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 대종주(4)
오라는 이 없는 그곳을 나는 간다.
염치없이 덥썩 안겨도 언제나 포근하다.
내가 산을 올랐던 명분도
산을 올라야 하는 이유도 오직 당신이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하늘에 통하고 싶었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를 하늘에 알리고 싶었고
하늘이 왜 인간을 내려보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꼭 알아야 한다기 보다는
하늘에게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하늘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 겸손을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지리산에 오른다.
지리산에 오르면 하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멋진 지리산에 여명이 열리면 내 몸에 엉켜있던 욕망의 찌꺼기들을 내 놓는다.
성삼재에서 호흡을 몰아가며 노고단에서 한 숨을 돌리고 깜감한 어둠을 뚫고 발 닿는 곳으로 촘촘히 이어간다.
임걸령에 이르면 여명이 열리는 틈으로 능선의 파노라마가 나타난다.
언제나 지리산의 파르스름하게 겹겹이 쌓인 능선을 만나면 가슴이 뜨거워진다.
주체 할 수 없는 감격이란 이런 것이다.
이때쯤 몸은 땀으로 흠뻑 젖는다.
비오듯이 땀을 밀어내는 구멍으로
내가 그동안 자신에게 쌓아왔던 교만과
남을 배려하지 못했던 오만함과
잘난척해서 주변을 돌아보지 못했던 모자란 겸손을 내 놓는다.
아무렇지도 않다.
내가 무엇을 내어 놓았는지
지리산은 무엇으로 더렵혀졌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당신을 만나면 내멋대로 칭얼거려도 티나지 않게 잘난척하며 살아간다.
어머니를 닮은 지리산을 찾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오는 줄 어떻게 알았을까.
철지난 철쭉을 가슴에 품었다가 이렇게 이쁘게 내 놓았다.
어머니 당신께서는 요란하게 치장하지 않고 세월이 주는 향기를 그대로 담은 모습이 더 멋지다.
아름다운 당신께
아름다운 기도를 올린다.
내가 힘들고 지칠때마다 당신의 품에 안길 수 있도록 넉넉한 웃음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세석평전...
당신은 산중에 이렇게 넓은 평지를 만들어 놨을까.
쉬어가라 한다.
8시간 정도 걸었으니 에너지가 다 소진되었다.
이 참에 다리를 뻗고 한 숨 돌려본다.
이렇게 높은 산중에 어떻게 습지가 만들어져서 이렇게 예쁜 습지식물인 동의나물이 노란꽃을 피웠다.
너를 보고 웃으며 노란 에너지를 채운다.
힘들지만 행복이 뭔지를 조금은 알겠다.
고사목을 볼때마다 가슴이 아리하다.
왜 너는 거기에 서 있으며
나는 왜 너를 보며 내 삶을 생각하는가.
한 때는 세상 부러울거 없었다.
산뜻하고 푸른 옷을 입고 세상 가장 높은 곳에서 남부러울거 없이 잘난척도 했었는데,
두려움도 없었고 아쉬움도 없었다.
그러했지만,
지금은 그 모두를 벗고 이렇게 서 있다.
삶이 그러하다.
가진자나 그렇지 못한자나 그것은 한 때의 길 일 뿐이다.
누구나 한 번은 스쳐가야 할 길이다.
내가 지금 옷을 벗고 있는 것은
그 이전에 푸른 옷을 입었거나
아니면 다음에 멋지고 아름다운 옷을 입기 위하여 벗고 있다.
1.500미터 이상의 고지에서도
끊임없이 생명은 이어지고 꽃은 핀다.
작은 꽃 한 송이에서 삶의 향기를 얻는다.
그 향기에서 나는 행복한 에너지를 채운다.
까마귀떼들이
까악대며 온 산을 흔들어댄다.
내가 힘겨운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들었나보다.
참 고맙고 기쁘다.
보통 때에는 게름칙하게 느껴졌을 까마귀 울음이 왜 이렇게 행복하게 들릴까.
내가 힘들고 지쳐있어서 그렇게 느껴졌을까.
분명 그것은 아니다.
당신의 울음은 생명의 울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어느 생명 하나 귀하지 않은게 있으랴.
장터목산장에 이르렀을 즈음
내 에너지는 몽땅 소진되었다.
물통에 물을 채우며
천왕봉에 무사히 오를 수 있도록 간절하게 다져본다.
불 탄 가슴에 물이 채워지면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느낀다.
이 순간 참 행복하다.
천왕봉에 오를 수 있다는 오늘이 행복하고
천왕봉 밑에서 물을 마실 수 있다는 현실이 너무 행복하다.
너무 아름답다.
천하의 그 무엇이 이보다 더 아름다우랴.
나는 인위적인 아름다움보다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나면 가슴을 울먹인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무엇이 그리 힘든가.
세상 살면서
다 버리고 싶은 날이 오거든
그 때 지리산 천왕봉 오르는 길에 서보라.
이쯤에 이르면 나는 말문을 닫는다.
오직 가슴으로 세상을 보며
가슴으로만 듣고
가슴으로만 말을 한다.
그래 세상 살아가면서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 가슴이다.
가슴으로 보는 사물과, 가슴으로 듣는 말과, 가슴으로 느끼는 세상은 모두 진실이다.
마지막 발을 들어 올릴 힘만 남았다.
드디어 천왕봉에 엎드린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네번째 지리산 종주를 하고
그 소중한 고마움을 이렇게 아뢴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열심히 살겠노라고 다짐한다.
다음에 또 뵐 수 있기를 기도한다.
천왕봉에는 지리산에 케이블카를 놓겠다는 행정을 질타하는 지리산인이 일인시위를 한다.
말문을 막고
가슴으로 그에게 응원을 보내며 지리산을 내려온다.
나는 언제나 행복 할 수 있다.
당신이 있기 때문이다.
1. 일 시 : 2009년 5월 22일 ~ 23일(무박 2일)
2. 산 행 로 : 성삼재 - 노고단 - 임걸령 - 노루목 - 삼도봉 - 토끼봉 - 형제봉 - 벽소령 산장 - 세석산장 - 촛대봉 - 연하봉 -
장터목 산장 - 제석봉 - 천황봉 - 중산리
3. 산행시간 : 13시간 2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