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이 단순한 통신 수단이었을 때는 곁에 없어도 조금 불편한 정도였는데, 작금의 현실에서는 핸드폰을 손에서 놓는 순간 꼼짝달싹할 수 없는 미아가 된다. 편리하게 발전한다는 것이 족쇄가 되어가고 있으니 인류 궁극의 지향점이 어딘지 회의감이 들 때가 많다. 행복하게 살겠다며 갖은 애를 쓰지만, 자꾸만 불행으로 가는 게 아닐까 더듬어본다.
며칠 전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순간 아찔했다. 인연을 맺은 지 만 4년 동안 곡절이야 있었지만 그냥저냥 잘 지내왔는데 이번에는 느낌이 달랐다. 야외활동이 워낙 많다 보니까 잘 떨어뜨리는 편이다. 그래서 분실 파손 보험에 가입해서 그동안 세 번에 걸쳐 액정 교체, 카레라 렌즈 교체 등 보상을 받은 터라 이제는 보험을 통한 보상을 할 수가 없어서 순수 자부담으로 액정 교체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떨어뜨린 순간에는 액정이 반 정도 남아 있었는데 조금 지나니까 아주 먹통이 되었다. 더 이상 핸드폰에 있는 정보에 접근이 불가능했다. 처음 얼마간은 무덤덤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문제가 심각해진다. 세상과 단절된 상태로 깊은 나락으로 빠져드는 느낌이다. 가까운 가족들과도 소통을 할 수 없는 깜깜한 절벽에 갇혔다. 다행히 집에서 떨어뜨려서 가족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밖에서 활동하다가 핸드폰에 문제가 생겼다면 소통이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혼란을 감당해야 할까 생각하니 아찔하다. 더 큰 문제는 다음날 출근해서 약속되어 있던 미팅을 이어갈 수 없는 상황이다. 하는 수 없이 공기계 폰을 꺼내 유심을 갈아 끼고 카카오톡에 선을 닿아 최소한의 소통창을 열어서 간신히 업무 공백을 메웠다.
핸드폰 수리 비용 생각하면 이참에 새것으로 교체하라며 아이들이 최신 폰을 선물해 줬다. A/S센터에 들러서 기존 폰에 있는 정보를 새 폰으로 옮겨달라고 요청했다. 액정만 깨졌다면 연락처 등 일부 정보를 옮길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보드에까지 문제가 생겨서 기존 폰의 정보에 접근할 수가 없다는 결론이었다. 수년간 쌓아왔던 모든 정보들을 잃어버린 미아가 되었으니 막막했다.
카톡 창을 열어 친구나 지인들께 문자 보낼 수 있는 곳에 전화번호를 요청했다. 문자 서비스받기가 곤란한 친척 어른들은 동생들에게 부탁해서 전화번호를 복원했다. 동창회나 동아리 같은 단체 톡방을 운영하는 곳에는 대표에게 문자를 보내 협조받았다. 비즈니스 관계로 얽혀 있는 인맥들에게는 칠칠치 못하게 문자 보내기가 머쓱해서 보내지 않았다. 다행히 명함 어플에 흔적이 남아 있는 것들을 찾아서 일부 복구했다. 평소에 인터넷 플랫폼의 백업 시스템을 이용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으니 황망하게 당한 셈이다.
이번 일을 당하고 몇 가지 깨우침과 아쉬움을 남겼다. 카톡에 전화번호를 요청했을 때, 바로 전화를 거는 사람들과 즉각 문자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다른 전화를 이용하여 보이스피싱이 아닐까 확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가 잘못 살아온 것일까. 아니면 사회 현실이 불신의 벽을 키워온 것일까. 양면이 다 있을 것이다. 미아가 된 상태에서 간신히 사회로 돌아와 보니 핸드폰을 잃어버리거나 파손된다는 일이 예사로운 일이 아님을 새삼 깨닫는다.
그동안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던 무수한 자료들을 몽땅 날린 것에는 아쉬움이 많다. 간간히 습작했던 메모와 톡방이나 쪽지에 담겨 있던 중요한 메시지를 복원하지 못한 것은 많이 답답하다. 대신에 톡방에 남아 있던 수많은 대화찌꺼기들을 일소에 청소한 것은 시원하기까지 하다. 카톡방을 정리하면서 그동안 감정이 썩 좋지 않은 관계였던 사람들을 지워냄으로써 인연의 고리를 아주 끊을 수 있었던 것은 마음을 새롭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헷갈려서 잘못 지워버린 사람은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인연이 끊겼다. 상대방이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영원한 이별이다. 꼭 내가 먼저 연락해야만 이어지는 인연이라면 마음을 내려놓아도 되지 않을까 자위한다.
새 폰을 들고 다시 이어갈 인연을 생각해 본다. 만난다는 것은 이미 헤어짐의 발자국을 디딛는 것이다. 하지만 함께 동행하는 날까지 대과 없이 잘 지내다가 아쉬움만 남긴 채 헤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창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