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분을 훔치는 사람
도시에 살면서 희뿌연 앙금이 가슴에 켜켜이 내려앉는 삭막함을 다소나마 위로받으려고 빌라 집 앞에 화분을 몇 개 두었다. 소나무, 황금측백, 주목 같은 나무를 심은 분은 덩치가 크다. 철쭉, 영산홍 같은 관엽식물들은 작은 분에서 꿈을 옹알옹알 키우고 있었다.
작년 가을에 탐스런 노란 꽃을 눈 시리게 가득 담은 국화분 서너 개를 새 식구로 맞아들였다. 열심히 물을 주고 정을 듬뿍 쏟았다. 서리가 사뿐히 내리던 쌀쌀한 가을 아침 출근길에 나를 반겨주던 국화분 하나가 없어졌다.
"누가 가져갔구나"
"그 참 몹쓸 사람이네"
이틀 후에 또 하나가 없어졌다. 은근히 부아가 났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할까. CCTV를 돌려봤다. 새벽 5시경에 50대로 보이는 아저씨가 까만 비닐봉지를 가지고 와서 담아가는 모습이 희뿌옇게 보였다. 인쇄를 해서 벽에다 경고를 하려다가 인격을 생각해서 참았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삼천 원짜리 분을 훔쳐가는 사람의 심리를 알 수가 없다.
며칠 지나면서 차츰 마음에서 잊혀 갈 무렵, 이번에는 영산홍 분이 없어졌다. 아름다운 영산홍 꽃을 해마다 아낌없이 보여주는 예쁜 분이다. 10년 이상 키워 온 분인데 너무 쓸쓸하고 허탈하다. 그동안 한 번도 때를 거르지 않고 물을 주고 온갖 정성을 기울여 오면서 가족과 같이 호흡하던 분이었는데, 억울함보다는 미안함이 앞선다. 물론 국화분을 잃었을 때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게으름을 탓할 수밖에 없다.
10년 이상 살가운 정을 흠뻑 주고받으면서 눈빛만 마주쳐도 행복함이 듬뿍 배어 나오는 분이었는데, 제발 죽이지만 말고 잘 키워주기를 바라며 마음을 쓸었다.
올해 4월 중순경에는 초릿대 같이 앙상한 가지만 겨우 생명을 유지하고 있던, 아직 잎도 나지 않아서 봄볕이 그리운 석류분 하나가 또 없어졌다. 몽땅 그 사람 소행일 거다.
안부를 묻고 싶다.
영산홍이 꽃을 피웠는지?
올해 영산홍 꽃잎 색깔은 연분홍이었는지, 진분홍이었는지.
꽃잎이 아옹다옹 예쁘게 다물어진 입으로 어떤 인사를 건네는지.
당신이 훔쳐가더라도 잘만 키워준다면 나는 화분을 채울 테요.
언젠가는 당신의 마음이 예뻐지기를 기다리며 나는 나의 마음을 예쁘게 놓을게요.
그곳에는 같이 호흡하던 국화, 영산홍, 석류분들이 또 다른 아름다움을 잉태해 갈 것이다.
(2007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