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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티벳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

by 桃溪도계 2009.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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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중국은 티베트를 포기 못하나..?

티베트 역사

 

 티베트는 중국과 인도의 사이에 위치해 있으나
히말라야 산맥과 티베트 고원에 둘러싸여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히말라야 산맥의 북측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지역의 평균 고도가 4900m가 넘어,

[세계의 지붕]이라고 일컬어진다.
티베트는 지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고립된 지역이다.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중립을 지킨 티베트는 이후 독립정부를 구성했으나 1950년,
중공군이 침공, 통치가 시작된다.

1951년 중공의 종주권과 티베트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평화협정이 체결된 후,
수도 라싸에 중공의 군사사령부를 두고 시캉성(西康省) 창두 지구에 편입된다.

 


 

이후 중국의 박해로 인한 티베트인의 반란과 시위는 계속됐다.
특히 1959년 제14대 달라이 라마를 지도자로 내세운 반란이 대표적이다.

 


 

1965년 티베트를 자치구로 만들어 민족자치를 인정한 중국 정부는
1980년대에 들어서며 통치를 완화했다.
14대 달라이 라마는 1989년 티베트의 비폭력 독립 운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중국이 이번의 티베트 민중 봉기를 계기로 티베트의 독립 의지를 꺾기 위한 방편으로
티베트 불교의 미래 지도자들을 길들이기 위한 공작을 본격화 할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달라이 라마를 비롯한 티베트 불교의 지도부는 망명정부를 구성하여 인도에
있기 때문에 티베트의 승려들은 달라이라마와는 거리적으로 단절되어 있는 반면
중국 정부의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소요사태가 발생한 것은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거리적인 분리에도 불구하고 티베트 불교에 대한 달라이라마의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음을 체험적으로 확인한 것이다.

 

 

중국이 티베트를 포기 못하는 이유.


 

지난 3월14일, 분리 독립을 요구한 티베트 시위대에 중국 진압대가 발포하며
불거진 유혈사태가 국제사회문제로 번지고 있다.
이틀 후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중국은 평화를 유지하는 체하며
공포 통치를 자행하고 있다]며 국제사회에 호소한 후, 사태는 4개월 후
개막될 베이징올림픽으로 집중 되었다.

 


 

유럽 지도자들의 개막식 불참 선언이 이어지는 가운데
티베트의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도 국경을 넘어 전 세계로 퍼져 나가는 형국.
중국 당국이 국제사회의 이목을 고려해 각국 기자들을 티베트로 불러들였지만

오히려 역효과를 낳는 분위기였다.
유럽을 돌던 올림픽 성화가 시위대의 급습으로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올림픽을 앞둔 중국은 국제사회의 문제로 지적되어 온
티베트의 독립을 허용하지 않는 걸까?
인도와 네팔의 북쪽에 위치한 티베트(수도 라싸(拉薩))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세계의 지붕] 자치구의 평균 해발이 4000m가 넘는다.

 



언뜻 보면 관광자원 외에 척박한 땅으로 볼 수 있겠지만
국제문제 전문가들은 중국의 입장에서 포기할 수 없는 두 가지 원인을 지적한다.

 


 

우선 금강석과 마그네슘 등 70종이 넘게 매장되어 있는 천연자원이 그것.
중국의 칭하이성과 라싸의 철도(2006. 7)가 개통된 이후
주변에서만 2000만t의 구리와 1000만t의 납과 아연이 매장된 것으로 밝혀졌다.


 

우라늄 광산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매력덩어리.
두 번째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다.


 

인도와 인접해 군사전략적 요충지일 뿐 아니라 무기개발이 용이한
고원지대의 특성이 작용하고 있다.
올림픽을 앞두고 티베트 사태가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 국제사회의
이목은 중국의 행보에 이목을 집중하였었다.


■ 14대 달라이 라마, 그는 누구인가? ■
텐진 갸초(Tenzin Gyatso)

 

티베트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4살 때 달라이 라마로 공식 인정받았다.
그는 6세부터 라싸에서 달라이 라마로 본격적인 교육을 받기 시작한다.
예부터 전해지는 수백 권의 티베트 경전뿐만 아니라 형이상학,
예술과 공예, 의학, 변증법, 산스크리트까지 배웠다.
16세에 티베트 정부 수반이 된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를 점령한 중공에
끊임없이 타협안을 제시했지만 성공되지 못했다.

탄압이 심해지자 1959년 달라이 라마 일행은 군인복장으로 인도로 망명한다.
인도에서 망명정부를 꾸린 달라이 라마는 35권 이상의 책을 저술했으며,
책은 베스트 셀러가 되었으며, 혹독한 시련을 겪은 달라이 라마는
자서전격인 책에서도 중국에 대한 원망 같은 것을 담지 않았다.

그는 또 세계를  돌며 강의를 한다.
달라이 라마는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비폭력과 대화를 가장 중시한다 .
중국의 가혹한 억압과 탄압을 받으면서도 그의 연설에는 유머감각과
모든 생명체를 향한 연민이 깃들어있다.

그의 활동으로 현재 세계 여러 기구에서는 티베트에서 자행되는 인권탄압을
세계에 알리는 데 일조하며, 티베트 국민이 민족 문화 종교적 정체성을 보존하고
발전시킬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 달라이 라마의 의미 ■

 

[달라이 라마]라는 단어는[지혜의 바다] 혹은 [큰 지혜를 가진 큰 스승]으로 번역되어 있다.
실제로 [달라이 Dalai]는[큰바다]라는 뜻을 가진 몽골어이고
[라마 Lama]는 스승이라는 뜻을 가진 인도어 [구루 guru]에 해당하는 티베트어 이다.
 
그래서 때로는 달라이 라마라는 말이 상술한 것처럼 [지혜의 바다]라는
고유명사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달라이 라마] 자신은 그의 저서 [유배된 자유]에서
이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에 따르면 애초에 달라이는 3대 달라이 라마의 이름인 [쇼남 갸초]를
부분 번역한 것이고 달라이 라마라는 말도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갸초]는 티베트어로 [바다]라는 뜻이다.

3대 달라이 라마 [쇼남 갸초]는 징기스칸의 후예인 칸 황제를 만났고
칸은 그에게 감회되어서 그에게 몽고어로 [달라이]라는 칭호를 내렸다고 한다.
이것이 공식적인 달라이 라마 제도의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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