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 비봉
행복이 어디 있더냐..
바로 거기 있더이다.
사람을 만남에 있어서 잇속을 따질줄 몰랐고 그런게 어떤건지도 몰랐던 사람들이다.
그들을 만나면 언제나 허물이 없다.
마음이 찌들어 좁아진 속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 쓸 필요도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내놓고 행복해 하기만 하면 된다.
학창시절을 함께했던 친구들이다.
그들이 있어 산도 즐겁다.
불광역에서 족두리봉을 향해 오르는 산 길에
보라빛 여름이 함초롬히 피어있다.
우리들이 이 길을 오르는지 미리 짐작하고 엊그제 꽃망울을 터뜨린듯 고운 향기가 가슴에 안긴다.
그에게 눈길을 주는 내 입가에는 왠지 모를 흐뭇함이 고인다.
그래 반갑다...
하늘이 곱지 않다.
잔뜩 흐린 날씨에 조망이 트이지 않아 아쉽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웃음이 있어 세상은 어둡지 않다.
족두리봉을 향해 오르는 길에서 적잖이 고초를 겪는다.
경사 급한 너른 바윗길을 오르기가 만만치 않다.
끙끙거리며 아찔한 바윗길을 오르다가 미끌어진 친구가 있어 큰일 날 뻔 했다.
천만다행이다.
호흡을 몰아가며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오른다.
족두리봉에 올랐다.
세상사 한줌인것을 우리는 모르고 살아간다.
산에 오르기 전에는 옹졸한 가슴을 탓하며 세상에 대하여 자학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산 정상에 오르면 이 넓은 세상을 몽땅 쓸어 가슴에 넣어도 가슴이 빈다.
그래서
우리는 가슴이 얼마만큼 비어 있는지 확인하려 산에 오르는지도 모른다.
향로봉에는 오르지 않았다.
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이 우리들의 마음을 조급하게 재촉했던 탓도 있었지만..
향로봉에 오르는 길이 만만하지가 않다.
그래서 우회로를 이용해서 돌아갔다.
우직하게 똑바로 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인생이란..
돌아 갈 줄 아는 지혜도 필요하다.
때로는 돌아가는 여유를 가질 수 있어도 좋다.
여유가 필요할 때는 막걸리 잔을 들어 줄 수 있는 친구가 있으면 더 좋다.
멀리 머리가 벗겨진 비봉 정상에는 비석 하나가 있다.
그래서 비봉이라는 이름을 얻었나보다.
함께한 친구들이 비봉을 바라보면서 오를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 한다.
벌써 힘이 많이 빠진 탓이기도 하지만..
저렇게 하늘을 향하여 뽀족하게 돋아있는 봉우리를 어떻게 오를 수 있을까 겁이 나기도 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누군가.
순수함이 가득 묻은 우정어린 친구들이 아닌가.
오늘 이렇게 아름다운 우정을 마음껏 마셨으니 못할 일도 없지 않은가.
그래 가자...
향로봉에서 비봉을 향해 가는 능선길에 싸리꽃이 이쁘다.
마사토로 이뤄진 척박한 땅에서 이렇게 분홍색 꽃을 피웠으니..
내 가슴이 찌릿하다.
나는 너에게 눈인사를 건넨다.
네 정열과 순정을 뺏기지 말고 지금처럼 꼿꼿하게 간직하라고 응원을 보낸다.
어떻게 알아 들었는지 고맙다고 씽긋 웃어준다.
비봉 정상에는
북한산 진흥왕순수비가 서 있다.
그 옛날 신라시대 때 국가의 경계를 표시하였는데, 원본은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지금 비봉 정상에는 모조품의 비석이 역사를 대신하고 있다.
비봉 맨 꼭대기 바위 끝 부분에 겨우 비석 하나 설 만큼의 자리에 구멍을 파고 비석을 세웠다.
그 시대의 영화는 역사에 묻히고 우리는 또 다른 역사를 꿈꾸며 여기에 서 있다.
나는 잠시 광개토대왕을 떠 올렸다.
영토확장의 꿈은 인간의 본능이다.
우리나라가 가장 넓은 지역을 영토로 확보하였던 때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때이다.
나는 그를 존경한다.
단순히 땅을 넓혔다는 이유만은 아니리라.
나는 그의 웅혼한 기개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산인들의 사진에서 많이 봤던 사모바위다.
요즘말로 그는 인기짱이다.
북한산 비봉능선을 산행하는 사람에게 언제나 변함없이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을 연상케하면서
호흡이 거칠어진 산꾼들을 쉬어가게 한다.
우리도
그의 넉넉한 품에 안겨 막걸리와 간식꺼리로 허기를 채웠다.
덕분에 내 가슴도 넉넉해졌다.
남은 산행을 하는데 모자람이 없겠다.
사진을 찍는 배경뒤로
사모바위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장난기 많은 아이들이 다칠까봐 염려해서 지켜보는듯한 그의 모습이 가슴에 남아 있어서
한동안 세상을 좀 여유있게 살아 갈 수 있을거 같다.
비봉에서 문수봉으로 이어가는 능선에서 멀리 삼각산 봉우리들이 보일락 말락 안개에 싸여 신비감을 더한다.
백운대를 몇 번 가 봤지만
도저히 오를 수 없는 봉우리처럼 보인다.
어찌 인간이 저 신비롭고 영험한 봉우리를 오를 수 있을까...
그렇지만 자작스런 인간들은 겁도없이 오르락 내리락 한다.
저 봉우리를 올라서 세상을 내려 보았을때 보다 오를 수 없을것 처럼 보이는 신비감이 더 좋다.
깔딱고개를 헉헉거리며 올라서자 청수동 암문이다.
북한산성에는 여러개의 암문이 있는데
청수동 암문도 그중에 하나로 산성의 첩보원이나 비밀리에 물자를 보급하던 숨겨둔 통로다.
세상 살면서 힘들고 지칠때면
가끔은 내 자신을 치료 할 수 있는 나 이외의 또 다른 통로가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대남문에 이르렀다.
오늘 산행의 종착 분기점이다.
대남문을 따라 산성이 푸른 신록속에 묻혀서 가늘게 숨을 쉰다.
한 때는 천하의 적도 두렵지 않았던 성벽들이
이제는 역사의 흔적으로만 그 명맥을 이어간다.
함께한 친구들도 ..
한 때는 화려한 우정으로 똘똘 뭉치겠지만,
어느듯 해가 기울고 달이 뜨면 하나 둘 빛 바랜 우정으로 남게 될 것이다.
빛이 바랜다고 우정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저 성벽처럼 아름다운 우정의 흔적을 오래도록 간직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구기동 날머리 계곡가에서
배운지 오래되지 않은 듯한 서투른 대금을 불고 있다.
산바람에 실려서 산을 울리는 대금소리가
서툴게 느껴지기 보다는 가슴가득히 정감이 침잠된다.
우리는 그에게 한곡을 청했다.
그는 신이나서 '장록수'를 멋지게 연주한다.
중간중간에 매끄럽지 못한 연주가 있지만 흠으로 여겨지기보다는 여유가 느껴진다.
우리는 박수를 치고 산길을 내려왔다.
다시 막걸리 한 사발을 부어놓고 다음 산행을 이야기하며
북한산 비봉의 우정을 다졌다.
* 일 시 : 2009년 6월 7일
* 산 행 로 : 불광역 - 쪽두리봉 - 향로방 - 사모바위 - 문수봉 - 청수동 암문 - 대남문 - 문수사 - 구기터널
* 산행시간 : 5시간 30분
'山 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흥정산 - 한강기맥 (0) | 2009.08.10 |
---|---|
광교산 (0) | 2009.07.05 |
청계산 (0) | 2009.06.06 |
지리산 - 대종주(4) (0) | 2009.05.24 |
지리산 바래봉 (0) | 2009.05.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