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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라 톤

노란 감꽃, 빨간 홍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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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 날이 밝기를 기다려 마음을 단단히 조여매고 길을 나섰다. 지난 일요일에 하프마라톤을 달렸던 후유증이 아직 채 가시지 않았는데 다시 장거리를 달리려니 별별 훼방꾼들이 많다. 흩어져 있는 생각들을 정리해야만 될 것 같은 마음에 앞 뒤 견주지 않고 그냥 달려야겠다는 마음을 조율하니 가볍고 단순해져서 좋다.

 

내키지 않아 뜸을 들이다가 나선 길인데 막상 달리니까 가슴속까지 스며드는 선한 아침 공기의 상쾌함이 일품이다. 해가 뜨지 않은 시간이지만 하루를 부지런히 시작하는 사람들과 닮았다는 안도감에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긴다. 새벽이나 밤을 가리지 않는 그들은 평생을 한결같이 살아온 농부다. 우리 아버지도 농부였었다는 생각을 떠올리면 왠지 짠하다. 나도 농부가 되어 삶을 마무리하고 싶다. 어설프겠지만 욕심 내려놓고 한 땀 한 땀 찬찬히 남은 여백을 채우고 싶다. 그리고 남달리 아침을 일찍 시작하는 사람들이 또 있다. 새벽잠을 깨워 마누라 눈치 보며 나섰을 골퍼들. 몇 년 전에 동네에 들어 선 골프장에 새벽 티업에 타이밍을 맞춰 놓은 사람들의 새벽은 농부와는 다르게 쫓기는 새벽을 맞는다. 그들의 아침을 호흡 깊숙이 꾹꾹 집어삼키며 나도 쫓기듯 쫓아가듯 달린다.

 

칠성리 다리 위에 다다를쯤 해가 떠오른다. 고향에서 맞는 일출은 또 다른 감흥이다. 4km쯤 달렸으니 몸도 적당히 풀리고 땀이 베이기 시작하니 다리도 가볍고 호흡도 안정되었다. 질매 끝부터는 약간 오르막이 시작된다. 차로를 달리자니 새벽 자동차들의 자신만만한 기세가 두렵고, 인도로 달리자니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아 울퉁불퉁 제멋대로 널브러진 벽돌들이 있어 내키지 않는다. 기록을 낼 경기도 아니고 혼자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또는 버리기 위해 달리는 것이니 좀 더 안전한 인도를 선택했다. 달릴 수 있는 도로가 있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라 생각해야지. 십여 년 전에 마라톤 멤버들과 청도반시 마라톤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때 이 길을 씩씩하게 달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오르막을 달리는 일은 여전히 힘들다.

 

청도읍내 길은 달리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칭찬해주고 싶지 않다. 정돈되지 않은 길과 제멋대로 생긴 신호등이 껌벅거리는 길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청도 사람들이 마라톤을 하지 않고 일상을 살아가는 조건이니 부족함이 없겠다. 그냥 제 생긴 대로 제 모습이니 허물이 없다. 경부선 무궁화 기차가 지나가는 구름다리를 건너 역사를 이룬 추어탕거리를 지나 청도역에 다다르니 감회가 새롭다. KTX 기차가 대세가 된 시점부터 청도역은 외톨이가 되어갔다. KTX 노선이 청도를 지나지 않고 경주, 울산을 경유하여 부산으로 내달리다 보니 경부선 청도역은 한적한 간이역을 연상케 한다. 한 때는 통학하는 학생들과 보따리를 이고 지고 농산물들을 내다 파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뤘었는데, 이제는 그 흔적을 찾을 길 없고 아직 허장성세의 위용이 남아 고향을 들고나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어준다.

 

청도역을 반환점으로 하여 되돌아 오는길. 다시 읍내를 거슬러 오는데 뭔가 석연치 않다. 호흡도 흔들리고 다리도 묵직해온다. 걸어볼까 유혹이 생긴다. 멈출 수는 없는 일인데 이를 어쩌나. 나는 회귀하여야 한다. 거센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처럼 내가 떠나 온 고향에 다시 이르러야만 한다. 꼭 거기에서만 나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고, 내가 살아있는 이유와 내가 어떻게 문을 닫아야 하는지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눌미리에 이르렀을 쯤 잠시 고민을 한다. 왔던 길로 갈까. 아니면 둘러가더라도 눌미리로 들어가서 차가 없는 한적한 길을 달릴까. 가 보지 않은 눌미리 길을 선택해서 강가 길을 달리는데 은근히 지겹고 힘이 든다. 차라리 그냥 왔던 길로 갈 걸 하는 작은 후회를 탓하지 말자. 인생은 여러 길이지만 결국 한 길에서 만난다. 아침 7시 전의 아침 풍경은 한적하고 평화로워서 힘은 들지만 그만큼의 보상은 충분하다. 유등교를 지나 토평리로 들어서는데 노란 감꽃들이 수줍게 피어있다. 예전 청도반시 마라톤에서 달릴 때에는 빨간 감홍시가 우리들의 힘든 걸음을 덜어주었는데 지금은 그 자리에 감꽃이 피어 있으니 무슨 조화일까.

 

토평리를 지나면서 급격히 체력이 떨어진다. 몇 번 걸음을 멈추며 걸었다 뛰다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는가를 짚어본다. 감꽃이 진 자리에 홍시가 돋고, 홍시가 맺힌 자리에 다시 감꽃이 피는 이유를 어찌아랴. 연어가 제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와 생을 마감한다는 이유도 궁금하지만, 달리다 보면 왠지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으로 정리된다. 달리다 걷고, 걷다가 달리는 게 인생인데 조바심 내거나 초조해할 것 없다. 거기가 어디든 그곳을 향하여 달리면 된다.

 

[일    시] 2021년 5월 13일

[경    로] 청도 본가(수야 3리) - 이서 - 칠성리 - 청도역(반환) - 눌미리 - 유등교 - 토평 2리 - 학산 1리 -

             수야 3리(23.37km)

[시    간] 2시간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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