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친구들 서너 명 합을 맞추고 당진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대호 친구의 임지를 따라 여행을 떠난다.
오늘 이 순간에 함께 숨을 쉬고 함께 웃어야만이 살아있음의 유일한 증거라는 평범한 진리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한 달에 한 번은 만나는 편인데도 만날 때마다 수다가 늘어져 오가는 길이 지겨울 틈이 없다.
당진에 도착하자마자 신평양조장에 들렀다.
바이러스 시국이라 불편함이 많지만 최소한의 개방을 하고 손님을 맞는 100년 양조장의 자신감 넘치는 기품을 느끼며 견학을 한다. 술 익는 향기가 톡톡 가슴에 채워지면 저절로 입이 귀에 걸려 인간 본성의 묘한 미소를 담는다.
막걸리 세 박스를 차에 실으니 겨울을 준비하는 달동네 노부부의 굽어진 허리 너머로 연탄이 가득 차 있던 연탄창고처럼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운 연상이다.
왜목항에 들러 싱싱한 방어회를 안주삼아 소주, 막걸리, 맥주를 섞어가며 취기를 돋운다.
술과 수다를 섞으니 시간이 가는지 오는지 분간이 힘들다.
술에 취한 바람이 분다.
아직 가을이 채 가지도 않았는데 한기를 가득 담은 바람이 태풍처럼 분다.
갯가에 친 텐트가 바람에 통째로 날아가는데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을 보니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사람을 보호해야 하는 텐트인데 오히려 사람이 텐트를 보호해야 하는 상황이니 바람이 술에 단단히 취했다.
뭍바람과 바닷바람의 경계에서 뭍바람의 향기를 듣느냐 바닷바람의 향기를 취하느냐는 마음먹기 달렸다.
세상 이치도 이와 다르지 않아 행복과 불행도 마음먹기 달렸음은 인지의 사실이다.
술 취한 바람은 뭍바람이든 바닷바람이든 경계가 모호한 바람이다.
하지만 술에 취했어도 파도를 몰고 오는 일은 게을리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는 수없이 다가오는 인생의 기회와 닮아있다.
파도가 멈추지 않는 한 기회는 또 온다.
술에 취해서도 기회는 온다.
파도처럼...
서산 벌천포항 가는 길에 염전에 들렀다. 그리 크지 않는 염전에는 해가 없어서인지 휑한 바람만 불어대고 나이 지긋한 염부는 우리들의 동선을 살피며 귀찮다는 듯 내쫓는다. 딱히 도움이 될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코지할 생각도 없는데 괜한 경계를 한다. 이왕 들린 김에 소금이나 조금 살까 해서 여쭸더니 20kg 단위로 판다길래 감당하기 힘들어서 그냥 돌아 나왔다. 노회 한 염부의 굵은 주름이 잔상에 남아서 마음을 깨작인다. 나는 어떻게 늙어갈까.
벌천포항에도 폭풍이 일듯 바람이 불어댄다. 많은 캠핑족들이 텐트를 제대로 치지 못해서 쩔쩔매며 추위에 떤다.
전날부터 바람이 세고 기온이 뚝 떨어진다는 예보가 있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집을 떠나온 사람들이 생고생을 한다.
자신들은 바람을 요행스럽게 피해 갈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나 보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매서운 바람의 성화에 같이 온 멤버들끼리 불화가 생긴다. 철수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밤새 고민하며 다툼을 피할 수는 없겠다 싶다.
벌천포항 노을을 기다리며 구멍가게에서 믹스커피를 마시며 바람을 피하고 있으니 텐트를 가지고 오지 않은 우리들이 참 현명하고 대견스럽게 느껴진다. 때로는 가진 자보다는 가지지 않은 자가 더 행복할 때도 있다.
벌천포항 노을에도 취기가 남아있고 희꾸무리한 바람이 들어있어 한기가 느껴진다.
그래도 노을은 다시 일출을 예고하는 숭고한 의식이니만큼 우리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편안한 위안을 준다.
가을에 가을을 찾아 떠난 친구들..
또다시 가을을 찾을 때까지 이 가을을 기억하기를.
맵시 있는 가을이 가슴에 맺힐 때까지 흔들리지 말기를.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의 진한 여운으로 아름다운 추억이 오롯이 남아있기를.
[일 시] 202년 10월 16일 ~ 17일]
[장 소] 당진 및 서산 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