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는 화목의 징검다리]
'아름다운 숲'이라는 의미의 벨포레는 충북 증평에 있는 종합 리조트다. 호수를 품은 리조트는 시간에 쫓기며 특별한 이벤트를 꾸미기보다는 천천히 산책로를 걸으며 쉬어가기 좋은 곳이다.
숙소는 취사가 불가능한 구조다. 조식은 리조트에서 제공하지만 점심과 저녁은 밖에서 해결해야 한다. 처음에는 다소 불편하게 느껴졌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가족끼리 함께 이야기할 시간이 많아졌다. 취사 준비와 뒷정리에 매이지 않으니 자연스레 대화가 이어졌고, 오래 묻어두었던 기억들도 하나둘 꺼내 놓게 되었다.
짬짬이 손녀의 재롱을 보며 웃고, 지난 세월을 떠올리며 울기도 했다. 이번 여행의 백미는 바로 그 시간이었다. 자식들이 성장해 각자의 가정을 꾸리기까지도 그동안 아버지에게 서운했던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어쩌면 서로 그런 기회를 만들지 못했던 셈이다.
술기운을 빌려 아이들을 키우며 마음속에 오래 묻어 두었던 후회의 조각들을 하나씩 꺼내놓았다. 큰아들 네댓 살 무렵, 자꾸 보채고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볼기짝을 때린 적이 있었다. 어린아이 마음도 헤아리지 못한 채 화부터 냈던 일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었다. 미안하다고 말하자 아들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 말을 꺼내고 나니 오래 얹혀 있던 체증이 조금 내려가는 듯했다.
만화를 좋아했던 딸이 중학교 때, 밤늦도록 자지 않고 만화책을 읽곤 했다. 몇 번 참다가 어느 날 화를 참지 못하고 책상에 있던 만화책을 몽땅 뺏어 박스에 담았다. 당시 인기가 많았던 '원피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용돈 모아 어렵게 마련했을 소중한 만화책을 아버지에게 뺏겼으니 얼마나 당황했을까. 만화를 좋아했지만 공부를 소홀히 한 적도 없었는데, 당시에는 만화 보느라 늦게 자고, 아침에 겨우 일어나 허겁지겁 학교 가는 것이 보기 싫었다.
가족 모두 모인 자리에서 그 일이 제일 맘에 걸려 후회스럽다고 고백했다. 강압적으로 뺏지 않고 대화로 했어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던 일이었는데, 성급하게 화를 낸 것이 미안했다. 이튿날 동생들이 누나가 밤새도록 울고 속상해하는 모습이 마음에 걸려 만화책을 찾으려고 동네 주변에 폐지 모아 놓은 곳을 뒤지고 다녔다고 한다. 끝내 찾지 못해 지금까지도 아쉬워하고 있었다.
홧김에 만화책을 뺏었지만, 딸아이가 상처받까 봐 돌려 달라고 하면 주려고 회사 사무실 책장 위에 박스채로 보관했다. 시간이 흘러 박스를 볼 때마다 돌려 주려다가 겸연쩍은 마음에 돌려주지 못했다. 그 후로 15년 동안 차일피일 미뤄져 나에게는 마음의 짐이었다. 사무실 이사 갈 때도 꼭 안고 함께했다. 딸이 결혼하고 난 후, 사무실 짐 정리하면서 그동안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던 박스를 열었다. 먼지 쌓인 만화책을 보는 순간, 그동안 딸이 품고 있었을 서운함이 체하듯 명치에 걸렸다. 세월이 흘러 잊었던 상처를 꺼내는 일 같아 눈 질끈 감고 꿀꺽 삼켰다.
20년 전에 있었던 일을 꺼내어 사과하니 가족 모두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딸은 말없이 눈물을 훔쳤다. 아들도 울컥하고 아내와 며느리도 딸 마음을 알아주는 듯 짠한 마음으로 눈시울을 붉힌다. 그 모습을 보니 잊힌 줄 알았던 상처가 우리 가족 마음속 어디엔가 오래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늦게라도 만화책을 전해줄 것을, 아쉬움이 남는다.
한 번의 사과로 딸의 응어리가 다 풀렸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동안 가족들이 말하고 싶었지만 꺼내지 못하고 감춰뒀던 일을 꺼내어 화해의 시간을 가진 것은 늦었지만 다행이다. 일상으로 돌아가서도 그날의 대화가 우리 가족의 오해와 서운함을 조금씩 풀어내며 서로를 더 단단하게 이어주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화해는 상처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다시 다독이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번 여행이 우리 가족에게 그런 징검다리가 되었기를 바란다. 가족들 모두 미안하오. 그리고 사랑하오.
[일시] 2026년 5월 15일~5월 17일(2박 3일)
[장소] 블랙스톤 벨포레(충북 증평)





















'桃溪遊錄' 카테고리의 다른 글
| 必敬齋 (10) | 2026.05.11 |
|---|---|
| 아버님 전 상서 (13) | 2026.04.27 |
| 꿈 꾸는 할아버지 (10) | 2026.03.19 |
| 시설(柹雪)이 내려 않기까지 (11) | 2026.02.26 |
| '한해살이' 밴드 공연 (10) | 2025.1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