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전역 가는 길
길을 찾아 길을 떠난다. 누가 그 길을 내었는지 모르지만, 그들도 길을 찾아 길을 떠났던 사람들이다. 한때는 행복을 �아 길을 떠나고, 또 다른 때에는 슬픔에 쫓겨 길을 떠난다. 내가 걸어가는 길 위에서 행복이 뭔지, 슬픔이 뭔지 재어보지는 않았지만 길 위에 서면 언제나 괴는 그리움을 지우다 만 철없는 방랑자가 된다.
새침한 한기가 볼떼기에 옴팡지게 안기는 이른 아침, 가족들 모두 선잠을 깨어 거리로 나왔다. 택시기사가 길을 막는다. 청량리역까지는 너무 멀어서 안가겠단다. 고요함이 햇살을 깨우는 소름 돋도록 한산한 길을 멀어서 안가겠다니 선뜻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녀는 아마 다섯 식구가 택시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는 폼이 부담스러웠나보다.
추전역 가는 길, 첫 걸음부터 삐끗거린다. 다음 택시를 탔다. “이렇게 길이 뻥뻥 뚫렸는데 멀수록 더 좋지요” 라며 잠시 방황으로 마음이 상했을 우리를 달랜다. 길 위에서 길을 먹고 사는 사람들도 길을 찾는 방법이 다르다. 그렇다. 길은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많이 있으며 그 길에 이르는 길도 그만큼이다.
청량리역은 아침부터 부산하다. 철도청에서 마련한 관광 전용 열차에는 길을 찾는 사람들로 빼곡하다. 길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이 같은 기차를 타고 같은 길 위에 섰다. 기차 안에 탄 사람들이 찾는 길은 모두가 다르다. 심지어 같은 피를 나눈 가족들도 길의 크기나 색깔, 그 모양이 다르다. 나는 내 자신이 찾아야 할 길이 구체적으로 뭔지도 잘 알지 못하지만 막연하게 웅성거리는 그 길을 찾으려고 길을 떠난다.
열차 안은 꼭 작은 우주를 내려놓은듯하다. 공부에 지친 아이들은 차에 오르자마자 곯아떨어진다. 또래들과 경쟁하면서 살아가기가 만만치 않은가보다. 또 몇몇 중년의 아줌마들은 음악을 틀어놓고 술잔을 기울이며 춤을 춘다. 얼굴을 찌푸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의 신선한 용기에 잠시 자신을 잊고 눈을 떼지 못하고 침을 꿀꺽 삼키는 사람들도 있다.
세상은 내 가슴 보다 더 넓으며 내 마음으로 헤아릴 수 있는 숫자보다 더 많다. 그들의 길이다. 누가 누구를 탓하랴. 함께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방해를 줄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길이 잘못되었다고 꼬집을 수는 없다. 기차는 사람들이 품고 있던 길을 제멋대로 흔들어대며 눈길을 힘겹게 씩씩거리며 달린다.
한때 온 세상을 까맣게 물들이며 검은 돈으로 문전성시를 이뤘던 태백선 주변의 풍경들은 다 타버린 연탄재처럼 온기를 잃었다. 엄마 손을 놓쳐 길을 잃어버린 코 흘리게 아이들같이 망연자실한 모습이다. 엄동설한에 저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나. 객쩍은 노파심은 둔탁하게 내 뱉는 기차소리를 원망한다. 텅 비어버린 가슴에는 지난날의 회상이 쌓인다.
까만 피부를 가진 예쁜 애인을 제 마음껏 애무하며 사랑을 녹여내던 기차는 이제 더 이상 오르가즘에 이를 수 없음을 안다. 그는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빈 가슴을 원망하며 가슴앓이에 몸서리를 치다가 중년에 새롭게 찾은 하얀 사랑의 행복에 젖는다. 하얀 캔버스를 가위로 자르듯 매끄럽게 지구를 베어나가며 자신감을 되찾은 사랑은 해가 저물어도 두려움을 모른다.
처음에 이 길을 만들었던 사람들을 떠 올려본다. 그들은 그들의 길을 찾았을까. 그들이 지나간 발자국을 따라 해발 855미터에 위치한 추전역에 다다랐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기차역이다. 손바닥 만 한 터에 웅크리고 있던 역사는 제 얼굴보다 더 큰 이름표를 이마에 달고 객들을 반긴다. 겸연쩍은 미소가 어색하지는 않지만 수줍다.
추전역에는 순박한 오징어를 구워서 파는 아저씨가 더디게 익는 오징어를 꿋꿋하게 익혀가며 인심을 판다. 갓 쪄서 콩고물을 묻혀낸 취떡을 파는 할머니는 한쪽 팔을 잃었지만 한꺼번에 몰아닥친 사람들의 눈빛을 읽는 데는 오히려 덤이 남는다. 곶감을 파는 아저씨와 강냉이 뻥튀기를 파는 아줌마는 두리번거리는 한숨 사이로 깨알 같은 질투를 뱉어낸다.
역사앞마당에 석탄을 나르던 광차가 궤도위에 앉아서 졸고 있다. 그 옛날의 영화는 잊었는지 무표정한 얼굴로 우리들을 맞는다. 그에게도 꿈은 있었겠지. 이제 아무렇게나 구겨진 꿈을 기억하기도 지쳤을까. 원망하듯 늘어진 폼이 가슴을 짠하게 한다.
눈발이 희끗희끗 뿌려대는 추전역을 뒤로하고 기차는 밀려나간다. 행여 꿈 자락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하여 추전역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다. 보물지도를 가슴에 품고 숨 가쁘게 달려왔건만, 정작 내가 찾아야 할 보물은 없다. 누가 훔쳐 간 것일까. 아니면 지도를 잘못 가져왔을까. 내가 찾고자 했던 길은 이 길이 아니었음을 알아차리는 데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나의 길은 오직 내 마음속에 있다. 그 길을 찾아가는 길은 가슴에 있다. 내가 나의 길을 찾는 데는 보물지도가 필요 없으며, 남이 내어 놓았던 길을 부러워할 일도 아니다.
차창밖으로 열리는 겨울액자에는 빙벽을 타는 사람들이 겨울을 녹이고 있다.
왜 저들은 저렇게 춥고 위험한 곳에서 즐거움을 찾는걸까.
추전역을 지나서 하늘도 세평, 땅도 세평, 꽃밭도 세평이라는 승부역에 도착했다.
오직 기차가 아니면 접근할 수 없는 간이역이지만, 승부역에는 역사가 없다.
승부역에는 잠시 쉬어가는 관광객을 위하여 썰매장을 만들어놨다..
잠시 동심이 조잘거린다.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영암선 개통기념" 탑이다..
인간과 역사...그리고 기차의 묘한 조화를 생각하게 하는 탑이다.
* 일 시 : 2008년 1월 20일(일)
'記 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산 마애삼존불상 - 백제의 미소 (0) | 2008.02.09 |
---|---|
개심사 (0) | 2008.02.09 |
양포항 (0) | 2007.12.11 |
길상사 (0) | 2007.11.19 |
고궁의 가을 - 창덕궁 (0) | 2007.1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