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山 行

지리산(15)

반응형

열다섯 번째 지리산 종주 길.
오직 지리산에 올라야만 한다는 신념으로 겁 없이 덤볐던 첫 길을 기억한다. 분명 내게는 부족함이 있었다.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지리산에 올랐다. 고개마다 구비마다 만나는 꽃들과 눈 맞추고 나무와 인사하고 풀벌레 소리에 귀를 세우고 새소리에 정을 나누고 바람소리에 마음을 열어가며 걸어온 길. 웬만큼 채웠으리라 더듬어보지만 아무것도 잡히는 게 없다.

친구가 지리산 첫 종주 길에 나섰다. 아직 준비가 모자라지만 마음이 앞선 그는 어떤 부족함을 채우려 했을까. 깜깜한 밤을 밝혀 지리에 발을 디디며 가슴이 얼마나 벅찼을지 짐작이 간다. 하늘에는 북두칠성, 카시오페아, 오리온 별자리들이 초롱초롱 걸려있다. 거친 호흡을 몰아가며 노고단을 지나 반야봉을 내려오던 길에 여명이 열린다. 까만 밤에 지퍼를 열듯 장막을 걷으니 붉은 아침이 돋는다. 미처 도망가지 못하고 꼬리가 잡힌 구름과 어울린 삼도봉에서 맞은 일출은 거칠어진 숨소리 속으로 말문을 말아 넣는다.

지친 라면을 꺼내어 연하천 대피소에서 늦은 아침을 끓이니 보글보글 군침이 절로 돋는다. 간 밤에 버스에서 자는 둥 마는 둥 새벽에 눈을 비비며 산 길에 들어 때늦은 아침을 맞았으니 허기를 채우기가 급하다. 해발 1,400 고지에서의 라면과 김치의 조우는 가히 천하 일미다. 갈 길이 멀어 서둘러 자리를 털고 벽소령대피소 까지 가는 길은 대체로 평탄한 길이어서 부담이 적다. 그렇지만 지리산 종주 길은 지구력을 요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피로가 쌓이면 발이 무거워져 작은 돌멩이 하나 넘는데도 부담이 가중된다.

벽소령 대피소를 지나 영신봉 계단 길을 버텨내며 세석에 도착하니 친구의 무릎이 조금 불편해 보인다. 일단 오늘 산행을 마무리했다는 안도감에 피로가 몰려온다. 계곡 물에 간단하게 땀을 씻어내고 준비해 온 돼지고기 두루치기 재료를 코펠에 넣고 어설픈 셰프 흉내를 낸다. 삼도봉에서 만났던 힘찬 해가 에너지를 소진하고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간에 만찬으로 배를 채우고 숙소에 들어 코를 골아댄다. 친구는 밤을 붙잡고 잠을 설친다. 그래도 새벽은 온다.

새벽 세시에 밤을 깨워 다시 나서는 길. 친구의 상태가 편하지 않다. 무릎 보호대를 건네고 스틱을 나눠가며 장터목대피소를 향해가는 길에서 고민이 길어졌으리라. 꼭 완주해야만 하는 자신의 숙명을 되뇌며 다짐한다. 장터목대피소에서 김치찌개를 끓여 먹는 둥 마는 둥 끼니를 때우고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 제석봉 전망대에서 일출을 맞는다. 지치고 아픈 다리였지만 운해를 배경으로 떠오르는 해를 보며 잠시 통증을 잊는다.

드디어 천왕봉.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나섰던 지리산 종주 길.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 산은 부족함을 채워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천왕봉 정상에서 어렴풋이 깨닫는다. 유태인 속담에 성공의 비결은 부족함이라 했다. 나에게 부족함이 있다는 것은 성공을 위한 디딤돌인 것이다. 굳이 부족함을 채우려 애쓰기보다는 부족한 대로 살아가자. 행복도 부족함에서 싹을 틔운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천왕봉과 작별하고 중산리로 하산하는 길은 지루하고 힘들다. 불편한 영광 친구는 가파른 하산 길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렇지만 끝까지 잘 버텨내어 지리산 첫 종주를 성공했으니 격려하고 응원한다. 아울러 지리산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또 하나 깨달았으니 본전은 건진 셈이다. 긴 시간 함께하며 마음과 정성을 모아 전우애로 동행의 기쁨을 나눠준 영포 친구에게도 감사함을 전한다.

[산행 일시] 2022년 10월 15일~16일
[산행 경로] 성삼재 - 노고단 - 반야봉 - 삼도봉 - 연하천 - 벽소령 - 세석산장 - 장터목 - 제석봉 - 천왕봉 - 중산리(34.5km)
[산행 시간] 20시간(숙박 제외)

산수국
구절초
과남풀
산오이풀
천왕봉
참취

728x90

'山 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각산 숨은벽  (62) 2022.10.30
삼각산 비봉, 의상능선  (63) 2022.10.24
설악산 흘림골  (84) 2022.10.09
설악산 공룡능선  (40) 2022.10.03
삼각산 파랑새 능선  (93) 2022.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