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記 行

쉼표 같은 영동

[쉼표 같은 영동]
 
여명이 열리지 않은 서울역을 떠나 영동으로 가는 새벽기차에는 설렘이 서려있다. 조치원쯤 이르자 차창 밖은 안개로 잠겨 몽환적이다. 졸다 깨다 꿈속을 드나들며 타임머신을 타고 무릉도원행 열차를 탄 느낌이다. 어쩌면 진짜 무릉도원으로 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짙은 안개는 길 위의 시야를 지우고, 사람들의 발걸음을 더디게 만든다. 기차 여행자에게는 차창을 변화무쌍하게 꾸미는 아름다운 풍경도 좋지만, 자욱한 안개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에는 시선을 뺏기지 않고 조용히 사색에 잠길 수 있어서 좋다. 비가 오면 비로 받아들이고, 눈이 흩날리면 눈으로 머문다. 기차에 몸을 싣고 시간과 공간을 가르는 순간, 날씨가 정해주는 이정표를 따라 단단한 자신의 삶을 조금 느슨하게 반추해 볼 수 있는 철학의 시간으로 스며든다. 
 
ITX 새마을호를 타 본지 오랜만이다. 아마 KTX가 생긴 후로는 장거리를 새마을호로 이동하기는 처음이다. KTX보다 많이 느리기는 하지만, 작은 역에 종종 들러 쉬어가는 느낌은 삶의 쉼표 같아서 호흡이 안정된다. 너무 빠르게만 살려 애썼던 시간들이, 오히려 비어 있었던 것처럼 돌아온다. 
 
대전역 지나 옥천역에서 한숨 쉬어 가는 틈에 조바심이 인다. 다음 역이 영동역인데 안절부절못한다. 혹시 못 내리고 지나치면 어쩔까. 노파심을 지울 수 없다. 황간역까지 간다는 옆 좌석 사람에게 영동역까지 간다고 말해 두었다. 내가 놓치지 않도록 체크해 달라는 무언의 부탁이었다.
 
난생처음 영동역 개찰구를 통과했다. 회사 행사차 영동에 첫발을 디딘 셈이다. 가끔 민주지산 산행하러 오기는 했어도 시내를 들어온 기억은 없다. 명절 때 경부고속도로가 막혀 국도 길을 찾아 영동을 통과한 적은 몇 번 있다. 영동의 아침은 고요하지만 단단한 활기가 느껴진다. 
 
영동은 와인에 진심인 고장이다. 산기슭마다 포도밭이 기대어 있고, 그 결실이 와인으로 이어진다. 아직은 낯설지만, 그 낯섦 속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분위기다. 유럽에서나 보던 와이너리가 이곳에 하나둘 뿌리내리고 있다. 아직은 낯설지만, 그 낯섦이 오히려 이곳의 미래처럼 느껴진다. 힘든 가운데서도 지역 특산물로 자리 잡아 와인의 메카가 되기를 응원한다. 
 
와인터널이 있는 레인보우힐링단지를 나와 월류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달도 머물러 간다는 월류봉은 한천팔경 중 1 경이다. 반야사를 스쳐 흐른 물길이 모여 조강천에 어우러져 월류봉을 휘감아 도는 풍경은 신선이 머물다 갈 만하다. 월류정에 앉아 복숭아를 한입 베어 물면 신선이 부럽지 않을 것 같다. 휴일을 맞아 관광객들이 드나들고 야외공연도 펼쳐진다. 천하의 요새를 닮은 월류봉을 직접 걸어서 정상에 오를 수 있기를 기대하며 아쉬움을 남긴다.
 
돌아오는 길 주변에 복숭아꽃이 지고 있다. 꽃 지고 복숭아가 익어가면 영동은 무릉도원이 될 것이다. 산이 많아 밭이 넓고, 그 밭마다 꽃들이 과일을 잉태하고 있다. 소도시지만 기죽지 않고 자존심 강한 특유의 자신감이 느껴지는 영동이다. 자연 곁에서 소박하게 살아가기엔 이만한 곳도 드물겠다. 
 
[일시] 2026년 4월 18일
[장소] 영동군
 

조강천과 월류정
맥문동
천년 느티나무
레인보우 힐링관광단지 내 조형물
와인터널 입구
와인터널 내 갱도(일제시대 때 탄약고로 사용)
와인저장고
와인터널 전경
복숭아 밭
표고버섯 재배단지
월류봉
장구 공연단
728x90

'記 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오릉  (6) 2026.05.13
용산가족공원  (16) 2026.04.14
규슈여행을 마치며(규슈여행 3일차)  (5) 2026.02.06
다자이후 천만궁(텐만구) 신사(규슈여행 3일차)  (4) 2026.02.06
태평양 일출(규슈여행 3일차)  (1) 2026.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