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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동행
山 行

삼각산

by 桃溪도계 2024.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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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밑에 산문을 여니 아버지가 생각난다. 유년시절 친구들은 방학을 맞아 자치기, 깡통차기, 얼음 썰매 타기, 딱지 치며 놀기 바쁜데 나는 아버지를 따라 추운 겨울산을 올라 삭정이, 솔가지 등 땔감을 구하던 그 시절. 어린 나이에 나무를 한들 얼마나 하겠냐만은 아버지는 맏아들을 데리고 산에 오르는 일이 든든했던가 보다.

깜깜한 발자국을 따라 새벽을 깨우니 새록새록 단잠에 들었던 손녀가 기지개를 켠다. 어느덧 손녀는 내 가슴속에 더 진한 인연의 향기로 스며든다. 아버지가 보고 싶어 지는 묘한 이 감정선은 무엇일까. 설날에 산소를 찾아 아버지께 고하고 무탈하게 잘 자라도록 보살핌을 구해야겠다.

준비 없이 길을 나선 터라 발걸음이 더듬거린다. 다행스럽게 손전등을 비춰주는 나이가 꽤 있어 보이는 할머니가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찬송가를 가볍게 따라 부르며 약수터까지 길안내를 해주시니 세상이 밝다. 일출을 맞으려고 서둘렀지만, 향로봉 정상에 서니 해가 먼저 손을 내민다.

아버지!
또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당신의 향기가 그립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추운 겨울 산에서 하얗게 식은 도시락을 꺼내 점심을 먹으면 땀이 식은 등줄기에 굵은  한기가 선명하게 그려지던 일이 잊히지 않습니다. 한기를 피하려 서둘러 나뭇짐을 지고 내려오는 길. 눈이 깔려 있어 미끄러운 길을 까맣게 닳은 고무신을 신고 내리막 길을 내려오면 정강이가 달달 떨렸습니다.

삼각산 비봉 능선에도 눈이 하얗게 깔려 있다. 수없이 다녔던 길이지만 세밑에 눈 길을 걷는 마음에는 자꾸 아버지와 손녀가 오버랩된다. 자식을 낳았을 때는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다. 아버지가 내려주신 무언의 하명을 무사히 완수했다는 이 뿌듯함이 마냥 좋다. 아버지에게서 피를 받아 손녀에게까지 연결한 안도감은 겨울방학 숙제를 끝낸 철부지 1학년이 개학을 기다리는 자신감이다.

문수봉에 오르니 자신감이 높아진 만큼 해가 커졌다. 이럴 때일수록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길을 여쭤야 한다. 난도가 높은 의상능선을 하산길로 정했다. 무사하게 내려가기를 다짐하며 조심했지만 발목을 삐끗했다.

설날에 차례를 마치고 아버지 산소 가는 길. 삼각산에서 삐끗했던 발목이 뜨끔하다. 아무 일 없었던 듯 쉽게 좋아질 것 같지는 않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조금 더 겸손함을 배우라는 교훈으로 삼자. 아버지 산소에 엎드려 조용히 감사함을 전한다. 손녀가 건강하고 웃으며 잘 자랄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시기를...

[산행 일시] 2024년 2월 8일
[산행 경로] 불광중학교 - 향로봉 - 비봉 - 문수봉 - 의상능선 - 북한산성 탐방센터(10km)
[산행 시간] 4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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