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
지은이 : 김승옥
1941년 일본 오사카 출생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 졸업
세종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역임
(저서) ‘생명연습’, ‘건’, ‘서울, 1964년 겨울’ 등 다수
펴낸곳 : 미르북컴퍼니
발행일 : 2021년 3월 1일
[김승옥 단편집 ‘무진기행’을 읽고]
김승옥은 1960년대를 대표하는 소설가다. 그의 대표작 ‘무진기행’은 예전에 한 번 읽었던 기억만 희미하게 남아있다. 그의 대표 단편 12편을 간추려 ‘무진기행’이라는 단편집을 발간하였다. 책장에 오래 꽂혀 있던 이름이다. 그의 문체는 1960년대를 아우르지만, 감정의 질감은 지금 우리의 속도와 낯설지 않다.
본 서평에서 단편집에 실린 12편을 모두 언급하기는 부담이 된다. 그의 대표작 서너 편 펼쳐서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작가의 세계관과 철학을 통찰함으로써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잠재되어 있던 감수성을 회복하고 사랑과 상실에 대한 김승옥 특유의 문체를 깊이 새겨 우리 시대가 잊고 지냈던 감성을 탐구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단편소설 12편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나’이다. 그런 점에서 읽다 보면 어느새 자전적 소설인가 착각할 정도로 철저하게 ‘나’를 중심으로 소설을 이끌어가는 점이 특징이다. 이런 소설형식의 특징은 일본소설에서 잘 나타난다.
<무진기행>
단편집의 중심에는 역시 「무진기행」이 있다.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소설을 다시 잡아본 느낌은 안개 가득한 무진의 포구에 독자가 직접 발을 딛고 서 있는 느낌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성공한 삶을 사는 나는 윤희중이다. 직장에서 잠시 짬이 생겨 고향 무진에서 한여름의 짙은 안개와 마주하며 자신이 정말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들여다보는 이야기다.
무진의 안개는 시야를 가리지만, 오히려 마음속 깊이를 더 드러나게 만드는 상징처럼 작동한다. 무진에서 머무는 동안 교사로 근무하고 있는 하인숙을 만난다. 그는 그녀의 노래에서 잊고 있던 감정의 원형을 건드려 갈등한다. 하지만 그는 결국 도시로 되돌아간다. 소설에서는 그 결말이 씁쓸하게 묘사되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욕망과 한계 사이에서 현실적인 면을 무시하지 못한다. 우리의 삶의 방향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윤희중의 사랑 방정식은 X다. 독자가 작가의 사랑에 대한 감정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일까. 무진은 윤희중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무진은 윤희중의 사랑 고백에 대한 무대를 제공했다. 현실의 한계를 외면하지 못하고 고민하는 샐러리맨의 갈등이 잘 표현된 작품이다. 굳은 결심으로 현실에 부대끼면서도 진실을 만나면 잠시 흔들리다가도 결국에는 감당할 용기가 없어 현실로 돌아서곤 한다.
<서울 1964년 겨울>
「서울 1964년 겨울」은 1960년대 서울을 배경으로, 도시가 인간에게 남기는 고독과 소외를 섬세하게 포착한 작품이다. 술집에서 우연히 만난 ‘나’, ‘안’, ‘사내’라는 세 인물은 하룻밤 동안 함께 어울리지만, 그들의 관계는 겉으로만 이어질 뿐 깊은 연결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다. 말은 오가지만 마음은 닿지 않고, 몸은 가까이 있어도 마음은 여전히 멀리 있어 겉도는 느낌이 작품 전체를 감싼다.
특히 사내가 다음 날 특별한 사건 없이 죽음을 맞는 장면은 서울이라는 도시의 냉정함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사내는 끝내 상실의 아픔을 견뎌내지 못하고 자신마저 상실의 늪으로 빠져버리는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그의 죽음이 경건하게 다뤄지지 않고 담담히 지나가는 방식은 ‘도시의 무심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타인의 비극이 빠르게 잊히는 삶, 따뜻함보다 냉기가 먼저 스며드는 인간관계가 이 소설의 핵심 주제다.
작가는 군더더기 없는 문장과 건조한 분위기로 도시인의 실존적 고독을 극대화한다. 그 시대의 서울이었지만, 지금의 도시에서도 반복되는 정서라 더욱 공감하게 된다. 작품을 덮고 나면, 겨울밤 골목에 남은 차가운 바람처럼 묵직한 여운이 오래 남는다.
<생명연습>
신춘문예 당선작인 「생명연습」은 김승옥 문학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작품이다. 화자인 ‘나’는 우연히 마주친 청년의 모습과 교수의 ‘극기(克己)’라는 말에서 출발해 자신의 과거인 전쟁, 가족의 해체, 상처와 성장을 되짚는다.
이어지는 회상 속에서는, 6·25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적 비극 이후 피란과 귀환, 그리고 그로 인한 가족의 해체와 정신적 상흔이 드러난다. 아버지가 사라지고, 어머니가 자식들을 부양하며 어렵게 살아가던 과거, 그 속에서 성장한 화자와 가족의 고통이 배경으로 제시된다.
전쟁과 사회적 상실 속에서 “자기만의 세계”(자존, 자의식)를 세우려는 욕망과 동시에 그 시도에서 비롯되는 불안, 죄책감, 자기 분열을 탐구한다. 특히 “극기”는 자기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과도한 절제, 자기 단련 혹은 자기 침잠의 상징처럼 보인다.
소설 속 ‘극기’는 단순한 덕목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확보하려는 절박한 행위다. 그러나 그 ‘극기’는 때론 극단적이며, 자기 파괴적이기도 하다. 예컨대, 어떤 인물은 종교적 신념에 따라 남근을 버리고, 또 다른 인물은 과거의 고통을 애써 지우려 한다. 이런 극단적 자기 단련은 오히려 존재의 균열을 드러낸다.
이 작품은 전쟁 직후 사회를 살아가는 청년의 정체성 혼란을 날카롭게 드러내며, 한국 현대문학이 이후 내면의식과 심리적 탐구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맺음말>
김승옥 단편집에 실린 12편의 단편은 대부분 1960년대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현시대에도 별 거부감 없이 공감된다. ‘성공했지만 마음은 공허한 사람’, ‘도시의 속도에 지친 사람’, ‘관계에 엮여 있지만, 감정을 숨기는 사람’. 이런 모습들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풍경이다. 그의 문장은 세월이 지나도 낡지 않으며, 시대를 타지 않는다.
김승옥 소설의 일관된 주제는 사랑과 상실의 문제이다. <생명연습>에서 형이 외도한 어머니를 살해하려는 의도는 어머니를 상실하지 않기 위한 수단으로 비윤리적인 행위를 계획한다. 또한, 한 교수가 영국 유학을 위하여 정순과의 사랑에 대한 상실이 두려워 그녀를 범하고 일상적인 사건으로 만들어 상실에 대한 보편적 자기 위안을 장치한다.
<건>에서 소년에게 형의 제안으로부터 비롯된 윤희에 대한 윤간 모의는 윤희를 훼손하는 일이 아니라 형을 망가뜨리는 일로 다가온다. 소년은 끊임없이 그녀의 마음이 자신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형을 향한 것인지에 대해 불안해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형을 물리치기로 마음을 먹고 윤희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고 그녀를 완전히 상실하게 될지도 모를 일에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결국, 윤간 모의의 성사는 자신에 대한 윤희의 궁극적인 사랑을 얻기 위한, 그녀의 ‘몸’만을 원하는 형과 구분 짓기 위한 일종의 모험이다.
<무진기행>에서도 윤희중이 무진에서의 자신의 상실과 하인숙과의 사랑에 대한 현실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사라짐으로써 상실을 선택한다. 그것이 그의 사랑 방정식이다.
김승옥 단편집 <무진기행>에 게재된 12편의 작품 대부분 사랑과 상실에 대한 작가의 끊임없는 고민을 엿볼 수 있다. 이번 작품을 통하여 김승옥이라는 작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문체는 세련되고 시대를 지나도 유행을 타지 않고 담백하다. 읽고 나면 묘한 여운을 남기는 것도 매력이다. 김승옥을 처음 접하는 독자나 소설을 공부하는 예비작가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2025. 12.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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