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桃溪遊錄

시설(柹雪)이 내려 않기까지

[박사 학위를 축하한다]
 
일가를 이루는 일이 어찌 쉽겠느냐마는, 대학 입학 후 16년 동안 끈기와 인내로 작은 열매 하나를 맺었으니 진심으로 축하한다. 학위를 받는다는 것은 완성의 의미가 아니라 등단(登壇)의 의미다. 이제 사학(史學) 이라는 전문 영역에서 학문을 탐구할 자격을 얻은 것이다.
 
대학 입학 때부터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했던 너를 보며, 독립심과 책임감이 강한 네가 혹여 독단으로 흐르지 않을까 염려가 많았다. 하지만 너는 좌고우면 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걸었다. 학부 시절부터 장학금으로 공부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남다른 의지를 보여주었으니, 아버지는 늘 든든했다.
 
박사과정 수료 후 한국연구재단에서 9천만 원의 연구 장학금을 받았을 때, 결혼을 하고 학업을 이어가겠다는 너의 결정을 존중했던 기억이 난다. 결혼 후에도 매년 연구 장학금과 강의로 생활을 꾸리며 꿋꿋이 공부하던 네 모습이 얼마나 대견했는지 모른다. 결혼한 지도 벌써 7년이 흘렀구나. 부모 마음에 아이 소식을 기다리며 조바심이 나기도 했지만, 너는 학문을 우선에 두고 흔들리지 않았다. 그 시간의 마음고생을 어찌 다 헤아리겠느냐. 사돈께서도 너의 뜻을 이해하고 품어 주셨으니 감사한 일이다.
 
인문학의 길은 오랜 시간을 요구한다. 긴 세월 몸과 마음을 다스려 이룬 성과는 가문의 기쁨이다. 그러나 이는 곶감을 만들기 위해 감 하나를 따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돌이켜 보면 고비마다 많은 시련이 있었다. 런던대학교 유학 다녀올 때도 적지 않은 부담이 있었지만, 주변의 도움과 가족의 이해 속에 잘 마무리한 것도 큰 밑거름이 되었다. 그동안의 시련을 잘 이겨내고 상처 없이 잘 익은 감 하나를 땄다. 이제 그것을 정성껏 깎고, 반그늘에 말리고, 잘 숙성시켜 고운 시설(柹雪)이 내려앉도록 정진해야 할 것이다.
 
밤을 새워 공부하면서도 건강을 위해 수영을 하고, 한강을 도하했던 일도 기억난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았기에 너의 성취는 더욱 값지다. 학위 수여식에서 인문학부 대표 박사로 선정되어 총장께 학위증을 받는 모습을 보며 가슴 뭉클했다. 너에게 보내는  박수는 그 어떤 박수보다 뜨거웠다.
 
지도교수님께 감사 인사를 드렸더니 “멋진 따님을 키워주셔서 오히려 감사합니다”라고 하셨다. 그 말씀에 네 엄마는 울컥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 한마디가 그간의 노고를 모두 보상해 주는 듯했다.
 
딸아!
 
아버지는 네 성정을 잘 안다. 주장을 앞세우기보다 스스로를 더 경계하고, 말하기보다 먼저 들으려 애쓰며, 주변을 아우르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학문적 업적을 낸다는 것은 어른이 되어가는 일이다. 그러나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내가 옳다’를 증명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일지 모른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쌓이지만, 성숙은 저절로 따라오지 않는다. 학문적 성취는 시간의 문제일 수 있으나, 올바른 학자가 되는 일은 태도의 문제다. 그 사실을 잊지 않고 명심하면, 네가 지나간 자리마다 아름다운 향기로 남을 것이다.
아버지는 조용히 응원한다. 
 
[일시] 2026년 2월 25일
[장소] 성균관대학교 인문갬퍼스
 

문과 대표자로 학위증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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