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은 봄 앓이 중]
지리산 무박 종주 길. 나이를 쌓으면서 무박 종주에 대한 두려움도 커진다. 더군다나 비 예보가 있어서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새벽 세 시, 성삼재 들머리에 들어서니 비는 오지 않는데 바람이 많고 온도가 낮다. 가볍게 지리산 봄을 만나러 왔다가 낭패 볼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배낭을 가볍게 꾸리느라 여벌 옷도 준비하지 않아 걱정을 안고 랜턴 불빛에 길을 맡긴다.
노고단에 올랐는데도 땀이 나지 않는다. 산행이 만만치 않겠다. 삼도봉 지나 연하천까지 이어지는 길은 일출을 만나던 구간인데 구름이 많아 아쉬움을 남긴다. 지리 주능선에는 아직 봄이 올똥말똥 기웃거리는 틈으로 바람이 세차다. 능선 길 좌우로 진달래 꽃이 어우러지고 초봄에 피는 얼레지 꽃이 무리 지어 피었다. 새벽에 눈이 내려 꽃잎이 아직 마르지 않은 데다 기온이 낮아 치마를 올리지 않고 축 처져있어 매력을 감춘다. 치마를 살짝 올려야 역사를 이루든지 말든지 할 텐데, 산객은 내내 아쉽다.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조급한 나를 끌고 가는 길. 이른 시간인 6시 40분에 연하천에 도착했지만, 쉬지 않고 걷는다. 연하천 지나자마자 습지대에 깔린 데크 길에는 하얀 카펫을 깐 듯 눈이 내렸다. 7시 50분 벽소령에 도착해서도 아직은 몸이 버텨준다. 그래서 더 서두른다. 야외 테이블에는 바람이 많고 추워서 취사장으로 들어가 선 채로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세석산장으로 이어간다.
'지리산은 언제나 제 모습대로 흐를 뿐'
사람들의 요구나 기대에 따라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 내가 산을 좋아하는 이유다. 만약 지리산이 사람들 마음을 헤아려 변덕스러웠다면 20년 넘게 꾸준하게 지리산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9시 40분 세석산장에 도착했다. 예전 같으면 푹 쉬어가던 곳이었지만 무엇을, 누구를 위해 걷는지도 모르게 집착을 놓지 못하고 장터목으로 향한다. 촛대봉 오르는 길에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처녀치마 꽃을 만나는 행운도 얻었다. 그래서 이 길이 덜 외롭다.
지리 능선 중에 제1 경이라는 연하선경을 건너면서도 조망이 열리지 않아 밋밋하다. 새벽 세시에 산행 시작해서 25km 이상을 한 번도 앉지 않고 걷기만 했더니 체력에 무리가 온다. 그러면서도 앞질러가는 젊은이들을 만나면 쫓기듯 마음이 초조해진다. 시간이 충분한데도 조급한 마음을 떨치지 못하고 서둘게 되는 어리석은 산객이다. 그래서 지혜를 얻으러 지치지 않고 지리산에 든다.
10시 40분 장터목 산장에 도착했다. 앉아서 좀 쉬고 싶어 하늘을 올려다 보아도 마땅치 않다. 햇볕이 드는 곳을 골라 준비해온 전복죽으로 이른 점심을 해결했다. 26km를 쉬지 않고 걸었으니 천천히 쉬어가리라 다짐해도, 멈추지 못하는 관성은 여전하다.
몇 년 전부터 제석봉 오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다. 제석봉의 상징이었던 고사목이 급격히 사라져 이제는 몇 그루 남지 않았다. 성성하게 자라 모진 눈보라를 견뎌오다 고사목이 된 것도 안타까운 일인데, 고사목마저 사라지게 되니 자연의 섭리를 어찌 안쓰러워만 하겠는가. 산객의 안타까운 마음을 헤아리려는 듯 고사목 위로 고래를 닮은 구름이 유유히 떠다닌다. 이 또한 자연의 풍경이니 감사하게 담는다.
천왕봉 오르는 길. 음달에 눈이 남아있다. 지리산 정상부에는 진달래가 꽃봉오리를 달고 아직 봄을 기다리고 있다. 연하천 능선에서 봤을 때는 천왕봉 주변에 눈이 제법 있었는데, 기온이 오르면서 거의 녹았다. 12시에 천왕봉에 도착하니 인증숏을 찍으려 기다리는 사람들이 백 명 넘게 줄을 서 있다. 아침보다 바람이 순해져서 다행이지만 줄을 서서 기다릴 마음의 여유가 없어 하산길에 든다.
중산리 가파른 돌계단 길이 예전 같지 않다. 무릎에 무리가 와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다. 속상하다. 25km 까지는 견딜만했는데, 그 이상은 체력적 한계를 느끼게 된다. 장거리 산행을 얼마나 더 이어갈 수 있을까.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 생각하니 씁쓸하다. 산행 속도를 조금 늦추면 버텨낼 수 있을까. 스스로 위로하며 쉽게 포기하기보다는 희망을 다져본다.
법계사 지나면서부터 산철쭉이 피기 시작한다. 지리산 정상부의 겨울을 지나 다시 봄, 그리고 여름을 준비한다. 길가에 얼레지 꽃도 기온이 오르니 치마를 들어 올려 자태를 뽐낸다. 제 잘난 맛에 치마를 너무 많이 올린 꽃들은 오히려 미워 보인다.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함을 다시 새긴다.
오후 2시 30분 중산리에 도착하여 긴 여정을 무탈하게 마무리한다. 지리산은 겨울과 봄과 여름이 뒤엉킨 채, 깊은 봄 앓이 중이다. 나의 지리산 앓이도 얼마간 더 이어질 것이다.
[산행 일시] 2026년 5월 1일
[산행 경로] 성삼재 - 노고단 - 세석대피소 - 장터목 - 천왕봉 - 중산리(33km)
[산행 시간] 11시간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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