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마 라 톤

스포츠 서울 하프마라톤(Half-42)

[엉성한 페이스메이커]
 
페이스메이커가 되기로 했다. 그동안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으며 마라톤을 이어왔기에, 언젠가는 꼭 해보고 싶은 역할이었다. 하지만 풀코스는 고사하고 하프마라톤에서도 페이스메이커는 결코 쉽지 않다. 옛 직장 동료 S는 최근 달리기를 시작했고, 10km 대회 세 번의 경험 중 최고 기록은 1시간 11분. 이번에 내가 맡은 임무는 바로 **‘1시간 10분대의 벽 깨주기’**였다. 
 
이른 아침 광화문 광장에는 수천 명의 건각들이 참새떼들처럼 모여들었다. 다행히 달리기에 적당한 날씨여서 저마다 모이를 찾기 위한 자신감이 넘친다. 첫 도전장을 내민 어설픈 페이스메이커가 된 나는 S에게 이런저런 마라톤 팁을 주섬주섬 챙기며 전문 페이스메이커 흉내를 냈다. 사실 풀코스, 하프코스는 달려봤지만, 10km 마라톤 대회에 출전해 본 경험은 없다. 평소 기록이 1시간 이내라는 이유로 10분의 여유를 가지고 페이스를 이끌면 되는 일이어서 큰 걱정은 아니어도 내심 잘 리더 할지 염려는 된다. 
 
하프마라톤 주자들이 먼저 출발했고, 가장 마지막 출발대에 선 것도 처음이었다. 늦게 출발하는 이들의 마음을 잠시나마 이해하게 된 시간이었다. 드디어 출발 신호가 울리고, 광화문을 벗어나 충장로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병목 현상이 발생한다. 초반 1km는 7분 페이스. S도 무리 없이 잘 따라왔다. 마포로 가는 길에 약간의 업힐이 있었지만 큰 변수는 아니었다. 
 
5km 지나 마포대교에 이르러 S는 조금 힘들어한다. 마포대교 1.5km 구간은 직선구간이고 강바람을 맞으며 헤쳐나가야 하는 코스여서 다소 지루하고 힘들다. 속도가 조금 늦어지는 틈으로 휠체어 팀들이 앞서간다. 그 뒤를 이어 별난 복장을 한 남녀 동반 팀도 우리를 질러간다. 이쯤에서 까먹은 시간을 보상하기 위해 속도를 조금 올리고 싶었는데, 쉽지 않다. 그렇다고 무리할 수는 없는 일. 상태를 살피며 응원을 보낸다. S는 빨리 달리지는 못하지만 초보 러너치고는 안정된 폼을 갖췄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연습량이다. 
 
마포대교 지나 여의대로 진입할 때쯤, 쪼리슬리퍼를 신고 달리던 러너가 우리 뒤꿈치를 잡았다. 그에게 "대단하십니다. 쪼리슬리퍼를 신고 어떻게 달려요?"라며 말 붙였더니 그가 되려 "그 연세에 대단하십니다"라고 덮어 씌운다. 몸집이 큰 그가 겨울 마라톤에 쪼리슬리퍼를 신고 달릴 생각을 했다는 게 더 신기하다. 잠시 함께 뛰던 그는 "페이스메이커세요?"라고 반문한다. 어정쩡하게 "네"라고 대답했다.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맡아서 달리기는 하지만, 페이스메이커 역할이 쉽지 않음을 실감했다. 고백하건대, 페이스를 제대로 이끌지 못했다. 동반자가 쉽게 따라오도록 일정한 속도로 유지하면서 동반자의 능력치를 올릴 수 있도록 페이스를 끌어줘야 하는데, 초보 페이스메이커인 나는 동반자의 페이스에 맞추기 급급했다.
 
결승점 1km를 남기고 전력질주 할 것을 주문했다. S는 100m 정도 힘껏 달리다가 속도를 늦췄다. 그에게 빨리 달릴 여분의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1시간 11분의 기록으로 마무리했다. 비록 개인 기록 경신에는 실패했지만, 적어도 끝까지 걷지 않고 완주했다는데 더 큰 의미가 있다. 
 
페이스메이커 첫 도전은 실패였다. 동반자가 아무 고민하지 않고 달리기에만 열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지 못한 점은 미안함으로 남는다. 사진 찍겠다고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며 혼란스럽게 한 것도 초보 페이스메이커의 실패 요인이다. 여러모로 반성할 점이 많지만, 이번 실패 덕분에 나는 오히려 우쭐하지 않는, 겸손한 러너가 되었다. 언젠가 다시 기회가 온다면, 이번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대로 된 페이스를 이끌어 보고 싶다. 
 
[일시] 2025년 11월 30일
[대회] 스포츠서울 하프마라톤 대회(광화문에서 여의도 공원까지)
[기록] 1시간 11분 (10km)
 

광화문 광장
충장로
휠체어 마라톤
쪼리슬리퍼 러너

728x90

'마 라 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하의 한강변에서 믿음을 채우다  (11) 2026.01.27
멈출 줄 아는 용기  (9) 2025.12.29
과천마라톤  (13) 2025.11.10
강남국제평화마라톤(Full-47)  (11) 2025.10.10
동대문 마라톤(Half-41)  (13) 2025.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