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비 온 뒤 무지개 같은 것이다. 젊었을 때, 삶은 도전이며 긍정과 부정이 반반씩 나눠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긍정으로 추가 기울면 긍정이 되고, 부정으로 추가 기울면 부정이 된다고 단정했다. 그런데 나이를 채워가면서 삶은 부정보다는 긍정의 요소가 훨씬 많다고 생각된다. 어쩌면 삶 자체가 긍정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필요할 때, 긍정을 꺼내다가 생채기가 나거나 떨어뜨리면 부정이 되는 건 아닐까. 하지만 우리는 긍정보다는 부정이 많다고 느낀다. 그것은 욕심이 과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긍정이라는 씨톨을 키우다가 욕심이 과하게 되면 부정으로 변해 버리는 이치를 간과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들이 캠핑 가자며 날 잡으라 한다. 사실 개인적으로 캠핑을 불편해하며 좋아하지 않는다. 막히는 도로를 지루하게 오가는 일, 갖은 장비들을 마련하는 일, 많은 장비를 보관하는 일, 어설픈 조리 도구로 요리하는 일, 불편하게 설거지하는 일, 물이 시원찮으면 샤워를 하지 못하고 찜찜하게 보내는 일, 무거운 텐트를 치고 걷는 일, 여름에는 날파리나 모기와 싸우는 일, 겨울에는 추위에 떠는 일, 불편한 잠을 구겨서 청하는 일 등 어느 것 하나 긍정적인 요소가 없다.
청평호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의 캠핑장에 도착하자마자 타프를 치려고 펼쳤더니 쉽지 않다. 아들도 처음 해보는 거라서 익숙지 않단다. 하는 수없이 포기하고 텐트만 쳤다. 텐트가 비에 젖으면 무겁고 많이 불편해서 걱정이지만, 내일 응원군이 오면 알아서 해결하라고 제쳐뒀다. 늦은 점심 겸 저녁을 준비하려고 버너에 불을 피우고 준비해 온 부대찌개 밀키트의 육수와 소스, 재료들을 몽땅 냄비에 부었다. 뽀글뽀글 맛있게 끓여가던 중 버너와 냄비의 밸런스가 무너져 쏟아졌다. 허무한 개그를 보는 듯 허탈했다. 부대찌개를 포기하고 라면을 끓이려 물을 붓고 수프를 넣어서 끓이던 중, 또다시 쏟아졌다. 허기진 배는 더 고팠다. 초보 캠퍼의 어설픈 비애다.
해가 지고 밤이 어둑어둑 모여들어 모닥불을 피웠다. 낮에는 물멍, 밤에는 불멍에 고기를 구워가며 술을 곁들이니 취기가 오른다. 술이 거나하게 되었을 때, 취기를 빌어 총각 때 연애 얘기를 꺼냈다. 아내한테 하지 않았던 이야기라 아들과 아내가 분위기 맞춰가며 넙죽넙죽 받아주니 신이 나서 고백하듯 얘기했다. 술이 나를 끌고 농락할 때쯤 더 견디지 못해 텐트 안에 들어가 고꾸라져 잠을 청했다. 아내와 아들은 한참을 더 불멍을 즐기며 모닥불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호수를 바라보다가 비탈에 뾰족뾰족 고개를 든 고사리를 발견했다. 큰 기대 없이 가까이 갔는데 제법 많았다. 똑똑 끊어지는 소리가 '비발디의 사계 중 봄'과 같이 경쾌한 리듬에 힐링이 된다. 고사리도 얻고 힐링도 얻었으니 일거양득이다. 갈비 구워 아침식사 거나하게 해결하고 호숫가로 산책에 나섰더니 들꽃들이 반긴다. 산책하고 돌아오는 길에 돌미나리를 발견했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깨끗해서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제법 많은 양을 뜯었다.
부정은 긍정을 위한 장작 같은 것. 불편함 투성이의 캠핑을 감행해서 장작을 태워 모닥불을 얻고 불멍에 깊이 잠들었던 연애 얘기를 꺼냈더니 다음에 가면 더 깊은 얘기가 나올 수 있을 거라며 또 가자며 훈수를 둔다. 삶에는 긍정만이 존재한다. 내 앞에 닥친 모든 부정들은 긍정을 위한 디딤돌이라는 것을 깨닫는 캠핑이었다. 결국 부정의 마음으로 가득 찼던 캠핑은 긍정을 깨닫게 했으니 삶은 비 온 뒤의 무지개를 닮았다.
[일 시] 2025년 4월 18일
[장 소] 청평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