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1. 지은이 : 마이클 샌델
2. 옮긴이 : 이창신
3. 출판사 : 김영사
이런 논의가 필요했던 것은 결국 행복을 효율적으로 분배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어떤 기준으로 사회적 가치를 정의해야만 최대한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행복과의 갈등에서 어떤 것이 정의가 될 수 있을까 라는 물음에는 어떻게 답할까.
밴덤은 도덕의 최고 원칙은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이며, 쾌락이 고통을 넘어서도록 하여 전반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옳은 행위는 功利를 극대화하는 모든 행위라고 정의한다. 즉, 공리란 쾌락이나 행복을 가져오고 고통을 막는 일체라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쾌락을 좋아하고 고통을 싫어한다. 공리주의 철학은 이 사실에 기초하여 공리적 행복을 계수화하려 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개인의 행복과 사회적 행복이 충돌될 때, 행복의 계수가 더 큰 것이 정의라는 입장을 취한다. 그렇게 되면 사회에 소속된 개인들은 공리를 위하여 개인의 행복을 양보하거나 포기하여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할 수밖에 없다.
이마누엘 칸트는 밴덤의 공리주의에 반박을 한다. 모든 인간은 개인적인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으므로 집단적 행복의 도구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즉. 개인은 타인의 행복에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인 것이다. 또한, 인간은 신이나 사회적 공리에 의해 생산된 산물이 아니라, 각자가 존중받아야 할 존엄성을 가진 이성적인 존재이므로 도덕에 기초한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편다. 개인의 권리나 자유를 우선시하다 보면 국가의 존재에 따른 도덕이나 법률에 의한 질서가 무시될 수 있다는 논리에 대해서 칸트는 그것의 사회적인 공정성에 대하여 반론을 한다. 그러면서도 사회 집단적 동의가 '모든 공공법의 정당성을 판가름하는 잣대'라는 결론을 내리지만, 사회적으로 합의된 계약이 어떤 정의의 원칙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았다.
미국의 철학자 존 롤스는 사회적 합의를 위해서는 원초적으로 평등하다는 가언합의라는 가정을 한다.
첫째, 언론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 같은 기본 자유를 모든 시민에게 평등하게 제공한다는 원칙
둘째, 사회적, 경제적 평등과 관련한 원칙
위의 가정이 지켜지는 전제라면 롤스의 정의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겠지만, 과연 롤스는 이러한 가정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지 의문이다. 롤스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평등과 분배의 공정성에 대하여 사회적인 합의를 도출하려고 노력한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무리한 가정 위에서 전개되는 이론이어서 그것이 철학적인 확고한 정의를 내려주지는 못한다. 그러면서 롤스는 우리가 그러한 요소를 다룰 때, '서로의 운명을 공유하고', '우연히 주어진 선천적이거나 사회적인 환경을 자신을 위해 이용하려면 그 행위가 반드시 공동의 이익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데 동의하자고 제안한다. 결국, 롤스는 사회적 평등을 이루기 위하여 공리적인 요소를 차입하기도 하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색깔의 주장이다. 그의 정의가 어떤 결론으로 도출될지는 관심사다.
정의란 무엇인가?
오케스트라 단원 앞으로 고가의 명품 플루트가 배달되었다. 이 플루트는 누가 가져야 할까. 플루트를 제일 잘 연주하는 사람이 가진다면, 더 좋은 음악으로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면 그가 가져야 할 것이고, 연주는 썩 잘하지는 못하지만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가진다면, 그는 더 열심히 노력해서 오케스트라 전체의 화음의 품격 높이므로 행복의 양을 늘릴 것이다. 돈이 많은 사람이 기부금을 듬뿍 내놓고 플루트를 가진다면, 그 기부금으로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복지를 늘리고 동기를 유발해서 더 좋은 화음을 낼 수 있으므로 행복은 늘어날 것이다.
소수 집단에 대한 우대정책 때문에 선의의 피해를 보는 다수 집단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결론 내려야 할까. 대학에서 학교 고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도서관을 기부하는 사람에게 기여 입학을 허용했다면, 그로 인하여 불합격되어야 할 당사자 간 사이에서 과연 선이란 무엇인가.
웨스트 텍사스 엔드루스 고등학교에 다니는 캘리는 뇌성마비를 앓아 휠체어를 타고 응원하는 인기 있는 응원단원이다. 그런데, 응원단장 아버지를 비롯한 단원들 부모가 응원단원으로서의 캘리의 부적합함을 이유로 퇴출을 건의했다. 일자로 다리를 뻗을 수 없는 캘리는 응원단원으로서 자격 미달이라는 것이 그 이유다. 그리고 캘리가 다른 응원단원들의 인기를 감소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질투도 포함되었다.
과연, 캘리는 응원단원에서 퇴출되어야 할까. 많은 학생들이 캘리의 열정적인 응원을 좋아하고 동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캘리의 퇴출이 쉽지 않음을 예고한다. 응원의 본질이 학생들의 힘을 모으고 선수들이 단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면 그 선택은 더 어렵지 않은가. 응원단들의 화려한 기술을 통해서만이 단결을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아리스토텔로스에게 정의는 적합성의 문제다. 권리 할당이란 사회조직의 텔로스를 확인한 뒤에 그것과 관련한 역할에 적합한 사람을 찾아, 그에게 본성을 실현할 기회를 주는 일이다. 칸트를 비롯한 롤스 등 자유주의 정치론자들에게 정의는 적합성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다. 즉 권리 할당은 사람들에게 본성에 맞는 역할을 찾아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역할을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다.
마이클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서술을 통해 위에서 열거한 외에도 정의와 도덕과 종교의 관점에서 서로 상충되는 많은 예시들을 열거하였으며, 현실 정치와 사회적인 이슈가 된 문제들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 어떤 입장이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많은 질문을 던진다.
결국, 마이클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명제를 던지고는 그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 못한다. 처음 책을 집어 들었을 때, 나름대로 마이클 샌델의 정의에 대하여 적잖은 기대감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책장을 덮고서도 '정의'를 알지 못하겠다.
다만, 마이클 샌델은 오랜 강의와 토론 경험을 통해 정의를 논 할 수 있는 명제들을 많이 수집한 것은 사실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범위가 넓은 철학적인 명제에 대하여 명쾌하게 정의를 내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책의 제목 선정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무튼 나는 이 책을 통하여 '정의'라는 명제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새삼 새기게 되었으며, 책의 내용을 알았다면 이 책을 잡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