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隨筆, 散文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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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진 자리에 빈 항아리를 그냥 둘 수 없어 더위로 가득 채우던 어느 여름날. 고속도로에는 피서객들이 더위를 피하러 빼곡히 몰려들었다. 더위를 잘 피할 수 있을까. 그들은 더위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닐 것이다. 어쩌면 더위를 피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과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덩달아 막연히 떠나야만 한다는 일념은 아니었을까. 그들에게는 더위보다도 주변의 시선이 더 더웠는지도 모른다. 

 

결혼생활 20여 년 동안 아직 제대로 된 휴가를 떠나본 적 없다. 물론 이유는 여러 가지다. 여름휴가 때 시골에 제사가 겹쳐서 해마다 제사에 참석하느라 휴가를 챙길 여유가 없었다. 한 가지 더 있다면,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었을뿐더러 마음의 여유가 넉넉지 않았음을 핑계로 내걸어 본다.

 

휴가라는 게 특별한가. 가족들이랑 오손도손 마음 맞출 수 있고, 세상 살아가면서 자신의 위치를 한 번쯤 가늠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되지 않겠나. 이렇게 내 멋대로 변명을 쌓아도 우리 가족들이 내 편이 되어줄지는 장담할 수 없다.

 

모처럼 가족휴가를 떠났다. 물론 고속도로를 경유해서 바다나 산으로 떠나는 휴가는 아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형편이 닿지 않아서 점심식사 한 끼로 올해의 휴가를 때우려 한다. 가족휴가라는 게, 나 혼자만의 휴가가 아니어서 반드시 동의를 구해야 한다. 물론 가족들이 마음 편하게 동의해 줬다.

 

깊은 산중에 잘 정돈된 정원과 계곡이 있는 한식당. 식당이라기보다는 고택에 들어선 느낌이다. 그곳에도 한가하지는 않다. 여느 해수욕장 못지않게 많은 사람들이 들어찼다. 잠시 후회도 된다. 우리들만의 조용한 시간을 갖고 싶었는데,  세상은 호락호락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정작 앞에 닥치면 쉽게 마음을 비워내지 못한다.

 

휴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여유는 아닌가 보다. 나는 아직 휴가를 제대로 가질 수 있는 덕이 모자라는가 싶다. 이참에 쉬어가자.

미래의 휴가를 위하여 그냥 편하게 쉬어가자. '홀로 즐거운 곳'이라는 간판을 내 건 화장실에 눈이 멈춘다. 어쩌면 나 혼자 세상에서 가장 편한 휴가를 즐길 수 있는 곳. 그곳이 화장실은 아닐까.

 

요란스럽게 계획을 하고, 마음을 맞추느라 부산 떨지 말고 혼자서 마음껏 사색하고, 마음껏 비울 수 있는 곳. 이 보다 더 좋은 휴가처가 또 있을까. 우리는 담백한 한정식 식사 한 끼로 휴가을 메웠지만, 서운하거나 부족하지는 않다. 많은 시간을 내서 짐을 싸고, 세밀한 계획을 짜고, 아웅다웅 다투며 다녀온 휴가가 아니라서 걸쭉한 맛은 없다. 그냥 조용히 가족들 모두 흔쾌히 채워주어서 행복한 휴가다.

 

휴가란?

도둑을 막기 위하여 성곽처럼 높은 담을 쌓고 나만의 세계에 빠져드는 게 아니라, 낮은 담에 오손도손 기와를 얹고 내가 밖으로 소통할 수 있고  네가 안으로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두고 나를 찾는 것이다.

 

 

 

 

 

 

 

 

 

 

 

 

 

 

 

 

 

 

 

 

 

 

 

 

 

 

 

 

 

 

 

 

 

 

 

 

 

 

 

 

 

 

 



 



 

* 일    시 : 2009년 8월 2일

 

* 장    소 :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낙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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