 미국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내용의 유언비어는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역량이 부족한 반정부 세력은 미국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모습은 또한 박 정권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반정부 세력이 집권할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10월 유신에 관한 미국의 견해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1973년 2월 18일, 미 상원 외교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골자의 보고서를 공표한 적이 있다.                                                                                                                                                                                                                           ‘이른바 유신체제란 이승만 시대 이래 한국이 채택한 최악의 독재체제이다. 박 대통령은 이제야말로 그가 바라던 절대 권력을 장악했다. 박 대통령이 퇴진하는 길은 그 자신이 퇴진에 동의하거나 아니면 죽음, 또는 혁명밖에 없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76년 10월, 서울에서 3년간 CIA 한국 지부장으로 근무한 도널드 그레그는 (그는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 사건 때 김대중을 도왔다. 1989년 한국대사로 부임했었다) 텍사스 대학에서의 한 강연에서, “한국의 정권이 현재와 같은 정치를 해 나간다면 임기 중반쯤에 가서 쿠데타로 타도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때는 코리아게이트가 미국 정치를 뒤흔들고 있었다.

   

   한미 관계의 위기에 있어서 한국정부는 단순한 외교상의 불편함 이상의 영향을 받는다. 미국은 한국에 있어 국가운명에 영향을 주는 커다란 정치적 변수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해방 이후 역대 어느 정권도 미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조선을 무력 강점한 일본 제국주의를 무조건 항복시키고 3년간 이 땅을 직접 통치한 나라이니 자력갱생 능력이 모자라는 신생 국가 대한민국은 그럴 수밖에 없다. 통치권자가 자주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고 미국에 비판적인 안목을 가져 고분고분하지 않을 경우 한미 관계는 충돌이 있게 마련이다. 이럴 경우 미국은 정권 교체를 생각하게 된다.

   한국전쟁 시기, 정치 파동을 일으키고 휴전협정에 반대하면서 반공포로석방을 단행한 이승만 대통령을 체포, 실각시키고 말 잘 듣는 장면을 집권시키려 했던 미국의「에버 레디(Ever Ready)」계획이 좋은 예다(1952년 여름 부산 정치파동 때 미국은 장면을 숨겨서 보호했다. 그 후 장면은 이승만 대통령 아래에서 부통령으로 있으면서 미국 정부에 ‘만약 대통령 유고시에는, 내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할 때까지 48시간 정도 나의 신변을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군사 쿠데타가 나자 장면이 미국 대사관으로 도주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금융시장 개방과 대 북한 정책 문제로 클린턴 행정부와 심한 마찰을 빚었던 김영삼 정권도 1997년 가을, 미국의 무차별 ‘달러 폭격’을 맞고 몰락했다. 이 융단 폭격에 수백억 달러의 외환 보유고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미국과의 불화가 정권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잘 보여 주는 또 하나의 본보기였다(미국, 일본, 유럽 언론들은 미국에 고분고분한 한국의 정권은 찬양일색으로 보도하고 사이가 원만하지 않은 정권은 매우 비판적으로 보도하는 경향이 있다. 지금도 그러하다).   

   

박정권은 출발 당시부터 미국과는 숙명적인 불화감을 지니고 있었다. 박정희 씨 자신이 미국과 궁합이 맞지 않았다. 5․16 이전에도 한국군 장군 치고는 유일하게 미국인과 어울리기를 싫어했다.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유일하게 골프 못치는 장군이었으며, 미국식 애칭의 이름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 뉴스가 될 정도였다. 장군이었을 때, 박씨는 군수사기관원과 미군을 가장 혐오했다. 이와 관련된 일화는 매우 많다.    

   5․16이후 2년이 넘는 군정 기간에도 통화개혁이나 계엄령 선포, 군정연장 선언 같은 중요 정책을 미국과 사전 협의없이 선언하고 추진하여 미국은 여러 차례 당황했다.

   1963년 발간된『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저서에서 박정희씨는 미국을 바라보는 시각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첫째, 미국은 서구식 민주주의가 우리의 실정에는 알맞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백보를 양보하여 하나의 민족 사회가 현대 자본주의 제도를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의 제요건이 갖추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사회의 전통과 문화, 그리고 자주국가인 이상, 무조건 동화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 전반이 균형되지 못한 우리 현실에 그 제도의 실현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민주주의 이상과 경제원조의 정신적인 의욕은 높이 사는 바이나 그렇다고 이를 통하여 한국사회로 하여금 일률적인 미국화를 기대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자유라는 이상과 미국의 경제적인 원조를 밑거름으로 하여 한국 고유의 주체성, 확고한 자아의식이 확립되고, 그 위에 자율적인 사회가 이루어져야만 비로소 미국의 참된 희망은 성취되는 것이요, 또한 외적과도 대결할 수 있는 견고한 방파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군사 경제면에 걸친 미국의 원조는 이왕에 줄 바에야 우리의 뜻에 맞도록 하여 달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달콤한 사탕보다는 한 장의 벽돌을 우리는 원하고 있다는 말이다.

      

   박 정권을 상대로 핵무기 개발을 포기시키려는 미국의 노력은 이면에서 추진되었으나 단 한번 공개적인 의사표명으로 나타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박정희 씨가 살해되기 1개월 전에 있었던 윌리엄 글라이스틴(William H. Gleysteen, Jr) 주한 미국대사의 연설에서였다.

   79년 9월 12일, 한국무역협회(Korean Traders Association)와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즈(Financial Times)가 공동으로 주최한 ‘80년대 한국 국제 심포지엄’에서「1980년대에 한미간에 효율적 관계를 유지하려면(The United States and Korea - Developing An Effective Relationship for the 1980s)」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글라이스틴 대사의 연설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최소한 한국의 전력이 북한의 전력과 맞설 수 있거나 또는 정치적인 조정이 이뤄지는 충분한 진전이 있을 때까지는 美전투병력의 한국주둔이 전쟁억제를 위해 한국에 필요할 것이다.

   양국간의 신뢰회복은 다행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신뢰가 없다면 한국은 과도한 정도의 자립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80년대의 효과적인 한미 안보관계란 한국으로 하여금 가능한 한 최대의 자립 방위 부담을 지게 하면서도 한국이 제 7 함대의 압도적인 능력이나 미국의 핵우산과 같은 요소들을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그런 정도는 아닌 관계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I believe that in the 1980s an effective U.S.- ROK security relationship will be one that has the Republic of Korea carry the maximum possible degree of the self defense burden but not to the point of thinking the ROK can replace factors such as the overwhelming capabilities of the Seventh Fleet or the American nuclear umbrella.)』

   

글라이스틴 대사가 말한 한국으로 하여금 미국의 힘을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그런 요소란 다름 아닌 핵무기 보유 이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 연설에서 글라이스틴 대사는 북한을 정식 명칭인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으로 여러 차례 호칭해 논란을 일으켰다.

   『대화를 위한 주요 통로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대표자들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The main channels for discussions will have to be representatives of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이때는 핵무기 개발을 둘러싼 박정희 정권과 미국의 줄다리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였다. 미국은 이면으로 핵무기 개발에 경고를 연발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개발 현장을 체크하고 다녔었다. 주한 미대사관과 주한미군 사령부에서 평균 1주일에 한번씩은 연구소를 찾아가 연구 실태를 감시했다.

   1979년에 들어와 박 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비밀리에 연구소를 들러 과학자들을 격려했다. 이들은 과학기술처 장관이 직접 미국에 가서 스카우트해온 한국인 핵물리학자들이었다.

   박 대통령과 한 번 연구소를 따라 온 대통령 측근중 한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의 핵무기 개발 집념과 과학자들의 연구 열의가 보통이 아니었다고 전한다.

   그가 목격한 바에 의하면 그 무렵 대통령과 과학자들은 신들린 사람들처럼 핵무기 개발에 집착해 있었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박 대통령에게 “이제 조금만 있으면 우리도 핵보유국가가 된다”면서 이렇게만 되면 “우리 대한민국은 완전한 자주 독립 국가가 된다”고 흥분했다고 한다. 어떤 과학자는 흥분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단계에 이른 핵무기 개발을 설명했다고 전한다.

   살해 사건이 있기 몇 달 전부터 박 대통령은 굉장히 흥분된 상태에서 지냈다. 핵무기 개발이 머지 않았음을 감지하는 이도 있었다. 그 당시 박 대통령은 몇몇 측근에게 “81년 국군의 날에 핵무기 개발 사실을 세계에 알리고 그 이후에는 영남 대학이나 나가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1979년에는 미국의 세계지배에 위협을 주는 여러 가지 대사건이 잇달아 일어났다 :

        79년 2월의 이란 혁명, 7월의 니카라구아 혁명, 4월 이스라엘의 비밀 수소폭탄 실        험, 9월 22일 이스라엘의 도움을 받은 남(南)아프리카 공화국의 원폭 실험 등.     


   특히 남 아프리카 공화국의 핵무기 개발은 미국에 충격을 주었다. 미국은 한국, 대만 그리고 남 아프리카 공화국을 가까운 미래에 핵무기 개발 가능성이 높은 나라로 경계하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신경과민이 되었다.

   여기에 국내정치 상황도 위기로 치닫고 있었다. 김영삼 총재의 뉴욕 타임즈 회견문제로 한국 정국이 들끓고 있던 9월 18일 미 국무성 동아시아 문제 담당 잭 케넌 대변인은 박정권에 대해 김 총재를 구속하지 말 것을 촉구하는 한편 김 총재에 대해서도 충동적 발언으로 정부를 자극하지 말 것을 권했다.

   한국 국회에서 김영삼 총재에 대한 제명 결정이 있은 직후 미 국무성은 즉각 성명을 발표, “이러한 행위는 민주주의 원칙에 위배되는 일”이라고 평하면서, ‘깊은 유감의 뜻’을 표명했다. 제명 조치 이후 박정권은 주한 미 대사관을 통해 두 차례 항의 성명을 전달받았다. 워싱턴에서는 리처드 홀부르크 국무성 동아시아 태평양 담당 차관보가 김용식 주미 대사를 불러 항의하였다.

   박정권은 미국 정부의 항의를 ‘내정간섭적 발언’ 또는 ‘대국주의적 사고’라고 말하며 반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오래 전부터 야당을 비롯한 반정부세력을 ‘친미사대주의자’로 생각해 왔었다.  

   

10․26 사건이 있기 수 주일 전부터 미국 정부는 공개적인 불만 표시와 함께 한국 정부를 상대로 비공개적인 경고를 계속해서 하고 있었다. 10월에 들어와서는 거의 최후 통첩과 비슷한 태도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사태의 시정을 요구하는 압력을 여러 루트로 전달했다.      특히 김영삼 총재 제명 직후 글라이스틴 대사는 비공개로 한국 정부에 YH 사건과 김 총재 제명을 강력 비난하면서 1개월 이내에 수습 또는 시정책을 제시하라고 요구했다. 여기에 덧붙여 대통령 긴급조치 9호의 해제도 촉구했다. 미국이 시한을 정하면서 사태의 시정을 요구한 것은 전례없는 일이었다.

   10월 9일 주일 미국 대사인 마이크 맨스필드는 동경에 주재하고 있는 미국 특파원들과 가진 기자회견에서 아시아 태평양 지역은 여러 가지 이유로 미국의 이익에 중요하다고 말하고, 이 지역의 외곽 방어선(outer defenses)는 일본과 필리핀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방위선안에 한국이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시사했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의 ‘애치슨 성명’을 연상시키는 맨스필드의 발언이 한국에서 파문을 일으키자 미 국무성은 “미국의 對韓 방위 정책은 확고한 것이며 아무런 변화도 없다”고 해명했다.

   김영삼 총재 국회 제명에 대한 미국의 항의표시로 10월 6일 소환됐던 글라이스틴 대사가 서울에 돌아온 것은 살해사건이 나기 10일 전인 10월 16일이었다. 매년 열리는 한미안보협의회에 참석하러 방한하는 브라운 미 국방장관 일행이 같은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 귀임이후 글라이스틴 대사는 한국의 여당과 정부당국 및 야당인사들과 정력적으로 만났다.

   10월 19일자『워싱턴 포스트』에는 충격적인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에는 카터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에 보낸 친서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와 미국정부가 對韓 경제개발차관의 의례적인 승인을 중지할 것이라는 내용이 있었다.


        U.S. Policy Aims at Stability for Seoul


                    By Don Oberdorfer

                  Washington Post Staff Writer


    The United States has responded to internal unrest in South Korea with new political signals of concern and disapproval, including a letter from president Carter and an unannounced change in procedures for considering economic development loans to that country.

   At the same time, new expression!s of support for Korea's security by Defense Secretary Harold Brown have complicated the human rights diplomacy.

   The mixed result of a high-level Washington policy review, which came to a head late last week, took into account a complex and sometimes conflicting welter of U.S. political, economic and security interests in Korea. In view of the problems involved, policymakers have been cautious both in their diplomatic decisions and in public disclosure of them.

   A senior State Department official stressed that the U.S. objective is not to bring down the troubled regime of President Park Chung Hee but to convince Park to emphasize conciliation, rather than confrontation, with the political opposition. Washington's hope is that such a shift would restore a measure of stability to South Korea, where martial law has been declared after riots in the second largest city, Pusan.     The most dramatic public sign of Washington's displeasure was the recall two weeks ago of Ambassador William Gleysteen for consultations. This was announced the day after the expulsion of Korean opposition leader Kim Young Sam from the National Assembly, an event that deepened already intense political discord in Seoul. 

   Results of the Washington consultations included:

  ● The letter from Carter to Park expressing concern about the recent events and making clear, according to officials, that the future course of relations between Washington and Seoul is at stake in Park's current decisions. Officials reported that the letter did not outline a specific course of action that the United States would like Park to take.

  ● An announced meeting at the State Department last Saturday at which Secretary of State Cyrus R. Vance expressed  strong U.S. concern to Korean Ambassador Kim Young Shik  for transmission to Seoul.

  ● A decision, conveyed to Seoul, to suspend routine U.S. approval of economic development loans for Korea proposed by the Asian Development Bank and other international financial institutions.

   Washington abstained on such loans because of human rights considerations for several months late in 1977, but has consistently voted in favor of loans to Korea, with greater likelihood that Washington will abstain or vote against them.

   A $25 million coal development loan scheduled to be considered by the Asian Development Bank next week may be the first test of the new U.S. policy. Some officials suggested that Washington may ask that consideration be postponed for a more intensive review.

   Running counter to the signals of concerns is the message of reassurance projected by the current visit to Seoul of Defense Secretary Brown. The Brown for periodic U.S.-Korean military consultations had been scheduled before the internal discord in Seoul reached its new intensity.

   There is no indication that serious consideration was given to postponing Brown's trip or replacing him with a lesser official. The Carter administration is concerned about any action in the security field that could transmit a signal of weakening resolve to North Korea, especially after widespread charges that this was the effect of Carter's plan for withdrawal of U.S. ground troops.

   Another problem for American policy is the possibility that public expression!s of U.S. displeasure could spur Park's political opponents to stronger action while failing to convince Park to take a moderate course. The Carter administration is hopeful -but by no means confident -that the steps to date will succeed, making more difficult and visible steps unnecessary.


         


 미국 정부가 1979년 하반기에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례를 찾기 힘든 압력을 가한 이유가 단순히 한국정부의 정책을 수정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그 이상의 것이었는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부마사태가 나자 박정희 대통령은 비밀리에 유화책을 모색했다. 이 무렵 박정희씨는 시국수습 방안으로 긴급조치 9호 철폐안을 만들도록 申稙秀 법률특보에게 지시했다. 이에 따라 신직수 특보는 긴급조치 9호 철폐안 및 철폐후의 관련 법안을 10월 27일 오전 중에 박정희 씨에게 브리핑할 예정이었다.

                                                                                                                                                                                      대통령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의 부정․반대․왜곡․비방․개정 및 폐기를 주장하거나 청원․선동 또는 이를 보도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며 이의 위반자는 영장없이 체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쉽게 말해 유신헌법 찬양은 죄가 되지 않지만 그 외의 언동은 죄가 되는 것으로 규정한 것이다.

    유신헌법은 격변하는 주변 정세와 남북대화를 뒷받침하기 위한 국력의 조직화를 기하기 위래 제정된 것이라고 박정권은 주장했다. 그러나 일반 국민에게는 박정희씨의 종신집권을 위해 마련된 것으로 인식되어 왔었다. 유신헌법 제 47조는「대통령의 임기는 6년으로 한다」고 규정돼 있을 뿐, 重任이나 連任에 관한 얘기는 없다.

    1975년 5월 13일 선포된 긴급조치 9호는 월남 패망이후의 비상시국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유신헌법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긴급조치 9호 철폐는 바로 개헌으로 통하는 것이었다.  

                                                                                                                                                                   문세광 저격사건 때 대통령 경호실장이었던 공화당 의원 朴鐘圭는 10월 24일 황낙주 신민당 원내총무를 만났다. 황낙주 총무의 시국 수습건의를 경청한 박종규는 곧장 청와대에 들어가 박정희 대통령과 만났다. 황낙주 총무의 시국수습방안을 설명한 박종규는 자신의 의견도 말했다. 

                                                                                                                                                                  - 김영삼의 총재직 가처분 조치는 국민들로부터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신민당 당헌․당규에 따라 자기들끼리 처리하도록 내버려둘 일이지 무엇 때문에 법원이 나서게 됐냐는 것이지요. 국민 모두가 권력의 개입에 의한 장난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9월 하순부터 10월초까지 서독(西獨)서 열린 세계사격연맹총회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랬는데 회의도중 급거 귀국하라는 전보를 받고 부랴부랴 귀국해 보니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크게 실망했습니다.

     우리나라 헌정사에도 없는 의원 제명, 그것도 제1야당 총재를 제명한 일은 결코 온당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신민당 의원들의 의원직 사퇴서를 선별 수리하겠다는 발상은 정치도의적인 면에서 뿐 아니라 집권당의 도량을 의심케하는 비신사적 일입니다. 그런데도 이같은 발상을 한 자들이 한건했다는 식으로 어깨에 힘주고 있으니 국민들이 정부와 여당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애초부터 金永三을 신민당 총재로 인정해주고 대화의 길을 모색해야 했습니다. 

                                                                                                                                            - 나도 처음에는 자네와 같은 생각을 했었어…. 그런데 보고 내용을 보니까 김영삼과 신민당이 폭력에 의한 정부 전복을 기도한다는 거야. 그러니 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어야 마땅하다는 그런 방향으로 가게 된 거야.

                                                                                                                                      - 그렇지 않습니다. 그도 의회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인데 폭력을 우선시키고자 하지는 않을 사람입니다…. 19일에 馬山에 내려가 봤습니다.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과 가처분,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별수리라는 것이 시민들을 자극했습니다. 선별수리론은 더 이상 거론하면 안됩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김영삼을 신민당 총재로 인정하고 대화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사태수습의 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좋아. 내가 김영삼을 만나지…. 황낙주도 자네한테 의뢰를 해왔고, 자네는 김영삼과도 잘 아는 처지이니 어떤 것인지 김영삼을 만나 생각이 어떤 것인지 타진해보게…. 자네한테 나의 결정을 일임했다는 뜻으로 메모를 써줄테니 이를 김영삼에게 제시하고 이야기를 해보게.

                                                                                                                                                                           박정희씨가 쓴 메모의 내용에는「신민당은 앞으로 질서파괴나 폭행을 수반한 불법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다짐을 해야한다. 이 원칙을 수락하면 가처분을 백지화하고 신민당의 김영삼 체제를 인정, 대화한다. 의원직사퇴서는 반려하고 국회를 정상화한다.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하고 구속학생과 제적된 학생의 원상회복을 고려한다.」등이 써 있었다.

 

     10월 25일 박정희씨는 새벽까지도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새벽 2시 경 박종규에게 전화를 했다.『자네 어제 나한테 한 말, 틀림없지…그래 내일은 삽교천에 가야 하고…다녀 와서 또 만나…』    

 

     10월 25일 아침 박종규는 황낙주 신민당 총무를 만나 박정희씨와의 대화를 설명했다. 이날 밤 박종규는 김영삼 총재를 만나 박정희씨와의 요담 내용을 전했다. 긴급조치 9호 철폐와 김총재 체제의 정상화를 강력히 주장한 데 대해 대통령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김총재와 대화를 가지도록 재촉까지 했다는 얘기도 전했다. 이에 김영삼 총재는 긴급조치 9호 철폐와 민주적 개헌 등에 대한 분명한 약속이 있어야 한다는 자신의 지론을 다시 말했다.

     10월 25일 오전 10시경 박정희씨는 청와대에서 김용식(金溶植) 주미대사를 만났다. 김용식 대사는 제 12회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와 있었다. 약 1시간 반 동안 지속된 이 자리에서 改閣문제와 시국에 관한 의견 교환이 있었다. 이날 점심식사에서 박정희씨는『官이 民의 마음을 잡아야 하는데 지난번의 부마사태를 보면 관과 민 사이에 거리감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줬다』면서 멀어진 민심을 인정하였다.

 

     김재규 정보부장은 1969년 3선 개헌당시 보안 사령관이었으며 박정희 씨와 같은 경북 선산(善山)이 고향이며 육사 2기 동기였다. 그는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사람이었으며 미국과의 우호관계를 중시했다. 10월 26일 글라이스틴 대사와 회동한 그는 오후 4시경 차지철 경호실장으로부터 궁정동 연회를 통보받았다. 오랫동안 박정희 암살을 생각해 온 그는 결심을 굳혔다.

 

 

  참고 자료 : 김대중과 분열의 한국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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