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공산성
옹진성 또는 쌍수산성으로 불리기도 하는 공산성은 서기 475년 백제 문주왕때 이곳으로 천도하여 부여로 도읍지를 옮기기 전까지
64년동안 백제의 도읍지였던 옹진(곰나루)은 백제의 영혼과 꿈을 간직한채 그 희미한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축조 당시에는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고쳐 쌓았다고 한다.
성안에는 영은사를 비롯한 각종 정자와 누각이 복원되어 제법 위엄있는 모습이다.
공산성은 규모가 크거나 화려한 성은 아니다.
야트막한 야산에 아담하게 쌓은 성이지만 한 면으로는 금강을 끼고 있어 요새의 격을 갖추었다.
쪼무래기들이 옹기종기 모여들어 선생님의 설명을 듣는다.
그들이 공산성을 어떻게 가슴에 담아둘까 적잖이 호기심이 인다.
나는 잠시 그들의 호기심 속으로 들어가서 백제의 멋진 용사가 되어본다.
백제의 안녕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성문에 섰던 이름모를 병사
그는 백제의 영혼을 이어가기 위하여 입술을 굳게 다물고 오월의 땡볕에 눈을 부라렸으리라.
오월의 향기를 마음껏 담아내고 있는 공산성은 아담하고 귀엽기까지 하다.
이 성을 쌓고 가슴 뿌듯해 했을 백제인들이 얼마나 행복했을까.
그들의 해맑은 자부심은 아직 성벽에 남아 있다.
내가 성문을 열고 들어갈때 가슴 가득 뿌듯하게 차오르는 말 못할 자신감이 그때의 힘찬 기운을 느끼게 한다.
수문장 교대식을 연출하고 있다.
병사들의 연기가 좀은 어설프지만 그냥 웃고 지나칠 일은 아니다.
나는 잠시 성벽에 올라
큰 칼을 빼고 적들을 향하여 눈을 부라려본다.
천하무적 백제...
그들의 웅혼한 기상을 가슴에 담아본다.
세상이 두렵지 않다...
영원하라 백제여!
쌍수정에는 가슴아픈 사연이 묻어있다.
1623년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 파천시 머물렀던 장소이며
이 곳에는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는데, 인조는 환도시에 쌍수에 정 3품 대부작을 하사하였다.
그 후 나무는 죽고 구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유지를 기념하기 위하여 관찰사 이수항이 영조 10년에 쌍수정을 건립한 것으로 전한다.
쌍수정은 원래 조선시대 누각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으나
수차레 복원과정을 거치면서 지금의 쌍수정은 원형과는 좀 다른 모습이다
공산성에서 인조가 파천시에
임씨 부인이 인조를 위하여 정성스럽게 떡을 해 올렸는데 그 맛이 절미였다 한다.
그래서 임씨 부인이 만든 절미라 하여 임절미라 불렸는데,
그 후 인절미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그래서 공주를 일컬어 인절미의 고장이라 한다고 전해진다.
공산성 제일 높은 곳에
가장 웅장하고 위엄있는 모습으로 버티고 있는 임류각지..
임류각지는 백제가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후 25년 되던 해 백제 24대 동성왕 22년에 축조된 누각으로서 2층으로 이루어져있다.
임류각에 올라서면 공주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금강이 끊어질듯 이어질듯 공산성을 돌아 흐르고 있다.
공산성이 만들어지던 1,500년 전에도 이렇게 유유히 흘렀을 강이다.
그냥 말 없이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금강에는
아직도 백제의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다.
그들의 숨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기지국이 멀어서 신호가 원할치 않아서 그럴까.
여유가 생기면 공산성 부근에도 기지국 하나 세워야겠다.
그래서 백제인들의 이야기를 세세하게 들어보고 싶다.
영은사 앞 뜰에서 금강쪽을 향하여 공산성의 암문이 있다.
암문을 지나면 연지와 만하루지가 세월의 한 켠에서 다정하게 손잡고 있다.
이 암문을 통하여 성안과 성밖의 정보와 보급품을 전달하였을 것이다.
금강을 건너온 비밀 첩자들이 성안과 내통하기 위하여 숨을 죽이며 건넜을 금강에는
지금도 딸꾹질을 할까봐 조심스럽게 흐르는 듯하다.
격식없이 지어진 영은사는
오월의 마지막 땡볕에서 졸고있다.
법당 문이 열려있지만 스님도 없고 불자도 없고...
경내에는 견학 나온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절간의 고요함을 깨운다.
저 아이들에게
백제는 무엇이며 역사는 무엇일까.
또 산성은 무엇이며
공산성의 미래는 어떻게 기억될까.
* 일 시 : 2009년 5월 31일
* 위 치 : 충청남도 공주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