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마 라 톤

마라톤은 껌이다

반응형

마라톤에 입문해서 한참 피치를 올릴 즈음 하프 마라톤쯤은 껌이다 생각한 적 있다. 그런데 마라톤은 그런게 아니라는 것쯤은 마라토너들이 너무나 잘 안다. 지난겨울에 양재천에서 과천을 왕복하는 하프 마라톤을 두 번 뛰었는데 두 번 다 힘든 레이스였다. 물론 연습이 부족한 탓이긴 하지만 하프 마라톤이라고 함부로 대들었다가는 낭패 보기 십상이다.

결국 다리에 경련이 일어나는 고통을 이기지 못해 중간에 몇 번이나 걸었던 경험이 있다.

 

나의 첫 마라톤 입문은 강남구청에서 주최하는 대회였다. 물론 병아리 마라토너였기 때문에 하프코스를 신청해서 뛰었는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실패한 경기였다.

마라톤 경기장에 자원봉사자들이 음식꺼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마라톤에 입문시킨 남형준 사장이랑 부추전을 먹고 뛰자며 눈을 맞추고는 부추전 부치고 있는 아주머니한테 가서 부추전 하나 달라하니 의아한 눈치를 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부추전은 출발 전에 주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끝난 러너들에게 막걸리랑 안주로 주려고 준비하고 있었던 것인데 마라톤 초짜들이 다짜고짜 달라고 조르니 그 아줌마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한 판을 내준다.

둘이서 가뿐하게 해치우고는 마라톤 출발선에 섰는데 유월의 태양이 뜨겁다. 주최측인 강남구청에서도 첫 대회여서 경험 부족으로 대회 진행상 어설픈 점이 많다. 태양이 뜨거운 유월에 대회 일정을 잡은 것이며, 출발 시간도 아마 오전 10시는 넘었던 기억이다.

 

5km 정도는 무난히 달렸는데 좀 더 지나니까 호흡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스팔트는 열기를 푹푹 뿜어대고 땀은 비 오듯 쏟아지는 틈으로 목구멍으로는 채 소화되지 못한 부추전 냄새가 역류한다. 다리마저 경련이 일어나면서 삼겹 사겹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마라톤은 정말 극한의 경기였다.

15km 정도 지날즈음 부터는 도저히 달릴 수가 없어 결국 달리기를 멈추고 걷기를 반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함께하던 마라토너들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도움이 되고자 걸으면 안 된다고 조언을 하는데 환청처럼 들렸다.

그 순간 마라톤은 달리기 경기이지 걷는 경기가 아니라는 원칙은 별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잠시라도 걸을 수 밖에 없는 나 자신에 대한 원망과 마라톤을 만든 인간들에 대한 자잘한 분노가 인다.

마라톤은 영혼과 육체를 다이어트하는 운동이다.  그 누구에게든 분노는 하지 말자. 먼 거리를 인내하면서 달려서 분노하게 되면 기껏 다이어트되었던 영혼은 원상으로 복귀되어 온갖 잡스런 영혼이 된다.

 

그 이후로도 나는 수많은 경기에 참여하면서 걸었던 경험이 종종 있다. 물론 하프 마라톤은 거의 걷지 않고 달리지만, 첫 하프마라톤과 지난 겨울에 연습 마라톤에서 달릴 수가 없어 걸었던 기억 모두 양재천이다.

오월 싱그러운 바람이 폐부 깊숙이 들락거리는 청량감을 마음껏 느끼며 다시 양재천에서 달리는 기분은 남다르다. 다행히 걷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달릴 수 있어서 고맙다. 연습이 충분하지 않는데도 호흡도 비교적 안정되고 다리도 잘 버텨주니 행운인가 싶다.

 

아마 함께 힘을 돋워 준 김재하 사장님과 구중회 사장님의 응원이 큰 힘이 된 것이라 확신한다. 나 자신이 마라톤을 잠시 미뤄뒀던 시간이 꽤 되었는데 다시 필드에 발을 올려놓도록 부드럽게 응원해주신 덕분이라 생각한다. '마라톤은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그냥 마음이 내주는 대로 내려놓고 편하게 함께하면 된다' 라는 짤막하지만 임팩트 있는 응원이 달릴 수 있는 힘이다. 함께해줘서 항상 고맙게 생각한다. 대놓고 감사하다는 말을 적절하게 하지 못하는 바보 같은 나. 힘닿는 날까지 달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일    시] 2021년 5월 9일 8시

[경    로] 양재천 적십자 혈액원 - 탄천 - 한강 - 한남대교(턴) - 원점(21.97km)

[시    간] 2시간 05분 22초

 

728x90

'마 라 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라톤은 정직이다  (0) 2021.06.28
노란 감꽃, 빨간 홍시  (0) 2021.05.13
자신에게 당당 할 수 있는가.  (0) 2021.04.12
서울달리기대회(Half-30)  (0) 2019.10.14
2019 서울국제평화마라톤(Half-29)  (0) 2019.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