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나름의 의식이다.
성대한 잔치를 벌리지는 않았어도 마음 속으로는 일년내내 준비한 거룩한 행사이다.
지난 5월 말경 지리산에 찾아들기 위하여 많은 준비를 하였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이루지 못했다.
날씨는 점점 더워지고 기회는 자꾸 어긋나고 있었던 터라 남모르게 안달이 났었다.
삼복더위에 무박으로 안부를 여쭙기로 마음을 정했다.
워낙 날씨가 더운 요즘이라 내심 걱정이 많았다.
산장에서 하룻밤을 묵으면 모를까 무박으로 종주를 하려면 힘이 많이 들 것이다.
잘 해낼 수 있을까.
중도에 하산 하는 일이 있더라도 일단 마음을 정했으니 가야만 한다.
기회를 또 미루면 마음의 짐만 늘어나게 마련이어서 다음에 지리산을 뵐 면복이 없다.
일년에 한 번 씩 의식처럼 행하여 오던 지리산 종주.
삼복더위에 도전하는 것은 처음이다.
지리산은 늘상 그 자리에서 그 모습으로 무던히 앉아 있다.
전국이 열대야로 들썩이는데 성삼재 들머리의 서늘한 공기는 겉옷을 찾게 만든다.
얼추 벽소령에 이르기까지 안개와 구름이 뒤덮혀 산이 보이지 않았다.
지리산에서 산을 볼 수 없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이윽고 안개가 걷히자 산에는 아무것도 없다.
오직 산줄기마다 산들만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지리산 등로 주변에는 여름꽃들이 한창이다.
꽃을 외면하고는 그 길을 지나칠 수 없으며,
꽃들에게 일일이 눈길을 주려면 그 꽃들이 질 때까지 지리산에 머물러야만 할 것이다.
이렇게 더운 날에
이렇게 높은 곳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꽃을 피웠으니
당신의 숭고한 생명을 어떻게 흐트러진 감상으로 넘길수야 있겠는가.
봄 산의 꽃들은 같은 무리의 꽃들이 군락을 이루며 피지만
여름 산의 꽃들은 갖가지 제 모습들을 연출하며 옹조종기 피어있다.
여름에는 보라색 꽃들이 많이 핀다.
무슨 이유였을까.
어떤 이유였던 간에 지친 산객들에게는 지친 호흡을 다독거려 주는 손길이다.
장터목에 이를 때쯤 완전히 시야가 열린다.
그 대가로 따가운 햇볕을 얻었다.
그런데 예상외로 덥지는 않다.
오히려 따가운 햇볕이 눅눅한 공기를 말려주어서 뽀송뽀송해지는 느낌이다.
제석산 오르막 등로를 오르며
여전히 꼿꼿하게 서 있는 고사목들에게 잠시 안부를 나누고 정상을 향한다.
그런데 고사목들도 몇 년 사이에 많이 사라진 듯하다.
그들도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나보다.
그래서 생명이 다 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가보다.
무릇 생명은 흔적을 남기지 말아야 한다.
나도 세상에 태어난 빚이 있다면 생명이었으니까.
흔적을 남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어떻게 흔적을 남기지 않을 것인가.
한 점의 흔적도 남기지 않을 수 있다면 세상에 태어나 살았던 빚을 그나마 조금은 갚을 수 있지 않을까.
천왕봉 부근의 큰 바위에 큼지막한 이름들을 새겼다.
영원히 살 것 처럼 이름을 새겼지만 그들은 아직 살아 있을까.
아니면 죽었을까.
죽었다면 왜 흔적을 남겼을까.
죽고 싶지 않아서 그랬을까.
죽을 줄 알았다면,
생명으로 살았다면 흔적을 남기지 말았으면 좋지 않았을까.
천왕봉 정상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최근에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문제로 여론이 시끄러웠는데
그런 줄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무덤덤하다.
케이블카를 설치하지 않아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붐벼서 정상석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 찍기 어려운데
케이블카를 설치하면 얼마나 몸살을 할까.
당분간은 케이블카를 설치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다.
하산 길에 친구를 만났다.
많은 세월이 흘렀던 터라 알아보기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꼭 집어냈는지
눈살미가 예사롭지 않구나.
사실 나는 깊이 알지 못하는 친구지만
친구라는 이름으로 지리산을 들썩이며 잠시 웃음을 나눴다.
대한민국
넓은 땅에서
그 많은 사람 중에
지리산 하산 길에 오랜 친구를 만나다니
인연이란 한 번의 만남으로 매듭이 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매듭이 다 풀어져야 할 때까지는 매듭을 짓고 있는 것이 인연이니라.
지리산 종주를 마치면서
힘든 다리를 절뚝이며 다시 천왕봉을 올려다본다.
다시 만납시다.
* 일 시 : 2012년 8월 4일
* 산 행 로 : 성삼재 - 노고단 - 임걸령 - 삼도봉 - 토끼봉 - 명선봉 - 형제봉 - 벽소령 - 칠선봉 - 세석 - 촛대봉 - 삼신봉 - 장터목 - 제석봉 - 천왕봉 - 중산리
* 산행시간 : 11시간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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