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桃溪遊錄

아버님 전 상서

아버님!

 

올해는 절기가 빨라 아버지 산소에도 철쭉이 피었습니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뵌 지 어느덧 스물여덟 해가 지났습니다.
돌아가신 뒤 심었던 철쭉이 기일에 맞춰 피어난 것은, 올해가 처음인 듯합니다.

 

산소 주변에는 제비꽃과 이름 모를 봄꽃들이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습니다. 

 

산소로 향하는 들머리 복숭아밭주인은 여전히 길을 막습니다.
그 길밖에 달리 오갈 수 없음을 알면서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마다 서로 얼굴 붉히지 않으려 애쓰지만, 작은 실랑이는 피하지 못합니다. 
아버지께서 한번 따끔하게 꾸짖어 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입구 저수지에는 물이 가득하고, 낚시꾼들의 모습도 예전 그대로입니다. 
그 풍경 또한 이제는 하나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증손주 도아는 재롱을 부리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보셨다면 얼마나 흐뭇해하셨을지, 그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손녀 수진이는 올해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기쁜 소식을 아버지께 전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그곳에서나마 친구분들께 마음껏 자랑하시길 바랍니다.

 

막내 동호는 오는 11월에 혼사를 정했습니다.
무탈하게 잘 치르고, 평생을 함께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시리라 믿습니다.

 

어머님은 해가 갈수록 무릎과 허리 통증으로 거동이 불편하십니다.
허리를 곧게 펴지 못한 채 유모차에 의지해 다니시지만,
연세 탓이라 여기며 담담히 받아들이고 계십니다.

 

어제 제사 지내면서 "영감, 제발 허리 좀 낫게 해 주소" 라며 중얼거리셨습니다.
다행히 정신은 또렷하셔서 영후와 함께 로컬푸드 일도 무리 없이 이어가고 있습니다.

 

저 역시 육십 대 중반에 접어들어 아직 일을 하고는 있지만,
이제는 은퇴를 준비해야 할 시기임을 느낍니다.

 

둘째 석환이는 기업 법정관리인 자격을 취득해 새로운 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막내 우환이는 작년에 십자인대 부상으로 고생했지만,
지금은 일상생활은 가능할 만큼 회복되었습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 다행입니다.

 

작년에는 멧돼지가 산소를 훼손해 부득이하게 철조망을 둘렀습니다.
다행히 이후로는 별다른 피해가 없습니다.
하지만 산소를 얼마나 더 돌볼 수 있을지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습니다.

 

요즘은 산소를 정리하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 집안이 늘고 있습니다.
시대에 따라 예법도 변한다는 말을 실감합니다.
제가 살아 있는 동안은 지킬 수 있겠지만,
그 이후의 일은 순리에 맡겨야 할 듯합니다.

 

아버지께서 마당에 심었던 모란꽃이 올해는 더욱 탐스럽습니다.
꽃은 여전히, 아버지의 손길을 기억하고 있는 듯합니다.

 

봄바람에 저수지 물결이 잔잔히 흔들립니다.
그 물결 위로, 밭이랑처럼 깊었던 아버지의 주름이 떠오릅니다

 

아버님, 그곳에서는 부디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이곳의 일은 제가 차분히 정리하며 살아가겠습니다.

 

머지않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일시] 2026년 4월 24일

[장소] 경북 청도

 

수야지
옥산
부곡천 돌갓
수야지
미나리 냉이
분홍 조개나물
홀아비 꽃대
조개나물
가막살 나무
버스정류장
수야지

728x90

'桃溪遊錄' 카테고리의 다른 글

必敬齋  (10) 2026.05.11
꿈 꾸는 할아버지  (10) 2026.03.19
시설(柹雪)이 내려 않기까지  (11) 2026.02.26
'한해살이' 밴드 공연  (10) 2025.12.15
설악산 캠핑  (13) 2025.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