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기일을 맞아 서울에서 이른 아침을 재촉해 숨 쉬는 소리도 크게 들릴 것 같은 조용한 땡감골에 도착하니 어머니 혼자 불편한 몸을 겨우 추스르며 조기, 상어, 각종 나물들을 펼쳐놓고 제물을 다듬는다. 허리 수술 하고부터는 거동이 많이 불편해져서 구시렁거림이 많아졌다. 거기다 무릎까지 아파 짜증이 늘어 한숨 소리가 커졌지만, 순리로 받아들이려 마음을 다독이는 편이다.
어머니를 도와 조기와 오징어를 찌고 상어를 삶았다. 아내는 전을 부치고 나물을 볶았다. 대충 정리해 놓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봄비가 올랑말랑 뒤척인다. 지난달 산불이 휩쓸었을 때, 다행히 땡감골은 산불을 피했지만, 가뭄이 지속되는 한 염려를 지울 수 없기에 시원하게 비 좀 내려 달라고 아버지 산소에 들러 염원을 전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제비꽃이 피어서 반긴다. 제비꽃이 시들기 전에 비를 내려 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산을 내려오는 발걸음이 가볍다. 휴일을 맞은 저수지에는 비가 오지 말기를 바라는 낚시꾼들이 성시를 이룬다. 산을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그 모양이 달라지는 이치다.
오후에 영후와 그의 아내가 합류하여 제사 준비가 거의 마무리되었을 때쯤, 아들 내외와 손녀가 도착했다. 손녀가 감기 기운이 있어 불편한데도 증조할머니와의 상봉을 강행했다. 지난 설에도 감기 증세가 심해 증조할머니와의 상봉을 미뤘던 까닭으로 다소 무리가 있었지만 증손을 기다리는 할머니와 감격스러운 첫 만남이 이뤄졌다. 동영상을 통해서 증손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던 터라 첫 만남이지만 어색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손녀는 처음 보는 할머니를 경계하며 손을 밀친다. 다행히 손녀는 몸이 불편한데도 할머니가 자지러지게 들었다 놨다 갖은 재롱을 부린다. 증조할머니도 한동안 증손의 시선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할머니도 손녀에게 재롱을 부리며 첫상봉을 맘껏 즐겼다.
산소에 다녀오니 부산에 계시는 작은아버지께서 와 계셨다. 올해 86세인데, 아직 정정한 편이어서 형님 기일에 참석하신 것이다. 이어서 대산에 사시는 83세 되신 고모님께서 오셨다. 곧이어 큰 동생 내외와 막냇동생 내외도 당도했다. 땡감골이 명절 분위기로 싱글거리며 왁자지껄해졌다. 고모님께서 앉자마자 재치 있는 입담으로 위트를 날린다. 동네 사람들에게 친정 간다고 했더니 '팔십 넘어 친정은 무슨 친정이고' 하길래 '너거는 갈 친정이 없제' 라며 넉살을 부리고 왔단다. 작은 아버지께 숙모님과 결혼한 사연을 여쭸더니, 서두에 총각 때 유부녀와 바람피운 이야기가 불쑥 나왔다.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여서 좌중은 귀를 쫑긋했다. 연세 9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으니 세상 감추고 자시고 할 게 없으신가 보다. 고모님께 결혼과 시집 살았던 이야기를 여쭸더니 '말을 말아라'며 고개를 흔든다. 고모님은 시집살이에 대한 남다른 애환이 있었으며, 남편과의 사이가 만족스럽지 못했던 마음을 내비친다. 지금이라도 시집 한 번 더 갈 수 있으면 가봤으면 좋겠다며 너스레 떨며 좌중을 웃긴다.
오후 늦은 시간에 마당에 있는 솥에 돼지 수육을 앉혔다. 파, 양파, 엄나무, 사과, 소주 등을 넣고 삶았다. 가스레인지에 삶으면 간단해서 좋지만, 불멍도 때릴 겸 마당에서 삶으니 잔치 분위기도 나고 좋다. 몇 해 전부터 새벽 0시를 기점으로 지내던 제사를 제군들 일상의 편의를 고려하여 저녁 9시경에 지낸다. 제사 지낼 준비를 하고 있으니 부산에 계시는 재종 형님 내외와 그 손주들이 왔다. 조용한 땡감골에 아이들까지 합세하여 제사 분위기보다는 잔치 분위기다.
제사에 참석한 사람이 아이들 합쳐서 18명이다. 이내 엄숙한 분위기를 잡아 독축을 하고 제사 지내고 음복을 했다. 음복 술잔에 좌중은 시끌벅적했다. 잠들었던 손녀가 깨서는 칭얼거리며 보챈다. 부산에 계시는 작은 아버지와 재종 형님 내외는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길을 떠났다. 이윽고 동생들도 마무리하기 바쁘게 밤 길을 재촉한다. 영후 내외도 집에 돌아가고 시끌벅적하던 집이 조용해졌다. 고모님은 밤이 늦어 주무시고 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곤한 잠을 청하고 새벽에 일어나니 아들 내외와 손녀가 사라졌다. 어젯밤에 손녀가 잠을 자지 못하여 보채고 칭얼거려서 새벽 12시 30분에 서울로 출발했다. 어머니께서 아침에 일어나 어련히 손녀가 있겠거니 생각하고 열린 방문 틈으로 방을 들여다보니 방이 텅 비어있다. 깜짝 놀라서 손녀를 찾았다. 아침에 증손녀 한 번 더 보겠다는 마음에 살짝 들뜬 기분이었는데 손녀가 없어서 많이 아쉬워했다. 어제 함께했던 손녀가 자고 일어나니 사라져서 꼭 꿈인양 허탈해했다.
[일 시] 2025년 4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