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세계 종교 둘러보기
[머리에]
본 독후감은 독후감이라기 보다는 '요약'이다. 원본에 충실하여 요약하다보니 장문의 글이 되었다.
첫 장 부터 모조리 읽기 보다는, 관심 있는 종교편 부터 먼저 골라서 읽고, 유사 종교와 비교하면서 읽으면 덜 지루할 것이므로 추천한다.
세계종교 둘러보기
지은이 : 오강남(서울대학교 종교학과 졸업, 캐나다 자이나 대학교 비교종교학 명예교수)
저서 : [종교, 심층을 보다] [예수는 없다] [ 종교란 무엇인가] 외 다수
발행일 : 2003. 06. 20(초판), 2013. 08. 26(개정판)
[지구촌 사람들은 무엇을 믿고 있는가]
바쁜 세상에 남의 종교는 알아서 뭐 하자는 것인가? 내 종교도 다 알지 못하는 형편에 남의 종교까지 알 필요가 뭔가? 작가는 이 궁극의 질문에 답을 내놓고자 한다. 종교학의 창시자 막스 뮐러는 “하나의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종교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종교에 대해서 당연히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기 쉽지만, 뮐러에 따르면 그것은 착각이라는 것이다.
신학자 한스 큉은 “종교 간의 대화 없이 종교 간의 평화가 있을 수 없고, 종교 간의 평화 없이 세계평화가 있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종교 간의 대화는 내 이웃의 종교를 더욱 깊이 이해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다른 종교를 거짓된 것으로 배척하는 독선적 태도는 다른 종교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종교의 진리도 편협하게 이해하는 것으로 성숙한 종교의식이라 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이웃의 종교를 더욱 깊이 이해하는 것은, 종교 간 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한 ‘윤리적 명령’이며, 다원주의 사회의 세계시민으로서 가질 수밖에 없는 ‘지구 윤리적 관심’이라고 작가는 강조한다.
인간 세계에서 종교적 관념은 떼어 낼 수 없는 본능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것이 동물과 다른 점이다. ‘종교적’이라는 정의는 교회나 절을 가야 하는 편협된 의미의 해석이 아니라, 인간 본성 자체에서 종교적 체험에 의한 참된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자세가 깊은 의미의 종교적 자세라 할 수 있다. 현대 사회가 복잡하고 실용적으로 심화 될수록 외형적인 종교는 줄어드는 반면에 인간 내면에 잠재된 종교적 자세는 더욱 강하고 깊어지고 있는 경향이 있다. 작가는 저서를 통하여 역사적으로 변해가면서 흘러온 종교적 전통의 맥을 살펴보고 짚어보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종교를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고 궁극적으로 인류 보편의 가치인 평화에 일조하고 싶음이다.
[흰두교]
‘힌두’라는 말은 ‘인도’라는 말과 같다. 지금의 인더스강 지역을 옛날에 ‘신두’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인디아, 인더스, 힌두 등의 말이 파생되었다. 힌두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창시자가 없다. 즉, 힌두교는 현존하는 종교 중에 가장 오래되고 복잡한 종교라는 뜻이다.
힌두교는 기원전 3,000년 ~ 기원전 2,000년경 인도 서북쪽에 있는 인더스 연안 계곡에 소규모 도시국가가 상당수 존재했었는데. 이를 모헨조다로 문명이라고도 한다. 이 문명은 세계 최초로 계획에 의해 형성된 도시국가였다. 아직 해독되지 않았지만, 고고학자들에 의해 문자가 발견되었으며, 공중목욕탕이나 관개시설도 갖추었다. 가축을 기르고 벽돌로 공공건물도 지었다는 유적이 발견되어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버금가거나 더 우수한 문명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한다.
인더스 계곡 문명이 힌두교 전통에 공헌한 것이 두 가지인데, 첫째는 우주를 음양으로 보았을 때, 음에 해당하는 여성성 혹은 창조성을 강조한 것과 둘째는 만물이 한 번 죽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계속 돌고 돈다고 보는 윤회 사상을 남겨준 것이라고 한다.
고전힌두교
(리그베다)
기원전 15세기경 아리안족이 신에게 예배의식을 위해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나중에 이를 모아 ‘앎‘이라는 의미의 ’베다’라고 했다. ‘베다’ 중에 ‘리그베다’가 가장 오래되고 중요하다. ‘리그베다’ 전문가인 막스 뮐러는 ‘리그베다’에 나타난 종교사상을 ‘자연 숭배’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자연은 어떤 성스러운 힘이 있다고 느낀 대상물을 말한다. 이런 대상물들은 의인화되고 신격화되어 찬양과 기도의 대상이 된다. 대표적인 것이 태양신 ‘수리야’, 불의 신 ‘아그니’, 폭풍의 신 ‘인드라’ 등이 있다.
이처럼 ‘리그베다’는 여러 신을 숭배하므로 다신론이라 할 수 있지만, 그 신 중에 한 신을 가장 중요한 주신으로 숭배하므로 막스 뮐러는 이를 일러 ‘단일신론’이라 정의했다. 다신론이 여러 신을 두루 섬기는 것인데 비해 단일신론은 그 중 어느 한 신을 택해 특별히 경배하는 점을 부각하는 것이다. 유일신론이 다른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오로지 한 신만을 경배하는데, 비해 단일신론은 다른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은 채 한 신을 경배하는 점이 다르다.
(우파니샤드)
기원전 10세기경 베다 후기에 새로 생겨난 문헌으로 ‘브라흐마나’가 있다. 이 문헌은 제사장 계급인 브라만이 제사 지낼 때 필요한 ‘제사 요람’ 같은 것이다. 그 후 기원전 9세기~7세기에 ‘우파니샤드’라는 문헌이 생겼다. ‘우파니샤드’란 학생이 스승 가까이에 경건히 앉아서 우주와 인생의 깊은 뜻을 찾아 서로 대화한 기록이라는 뜻이다.
주목할 것은 ‘우파니샤드’는 세계 종교사에서 최초로 대화체로 된 문헌이라는 점과 대화를 이끄는 스승은 제사장 계급에 속한 사람뿐 아니라 무사 계급에 속한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다. ‘리그베다’는 구원의 수단으로 기도가 중요시되고, ‘브라흐마나’에서는 제사가 중요시된 데에 반해, ‘우파니샤드’는 이해 혹은 깨달음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강조되었다.
(마누법도론)
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경에 생긴 ‘마누법도론’은 힌두교 인의 실제 종교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종교적 고전이라 할 수 있다. ‘마누법도론’에는 어떻게 사는 것이 경건한 삶인가. 참회와 고백은 어떻게 할까에 대한 구체적인 교훈으로 가득하다. 이 중 특히 중요한 것은, 삶의 네 단계, 삶의 네 가지 목적을 규정한 ‘사성 제도’이다.
‘사성 제도’란 첫째는 제사장 계급에 속하는 ‘브라만’, 둘째는 무사 계급에 속하는 ‘크샤트리아’, 셋째는 상공인이나 농부 등 장인 계급에 속하는 ‘바이샤’, 넷째는 단순 노동자 계급이나 종에 속하는 ‘수드라’이다, 그 밑으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불가촉천민이 있다.
삶의 네 단계는 힌두 사회에는 평생을 통하여 거쳐야 할 단계가 있다. 첫째, ‘베다’ 경전을 읽고 배우는 ‘학생’ 단계. 둘째, 결혼하고 자식을 기르는 등 사회에서 주어진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재가자’ 단계. 셋째, 자식이 다 자라고 가장으로서 할 일이 끝나면 숲으로 들어가 명상하고 신에게 제사 지내는 ‘숲속 거주자’ 단계. 넷째, 부인과도 결별하고 완전히 속세를 떠나 걸식을 하고 고행과 명상에 전념하는 ‘출가수행자’ 단계이다. 수드라나 천민은 ‘베다’를 읽거나 들을 수 없으므로 상류 세 계급에만 허용되지만, 실제로는 상류계급에 속하는 사람들도 셋째와 넷째 단계는 이번 생에서 이루지 못하고 다음 생으로 미루는 형편이다.
삶의 네 가지 목적은 첫째는 즐거움, 둘째는 재산, 셋째는 의무, 넷째는 목샤이다. 이 중에서 부와 즐거움은 인생의 전부가 아니고 결국 사회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목샤(해탈)를 얻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는다.
(바가바드 기타)
기원전 2세기~기원후 3세기경에 생겨난 ‘바가바드 기타’는 인도 종교사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경전이다. ‘바가바드 기타’에는 이전까지의 모든 종교 사상이 흘러 들어가 있고, 또 거기서 이후 모든 종교 사상이 흘러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힌두교 역사상 중요한 문헌이다.
‘주님의 노래’라는 의미의 ‘바가바드 기타’는 ‘신애(信愛)’가 종교 생활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경전이다.
신애를 통해 ‘태생이 천한 사람, 여자, 바이샤, 그리고 수드라도 지고의 목표에 이르게 될 수 있다고 선언한다. 지금껏 여자나 하층 계급으로 태어난 사람은 이번 생에서는 구원에 도달할 수가 없고 오로지 선업(善業)을 쌓아 다음 생에서 남자나 더 높은 계급으로 태어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바가바드 기타‘에서는 여자나 수드라도 금욕적인 생활, 명상 등 요가 수행, 사성 제도를 비롯한 법과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여 목샤에 이르는 ’크리슈나‘를 경배하고 사랑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보장한다. 이것은 인도 종교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인 셈이다.
고전 이후의 힌두교
(삼신경배)
고전 이후 힌두교에는 ’삼신‘이 크게 부각 된다. 첫째는 창조의 신인 ’브라흐마‘, 둘째는 파괴의 신인 ’시바‘, 셋째는 보존의 신이 ’비슈누‘이다. 이 중에, 하나를 믿고 헌신하면 목샤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다.
창조의 신 ’브라흐마‘는 남성 명사로서 창조신으로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지만, 그에게 경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런 현상은 세계 여러 종교에서 발견되는 일반적 현상이다.
파괴와 죽음의 신 ’시바‘는 파괴의 신이면서 경배를 받는 것은 파괴가 또 다른 건설을 위한 전제 조건이라는 뜻으로 좋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특히 많은 고행자나 수행자가 시바를 경배하는 것은 옛 자아를 죽이고 새로운 자아로 태어나는 데 시바가 도와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시바는 춤의 신이기도 하다. 그의 춤 때문에 우주 생성과 파괴의 리듬이 가능하다고 한다. 시바는 식물, 동물, 인간의 생식을 관장하는 신이기도 하다. 죽음은 새로 태어남의 전제 조건이므로 죽음을 관리하는 신은 새로 태어남과 성(性)을 관리하는 신이기도 하다. 시바를 섬기는 사람들은 시바가 실제로 창조의 신, 파괴의 신, 보존의 신을 다 합한 신, 심지어 우주 만물의 궁극 실재 자체라고 믿는다.
보존의 신 ’비슈누‘는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신이기도 하고, 장난 혹은 유희의 신이기도 하다. 비슈누는 인류를 위한 사랑으로 세상이 혼탁해질 때마다 인류를 돕기 위해 여러 모습으로 인간에게 나타난다. 나중에 불교가 등장하자 붓다는 바로 비슈누의 현현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시바를 경배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비슈누를 섬기는 사람들도 비슈누를 궁극의 실제로 경배한다. 이들은 자신의 고행이나 행위보다는 비슈누의 사랑과 은혜를 더욱 강조한다.
(철학적 학파들)
고전 후기 시대에 나타난 종교 현상은 신을 숭배하는 것만이 아니라 철학적으로나 영적으로 깊이 천착함으로써 목샤에 이를 수 있다며 형성된 종교 내지, 철학 학파가 크게 여섯이 생겼는데, 그중에 쌍키야 학파, 요가학파, 베단타 학파에 대하여 살펴본다.
쌍키야 학파는 요가학파와 더불어 쌍둥이 학파라 하는데, 쌍키야가 이론을 제공하고 요가가 실천 방법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쌍키야 학파는 우리에게 있는 근본 문제는 정신과 물질이 뒤섞인 상태인데, 문제를 없애는 길은 이 둘을 ’구별‘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요가학파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실제적인 방법을 제시하겠다는 주장이다. 요가는 근본적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일컫는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몸도 다스려야 한다는 수행 법이다. ’요가경‘에 나오는 라자 요가에 의하면 여덟 가지 단계를 거치면 마음이 물질에서 구별되어 본래의 순수함을 찾게 된다는 주장이다.
베단타 학파는 ’베다의 끝‘인 ’우파니샤드‘에서 나왔음을 시사하면서 동시에 그 완성이라는 말이다. 베단타 학파는 그 강조점의 차이로 세 개 학파로 나뉜다.
샹카라가 창시한 불이(不二)론 베단타 학파는 브라흐만을 가장 잘 대표하는 신이 시바라고 믿고 시바를 숭배하였다. 샹카라는 불교를 박멸해야 한다고 믿고 불교 박해에 앞장선 것으로 유명하다.
수정된 불이론 베단타 학파를 창시한 라마누자는 신을 경배하는 것은 곧 나를 경배하는 셈인가 하는 의문에서 출발하여 브라흐만을 ’주님‘ 곧 인격 신으로 경배하는 것이 오히려 가장 좋은 길이라고 주장했다. 라마누자 자신은 비슈누를 믿었으며, 구원이 지식으로뿐만 아니라 신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강조했다.
이원론적 베단타 학파는 마드바가 창시했으며, 라마누자처럼 인격 신을 주님으로 모시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비슈누를 섬겼다. 그러나 라마누자보다 한발 더 나아가 오직 브라흐만이 실재라는 생각을 버리고 브라흐만과 세계와 인간이 각각 분리되었다고 주장했다.
세가지 길
힌두교에서 궁극의 구원은 목샤를 얻는 것이다. 힌두교뿐만 아니라, 불교 등 인도에서 생긴 종교는 공통적으로 윤회를 믿는다. 우리 삶이 이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으면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죽어서 무엇으로 태어나느냐를 결정해 주는 것이, 카르마 즉, 업이다. 선한 업이든 나쁜 업이든 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윤회의 삶을 계속하는 것은 비극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삶의 궁극 목표는 이 비극적 윤회의 고리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해탈에 이르기 위해 구도(求道)하는 것이다.
이 궁극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세 가지 길이 있다. 첫째, 계율이나 도덕 규범을 잘 지키고 이웃에 선행을 많이 하여 구원에 이르는 ’행동의 길‘, 둘째, 어느 신을 마음과 정성을 다해 사랑하고 경배하는 ’신애의 길‘, 셋째, 궁극 실재를 직접 꿰뚫어 보는 통찰과 직관과 예지 등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지혜의 길‘.
근대의 힌두교
17세기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다스리기 시작하면서 서양문명과 그리스도교의 영향은 힌두교 내에서도 개혁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현대 인도의 아버지 ’람 모한 로이‘는 예수의 신성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교에 좋은 점이 많이 있음을 인정하고 힌두교의 다신론적 태도나 우상 숭배적 경향을 없애려고 노력했다. 그는 힌두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를 직접 체험해 보고 결국, 종교의 근본적인 진리는 같다는 것을, 확신하고 “산꼭대기는 하나지만 그리로 올라가는 길은 여럿”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현대 힌두교 개혁자로서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은 역시 간디였다. 그는 힌두교뿐 아니라 자이나교,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 그리고 그리스도교에서 특히 예수의 산상수훈에 영향을 받았다. 이런 다양한 종교적 전통에서 얻은 지혜와 이상에 따라 사회를 개혁하고 인도 독립을 이루려고 노력했는데, 이를 위해 그가 채택한 가장 유명한 원칙은 ’비폭력‘ 즉, 일체의 생명에 해를 주지 않는 생명을 경외하는 것이다. 간디의 사상은 미국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 미얀마 여성 인권운동가 ’아웅 산 수치‘ 여사 등에 영향을 미쳤다. 그렇지만 간디는 힌두교와 이슬람의 평화적 공존을 주장하는 데에 불만을 품은 힌두교 근본주의자에 의해 암살되었다.
힌두교의 오늘
힌두교는 주로 인도에 있는 종교이지만,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에도 많이 분포되어 있으며, 특히 식민지 시기에 이루어진 이민으로 인해 영국이나 북아메리카에도 많이 믿는다. 힌두교는 종교적 성향이 강한 장점도 있지만, 부정적인 면도 있다. 그중에서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충돌이다. 인도는 18세기 식민지가 되기 전까지 여러 세기 동안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그 결과 현재의 파키스탄이나 방글라데시는 이슬람 국가가 되었을 뿐 아니라 지금 인도 내에도 이슬람교인이 많다. 현재 단위 국가 중에서 인도는 인도네시아 다음으로 가장 많은 이슬람교인을 가진 나라다. 그런데도 힌두교 근본주의자 일부는 인도를 완전한 힌두교 국가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므로 자주 충돌을 빚는다.
- 감상-
힌두교는 가장 오래된 종교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다신론 중에서 단일 신을 숭배하는 구도가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는 불협화음이 많이 생길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다. 결국, 신을 믿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숭배하는 신에 대하여 경쟁심을 유발하게 된다. 그것은 결국 충돌을 피할 수 없게 하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힌두교 특성상 다신론을 인정하면서 이슬람교와 잦은 충돌을 빚는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자신이 믿는 신만이 절대 신이라는 편협된 사고는 재고되어야 할 종교적 관점이다. 이러한 점은 이슬람교도 예외는 아니다.
힌두교의 궁극 목표는 해탈을 통하여 윤회를 벗어나는 일인데, 자신이 믿는 신만이 절대적이라는 신념은 깨달음을 얻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다. 현세를 극복하지도 못하면서 안정된 내세를 구원하는 게 과연 신을 믿는 이유가 될까. 자신의 신을 지나치게 경배하기보다는 자신이 먼저 올바른 종교적 가치관을 갖고 신에게 기도해야 할 것이다.
책에서 제시된 힌두교 내용은 극히 일부분일 것이다. 솔직히 글을 읽고서도 힌두교를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겠다. 대충 힌두교가 흘러온 방향과 그들의 지향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다.
[불교]
불교는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에 있는 나라 대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이다. 중국은 수나라, 당나라 시대에 불교 국가를 이룰 만큼 불교가 융성했다. 일본도 언뜻 신도 국가라 오해할 수 있지만, 옛날부터 지금까지 불교가 가장 중요한 종교로 내려오고 있다. 한국은 삼국시대와 고려 시대에 불교가 국교(國敎)였다가 조선 시대에 들어와 유교에 그 자리를 내주었지만, 민간에서는 불교가 계속 중요한 종교로 이어져 왔고, 현재 한국 전체 인구 중 23% 정도가 불교를 신봉하고 있으며, 종교 인구 중에서는 43% 정도를 차지한다.
이렇다 보니 불교를 이해하지 않고는 동양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 지나치지 않다. 쇼펜하우어, 니체, 바그너, 하이데거, 데리다, 푸코 등 불교사상에 영향을 받은 서양 사상가가 많고, 오늘날 불교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리스도교 신학을 대폭 수정하는 신학자도 많다. 서양 현대 사상이나 신학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불교 사상의 이해가 중요하다.
영국 역사가 토인비는 후대 역사가들에게 20세기에 일어난 일 가운데 가장 의미 있는 일은, 우주선이나 컴퓨터 같은 과학기술의 발전이나 공산주의 발생과 몰락 같은 사회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와 불교가 처음으로 의미 있게 만난 것을 지적하리라고 예견했다.
붓다의 삶과 가르침
(출생과 성장)
불교는 붓다(기원전 563년~483년)에 의해 창시되었다. 지금의 네팔과 인도 변경 부근에 있는 카필라성에 샤카족에 속하는 슛도다나 왕과 마야부인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왕이기는 하지만 그 규모가 요즘 부족장 정도이다. 붓다는 산스크리트어로 ’깨친 이‘라는 보통명사다. 즉, 깨침을 이루기 전에는 붓다가 아니다. 현재는 부처라는 말과 동일하게 사용되며 고유명사처럼 쓰는 게 관례이다.
붓다를 낳고 7일 만에 어머니 마야 왕비는 세상을 떠났다. 정치적인 인물이었던 아버지는 붓다가 위대한 왕이 되기를 바라며 학문에 전념하게 했다. 19세 때 공주 야쇼다라와 결혼하였다. 아버지는 아들이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세속을 떠나는 일이 없도록 세 개의 궁을 짓고 극진히 보살폈다.
(출가와 성불)
붓다는 화려한 궁궐에서 생활했지만, 거기에서 궁극적인 만족을 얻지 못하고 생로병사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에 빠졌다가 29세 되던 해 출가를 결심한다. 6년 동안 갖은 고생하면서도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35세에 보리수나무 밑에서 진리를 터득하는 완전한 깨침에 이르렀다. 붓다는 보리수나무 밑에서 7일 동안 꼼짝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서 자기 깨달음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지 말지 망설였다. ’속세로부터 자유로운 사람‘, ’속세로부터 자유롭고자 애쓰는 사람‘, ’속세에 완전히 빠져 자유니 뭐니 하는데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 이 세 부류 중에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을 위해 속세로 나가 가르치기로 결심했다.
(사성제 팔정도)
붓다의 제자를 위한 첫 설법은 지나친 쾌락과 고행을 피하고 ’중도‘의 길을 택하라고 일러주었다. 그 중도의 내용이 ’사성제 팔정도‘이다.
사성제는 고(苦), 집(集), 멸(滅), 도(道).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깨달으라는 가르침이다. 첫째로 고제(苦諦)는 괴로움의 진리다. 삶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진리를 터득하라는 것이다. 둘째, 집제(集諦)는 괴로움이 어떻게 일어나는가에 대한 진리다. 괴로움이 생기는 것은 목마름 때문이며, 이 목마름이란 집착, 정욕, 애욕, 욕심, 욕정으로 목마름을 뜻한다. 이런 목마름 때문에 우리에게 괴로움이 따른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멸제(滅諦)는 괴로움을 없앨 수 있다는 진리다. 이것은 가능성에 대한 선언이다. 이 괴로움의 세상에서 열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열반이란 우리 안에 타고 있는 정욕의 불씨를 ’훅‘하고 불어서 꺼 시원함과 평화스러움과 안온함을 느끼는 상태를 말한다. 넷째, 도제(道諦)는 괴로움을 없애는 길을 말하는 진리다. 이 길의 구체적 내용을 말하는 것이, 바로 ’팔정도‘, 즉 여덟 갈래의 바른길이다. 이 말은 길이 여덞 이라는 뜻이 아니라, 여덟 가지 요소로 구성된 하나의 길이다.
팔정도는 정견(正見) - 붓다의 가르침을 받아들임, 정사(正思) - 자신을 비우고 자비를 베품, 정어(正語) - 거짓말을 하지 않음, 정업(正業) - 살생, 도둑, 음행 등을 금함, 정명(正命) - 남에게 해를 주지 않는 직업을 가짐, 정정진(正精進) - 건전하지 못한 마음 상태가 생기지 않도록함, 정념(正念) - 몸과 마음의 움직임과 감각이나 감정, 개념이나 생각 등에 마음을 다해 의식함, 정정(正定) - 마음을 한 곳에 고정하고 집중하는 것.
또한, 무아(無我)에 대하여 설법했다. 무아는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자아는 실체가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자아라는 것이, 물질(色), 감정(愛), 생각(想), 충동(行), 의식(識)이라는 다섯 가지 존재 요소가 일시적 가합(假合)일 뿐 그 자체로는 실체가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자아는 집착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거기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우리의 자아가 허구임을 알게 되면 그만큼 자유스러워지고, 세상은 그만큼 더 아름다워진다. 나아가 개인의 자아뿐 아니라 모든 사물도 마찬가지다. 이를 일러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하여, 제행무상(諸行無常), 일체개고(一切皆苦)와 더불어 불교에서 말하는 삼법인(三法印)을 이룬다.
인도불교의 발전과 쇠망
(불교경전 – 삼장경)
붓다가 죽은 후 제자들은 붓다가 진정으로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 분명히 하고 이를 하나로 모아 둘 필요가 있다고 느껴 결집(結集)하기로 했다. 제1차 결집은 붓다가 입멸 직후 있었으며, 제자 ’아난다‘가 일러 준 붓다의 하신 말씀을 경(經)이라고 한다. 제자 우팔리도 붓다의 말씀 중에 특히 승단의 규범이나 규례에 관계되는 것을 외웠는데, 이렇게 모은 붓다의 말씀을 율(律)이라고 한다.
불멸 후 100년(기원전 390년경)에 제2차 결집이 있었고, 기원전 247년에 다시 제3차 결집이 있었는데, 이때 지금까지 구전으로만 내려오던 경과 율을 문자화하였다. 경과 율에 덧붙여 후대 학자들이 특별한 문제나 생각에 대해 주석을 단것도 모았는데, 이를 논(論)이라고 한다. 이렇게 하여 불전은 ’경,율,론‘ 세 부분을 갖췄고, 이를 일러 삼장(三藏)이라 한다. 이후 대승불교가 성립되면서 ’반야경‘ ’법화경‘ ’화엄경‘ ’아미타경‘ 등의 대승 경전이 계속 편찬되어 대장경을 이루게 된다.
(부파 불교와 대승불교의 등장)
붓다 입멸 후 100년경부터 승단은 주로 교리상의 문제로 여러 부파로 갈라져 18개의 부파가 생겼다. 그중에 대표적인 상좌부와 대중부가 있었으나, 대중부는 곧 사라지고 기원전 1세기경에 대승불교(大乘佛敎)가 출현했다. 대승불교는 부파 불교의 사변적, 개인적, 소수 엘리트 중심적인 성향에 반대한 진보적 승려들에 의한 일종의 평신도 운동인 셈이다. 대승불교는 스스로 ’큰 수레‘라고 부르고, 부파 불교를 ’작은 수레‘라고 낮춰 불렀다. 대승불교 신봉자들은 소승(小乘)은 개인의 구원에만 관심이 있어 모두 개인적 수행을 통해 아라한(阿羅漢)이 되려는 데 비해, 자신들은 많은 사람이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보살(菩薩)이 되는 것을 종교적 이상으로 삼는다. 보살은 열반에 들 자격이 충분하지만, 중생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는 자비(慈悲)의 마음 때문에 나보다 남을 먼저 피안으로 보내기 위해 힘쓰는 존재다.
인도에서 생긴 대승불교의 대표 학파로는 반야경 계통의 경전에 근거하여 2세기경 ’제2의 붓다‘라고 할 정도로 위대한 불교 사상가 ’나가르주나(150년~250년)가 창시한 중관학파는 공(空) 사상을 가장 중요한 가르침으로 하고 있다. 5세기경 아상가(410년~500년)와 바수반두(420년~500년) 두 형제가 창설한 유가 학파는 모든 것을, 의식 혹은 마음일 뿐이라는 가르침을 강조한다. 유가 학파의 사상은 18세기 서양 심리학자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유가 학파의 또 다른 중요한 사상은 우리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강조하는 여래장(如來藏) 사상이다.
(인도불교의 쇠망)
인도불교는 기원전 297년 ‘아소카’ 성왕이 불교로 개종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전성기를 맞은 불교는 8세기~9세기경에 가서 쇠퇴하기 시작해서 11세기~12세기를 거쳐 13세기경에는 실질적으로 사라지고 만다. 가장 큰 이유는 7세기경 힌두교가 부흥하면서 샹카라 같은 열성 힌두교 인이 불교를 박해하거나 붓다를 비슈누의 현현으로 해석하여 불교를 힌두교의 일부로 흡수한 것. 그리고 11세기 이후 여러 차례에 걸친 이슬람의 인도 침공으로 불교 사원이나 경전이 소실되고 승려들이 가까운 국가나 남인도 등으로 흩어져 쇠퇴하게 되었다.
동아시아에서의 불교
(중국에서의 불교)
중국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1세기경으로 추정된다. 불교가 도입될 당시 중국에서는 이미 유교와 도교가 성행하였다. 따라서 불교와 전통 종교 사이에 갈등을 피할 수 없었지만, 불교는 당시 정치 상황과도 맞물려 3~4세기경 남북조 모두에서 환영받는 종교가 되고 5세기~6세기 수당 시대에 접어들면서 중국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종교가 되었다. 이때 생겨난 종파 중 중요한 것은 삼론종, 유식종, 천태종, 화엄종, 정토종, 선종 등이다.
유식종은 모든 것이 ‘의식일 뿐’이라는 가르침을 중요시한다. 이 종파는 ‘서유기’에서 손오공과 저팔계를 데리고 인도에 갔다 온 것으로 유명한 삼장법사 ‘현장’이 인도에서 유가학파의 가르침을 배워 중국에 옮겨 온 것이다.
천태종은 제삼조 지의(智顗)를 창시자로 인식한다. 지의가 중국 남쪽 천태산에 살았다고 천태종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지의가 ‘법화경’을 중심으로 가르쳤으므로 ‘법화종’이라고도 한다. 천태종의 핵심 가르침은 공가중(空假中)을 들 수 있다. ‘공가중’이란 모든 사물이 공 하다는 공제(空諦), 공 하지만 동시에 하나의 현상으로서는 뚜렷이 존재한다고 보는 가제(假諦), 따라서 공이면서 동시에 가이고, 가이면서 동시에 공이라는 중제(中諦)를 일컫는다.
화엄종은 대승불교 중 ‘화엄경’을 중심으로 생긴 종파. 가르침 중 ‘법계(法界)’ 사상이 가장 중요하므로 ‘법계종’이라고도 한다. 화엄종의 실제 창시자는 제3조 법장(法藏)의 호를 따서 ‘현수종(賢首宗)이라고도 한다. 신라 의상대사는 제2조 지엄 밑에서 법장과 함께 공부하고 신라로 돌아와 영주 부석사를 창건하고 신라 화엄종의 초조가 되었다. 원효대사도 기본적으로 화엄을 가르쳤는데, 그를 해동 화엄의 초조라 하기도 한다. 일본으로는 730년경 신라 승 심상(審祥)이 화엄을 전하고, 그 이념에 따라 나라 시대 동대사에 화엄의 주불인 비로자나 대불이 조성되었다. 화엄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법계 연기다. ’법계‘란 존재의 근원으로서 이 법계에 포함된 모든 사물은 서로 의존하는 관계라고 본다. 화엄 사상은 유기적, 통전적 세계관이다. 이 세계관은 편견이나 고집에서 해방되고, 나와 남의 구별 없이 자비의 태도를 견지하여 구도의 단계에서 첫 단계가 곧 완성의 단계가 된다. 화엄의 용어로 하면 신만성불(信滿成佛) 혹은 일념성불(一念成佛)이다.
정토종은 ’아미타경‘을 믿음의 근거로 삼는 종파다. 누구든지 절대적인 믿음과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자기의 이름을 부르면 보살의 길을 완성해서 결국 ’아미타 부처님‘이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가 약속한 ’서원의 힘‘을 믿고 그의 이름을 열심히 부르는 것 뿐이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란 이렇게 “아미타불님께 귀명합니다”라는 뜻을 모아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극락왕생이 정토 신앙의 최종 목표는 아니다. 불교에서는 궁극의 목표가 열반에 들어 존재가 소멸하는 것이다. 정토에서 사는 것은 아직도 존재를 가진다는 뜻이기에 최종 종착지가 될 수 없다. 정토는 모든 조건이 좋아 조만간 열반에 이르는 것이 보장된 상태라 볼 수 있다.
정토종은 ’믿음‘만을 강조하는 셈이다. 아미타의 원력에 의지하는 불교이므로 ’타력(他力)‘불교라 하여 자기 힘으로 깨달음에 이르려 하는 ’자력(自力)‘ 불교인 선 불교와 대비된다. 일본의 경우 불교 신도의 절대다수가 정토종 신도이다.
선종의 ’선(禪)‘의 완전한 말인 ’선나(禪那)‘는 ’명상‘이라는 뜻이다. 불교 종파 중 선종이 서양에서 가장 인기 있는 종파다. 깨달음의 미소라는 ’염화미소(拈華微笑)‘의 고사성어도 선종이 그 근원이다. ’말없는 가르침‘으로서의 선이 시작되어 전해 내려오다가 인도 남쪽 어느 왕국의 셋째 왕자인 28대 ’조로 보디다르마‘ 라는 사람이 스승의 명을 받들고 520년경 중국을 향해 동쪽으로 왔다. 그가 ’달마‘이다. 달마를 중국 선의 시조로 하고 2대 혜가를 거쳐 5대 홍인에 이르러, 신수(神秀)와 혜능(惠能)이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글도 읽지 못했던 혜능이 6조가 되었다는 내용은 ’육조단경‘에 잘 나와 있다.
선의 핵심은 ’깨침‘이다. 붓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이룬 깨침의 체험, 그 후 많은, 조사(祖師)들의 체험을 따라 반드시 깨침을 얻어야 한다. 이렇게 깨침을 통해 진리를 보게 될 때 우리는 아무것에도 거침이 없는 무애의 사람, 참된 자유인이 된다. 그런데 이런 깨침은 교리나 경전 연구 같은 이론적 탐구라든가 염불이나 예불 같은 종교적 의례만으로는 얻어지지 않는다, 달마가 가르쳤다고 전해오는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이심전심(以心傳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은 모두 깨침의 체험이 말로서가 아니라 마음을 다스려야 이루어진다는 선의 기본 정신이다.
선은 동아시아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시, 미술, 건축, 정원, 활쏘기, 연극, 차도, 검도 등 많은 분야에 선적인 요소가 가미되었다. 예를 들어, 활쏘기할 때 일상적인 의식을 넘어서는 의식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도록 노력하였는데, 이것은 좌선과 맞먹는 마음 수련이다.
이런 깨침이 무엇일까, 심리학 용어로 설명하기도 했다. ’에리히 프롬‘은 깨침은 ’우리의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것. ‘이라고 했다. ’로버트 온슈타인‘은 깨침이란 ’우리 두뇌의 좌반구와 우반구 기능이 균형을 되찾는 것. ‘이라고 설명했다. ’켄 윌버‘는 참선 같은 명상을 통한 깨침이란 ’초이분법적 의식으로 들어감‘이라고 주장했다. 해석이 어떠하든 간에 선 불교를 비롯한 명상법은 믿어지지 않는 이론이나 교리를 믿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종교에 식상한 많은 젊은이, 좀 더 직접적인 종교적 체험을 갈구하는 많은 이에게 크게 어필하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과 일본에서의 불교 전개)
한국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삼국시대 고구려 소수림왕 2년인 372년이다. 뒤이어 384년에 백제, 534년 신라에 불교가 전해지고, 불교의 힘으로 삼국을 통일한 통일신라는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운다. 신라 시대 원효와 의상은 학문적으로 중국과 일본의 불교에도 크게 공헌했다.
통일 신라에 이어 고려에도 훌륭한 스님이 많이 배출되었다. 고려 문종의 아들인 의천은 중국 송나라에서 선을 비롯한 여러 종의 가르침을 배워 천태종을 전파했다. 지눌은 화엄에 통달하고 선을 깊이 깨달은 다음 ’돈오점수(頓悟漸修)‘ 원리에 따라 당시의 선을 개혁하는 데 힘써, 조계종의 기초를 닦았다. 보우는 선종 중에서 임제종 계통을 실천하였는데, 지금 태고종은 태고 보우를 시조로 삼고 있다. 또한, 고려 시대는 팔만대장경을 조성하는 등 불교가 문화적으로도 큰 유산을 남겼다.
중국 불교 종파는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 시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다 들어왔다. 그러나 고려 말 승려들이 정치에 너무 깊이 관여하여 물의를 일으켜 조선조는 불교를 억제하는 억불숭유정책을 채택했다. 그러고는 전에 들어온 여러 종파를 크게 두 가지로 통합해, 하나는 선(禪)이고, 다른 하나는 교(敎)로서, 한국 불교에는 현재 정토종이나 화엄종이라는 종파가 따로 독립해 있지 않다.
조선 시대 말에는 억불 정책이 더욱 강화되어 심지어는 승려의 서울 성안 출입을 금지하기도 했다. 조선 말기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면서 일본 불교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토종 계통의 불교가 들어오면서 결혼하는 대처승 제도가 도입되었고, 이것은 해방 후 대처승과 비구승 사이에 불화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현재 한국 불교는 그동안의 여러 가지 어려움을 지나 대중 불교 운동이나 불교 정화 운동 등을 통해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는 새로운 불교로 거듭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반면, 일본 불교는 6세기 백제로부터 도입된 이래 도쿠가와 시대 신도 보호 정책으로 약간 주춤하기는 했지만, 일본 고유문화와 섞여 새로운 종파가 생기기도 했다. 일본에서 생긴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일련종(日蓮宗)이다. 이 종파의 창시자 일련은 ’법화경‘이 암흑의 시대를 가르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법화경의 완전한 이름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므로 앞에 ’귀의한다‘는 뜻의 ’나무(南無)‘를 붙여 일본 발음으로 ’나무묘호렌게교‘를 외운다.
(티베트 불교)
티베트 불교를 ’라마교‘라고도 한다. 티베트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7세기였으며, 이때 인도와 중국에서 들어온 불교는 대승불교의 일종이지만, 이것은 ’봉‘이라는 티베트 전래의 토속 종교와 어울려 티베트 특유의 불교를 형성했다. 티베트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은 주술을 많이 이용하고 주문을 많이 외우는 것이다. 가장 많이 외우는 주문은 ’옴 마니 파드메 홈‘이다. 일반인들은 그냥 많이 외우기만 하면 그 자체로 영험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티베트 불교 지도자를 ’라마‘라고 한다. 14세기경에는 라마가 왕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지므로 왕이 자연히 사라지고, 라마가 종교와 정치 모두를 관장하는 티베트 최고의 지도자가 되었다.
’바다‘라는 뜻을 가진 ’달라이‘는 그 인격의 넓이와 깊이를 상징한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최고 지도자로서 죽으면 다시 환생한다고 믿고, 그 환생한 아이를 찾는 작업이 진행된다, 티베트 사람들은 현재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관세음보살의 14번째 환생이라 믿는다.
1950년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하자 1959년 달라이 라마를 비롯한 많은 라마가 망명하였다. 달라이 라마는 인도 북부 담살라에 임시 본부를 정하고, 기타 많은 라마는 서양으로 갔는데, 이는 티베트 불교를 서방에 널리 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9년 달라이 라마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2011년 달라이 라마는 정치 은퇴를 선언하고 인도 다르질링에서 태어나 하버드 로스쿨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43세의 ’롭상 상가이‘에게 정치 지도자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오늘의 불교
불교는 오늘날 서양에서 크게 주목받는 종교가 되었다. 18세기 유럽에서 쇼펜하우어, 니체, 와그너 같은 사람이 불교에 심취하고, 그 후 많은 사상가와 신학자가 불교를 연구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 동서양의 접촉이 잦으면서 서양 사람 중에 불교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서양 사람이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에는 불교의 평화주의적인 태도나 참선처럼 깨달음을 강조하는 데 대하여 호감을 가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교가 서양인만의 종교가 아니듯 불교도 동양인만의 종교가 아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접촉은 세계 종교사에서 발견되는 여러 예와 같이 흥미로운 종교 현상을 빚어내리라 생각한다.
- 감상 -
불교를 가까이 접하고 있어서 대충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책을 통하여 불교를 잘 알지 못하고 있었음을 자인한다. 솔직히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를 정확히 구분할 줄 몰랐다. 우리나라 불교가 대승불교인지 소승불교인지도 몰랐다. 이제 대충은 알겠다. 우리나라는 대승불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그것은 자신의 구원이나 깨달음에 집착하는 소승불교와는 달리 충분히 깨달음에 이를지라도 자신의 구원보다는 중생의 구원을 위하여 보살행을 행하는 것이, 대승불교다. 그런 점에서 대승불교는 종교적인 특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할 것이다.
불교는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윤회 사상을 교리의 기본 골격으로 한다. 그렇지만 힌두교는 신을 숭배하는 데 비해 불교는 신을 숭배하지 않는다. 불교는 신께 구원을 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자신이 깨우침을 얻는 것만이, 열반에 드는 유일한 방법이다.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깨닫게 되면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구원으로 생각하고 기도한다. 설령 깨달음을 얻었을지라도 중생의 구원을 먼저 생각하여 보살행을 행한다는 것은, 종교적 본질이 단단하고 담백하다.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서 불교가 쇠락했다는 것도, 아이러니다. 중국은 불교 문화유산이 많기는 하나, 공산국가 체제에서 종교가 핍박받아서 불교가 많이 쇠락한 상태다. 불교는 한국, 일본, 티베트를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와 태국, 미얀마, 라오스 등 동남아시아 국가 일부에서 신봉하는 종교다. 그리스도교와 비교하면 불교를 믿는 국가나 신도 수가 적은 편이다.
최근 들어 서양에서 불교에 관심을 보이는 추세가 많아졌지만, 정작 우리나라 불교의 현실을 보면 과연 이나마도 지켜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성직자들의 일탈 행위가 종종 뉴스에 등장하여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깨달음을 전하고, 그 길을 인도하는 성직자들이 계율을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데도 불교가 종교로서의 굳건한 위상을 지키며 버텨낼 수 있을까.
[자이나교와 시크교]
자이나교
자이나교는 현재 인도에 약 370만 명의 신도를 가진 규모가 작은 종교로, 마하비라(기원전 599~기원전 527년경)가 창시하였다. ’마하비라‘는 ’위대한 영웅‘이라는 뜻이다. 붓다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그의 생애는 붓다의 생애와 유사한 점이 많다. 마하비라는 ’아힘사(不殺生)‘를 통해 해탈에 이를 것을 가르쳤다. 인도의 종교는 시크교를 제외하면 대체로 불살생(不殺生)의 가르침을 받들지만, 그중에 자이나교가 가장 철저하게 실천했다. 그들은 공기 중에 있는 곤충을 마시는 일이 없도록 마스크를 쓰고 다녔으며, 심지어 농사지을 때 벌레를 죽일 수밖에 없기에 농사를 피하고 상업에 종사한다.
자이나교에는 크게 두 종파가 있는데, 스베탐바라(白衣派)와 디감바라(天衣派)다. 백의파는 흰옷을 입고 다니고 천의파는 하늘이 옷이니 별도의 옷이 필요 없다 하여 나체로 다닌다. 또한, 백의파는 여자도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데, 반해 천의파는 여자는 유혹자일 뿐 해탈에 이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철저한 아힘사 사상은 힌두교에도 크게 영향을 주었다. 간디도 자이나교의 가르침과 실천에서 크게 감명받았으며, 슈바이처 박사의 ’생명 경외‘ 사상도 연원을 따지면 아힘사에서 비롯하였다.
시크교
16세기 인도 서북부 펀자브 지역에서 생긴 종교로서, 현재 약 2,300만 명의 신도를 가지고 있다. 창시자 구루나나크(1469년~1538년)는 펀자브 지역 힌두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학교 선생님을 비롯하여 주위에 이슬람 사람이 많았다. 35세가량 되었을 때, 신으로부터 일종의 계시를 받았다. 그때 받은 계시는 “힌두교인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이슬람교인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통합하는 일에 헌신하였다. 그를 따르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이들을 ’시크‘라고 불렀는데 펀자브어로 ’제자‘란 뜻이다.
나나크의 가르침은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조화시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신은 힌두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여러 형태로 나타나지만 결국 이슬람교 인이 말하는 것처럼, 궁극적으로는 하나라고 가르친다. 또한, 특이한 가르침은 신이 창조한 것 중에서 인간은 최고의 창조물이므로 다른 동물을 잡아먹을 수 있고, 이에 따라 인도 전통에서 강조되는 아힘사의 원칙을 반드시 따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힌두교로부터 환생 사상을 받아들여 나나크가 죽은 후 다음 구루(지도자)로 다시 태어난다고 하였고, 나나크 이후 제10대 구루인 고빈드 싱(1675년~1708년)을 마지막 지도자로 하고 이후부터는 그들의 경전 ’그란트‘를 구루로 삼았다. 이들은 수염을 기르고 머리에 터빈을 쓰고 다닌다.
시크교인은 인도 내에서 힌두교인도 이슬람교인도 아니므로 종교적 뿐만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언제나 소수에 속한다. 이런 불리한 입장에서 벗어나려고 현재 펀자브를 인도로부터 독립시키려는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어 인도 정부와 무력 충돌을 빚기도 한다.
- 감상 -
자이나교는 힌두교의 극단적인 한 형태라 할 수 있겠다. 절대로 살생을 하지 않겠다는 뜻은 좋으나, 그런 연유로 농사도 지을 수 없어 상업에만 종사한다니 정상적인 종교로서 존재하기는 쉽지 않겠다. 세상 모든 사람이 자이나교인이 되면 인간은 멸망하게 될 것이다. 이들의 불살생(不殺生) 원칙은 힌두교와 불교에 영향을 많이 끼쳤을 것이다.
시크교는 신의 창조물 중 인간이 최상의 작품이라 자인하며 동물을 마음껏 잡아먹을 수 있어서 자이나교와 정반대의 이념이다. 이들이 힌두교와 이슬람교와의 조화에 힘썼다는 것은 당시, 인도 내에서 종교 간의 갈등이 많았음이 짐작 간다. 이 문제는 현재도 한 치의 양보 없이 갈등이 진행되고 있음을 볼 때, 또 다른 시크교는 언제든지 생길 수 있겠다.
[유교]
동아시아 종교의 기본 성격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에서는 서양에서와 달리, 어느 한 종교를 배타적으로 따르지 않았다. 즉, 유교, 불교, 도교 등 여러 종교를 필요에 따라 하나 혹은 그 이상을 자유롭게 선택했다. 단적인 예로 1886년 한국에 선교사로 왔던 ’헐버트‘는 ’한국인들은 사물을 전체적으로 뒤섞어 보며, 서로 다른 종교들 사이에 적대감이 전혀 없다. 일반적으로 한국인 대부분은 사회생활 할 때는 유교인, 철학적 사색할 때는 불교인, 그리고 문제에 부딪혔을 때는 영혼 숭배자(무속인)가 된다‘고 관찰했다. 이런 경향은 중국이나 일본도 예외는 아니다. 일본에서도 불교인이면서 신도를 신봉하는데 아무런 모순을 느끼지 않는다. 동아시아 사람들은 환자가 다리가 부러지면 외과 전문의를 찾고 심장이 이상하면 심장 전문의를 찾는 것처럼, 그때그때 영적 필요에 따라 여러 종교에 동시에 속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기본적인 종교 개념들)
동아시아 사람들은 특별한 종교와 관계없이 귀신과 상제, 천과 천명, 도, 음양, 주역, 복점, 효 등에 대한 개념들을 알고 있었으며, 그대로 따르려고 힘썼다.
귀신과 상제 다른 고대사회와 마찬가지로 동아시아 사회에서도 세상은 여러 가지 정령이 가득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에게는 신(神)과 귀(鬼)가 있다고 믿어, 죽으면 신은 하늘로 가고 귀는 땅으로 되돌아간다고 보았다. 신을 잘못 다루면 귀는 땅으로 가지 못하고 시신 주위에서 돌다가 사람들에게 좋지 못한 일을 한다고 생각했다. 하늘에 있는 조상의 신은 살아 있으므로 그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기원전 18세기~기원전 12세기의 상대(商代)나 은대(殷代)에는 가장 위대한 조상신을 부족신으로 모셨는데, 이를 상제(上帝)라고 했다. 상제는 하늘에서 자연 현상을 관장하며 인간의 생사화복에 영향을 주는 인격적인 존재라 여겼다.
천과 천명 기원전 13세기~기원전 12세기의 주대(周代)에 오면 인격적 존재인 상제 대신에 비인격적 존재인 천(天)이 등장한다. 천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개념은 천명(天命)이다. 주공(周公)이 주나라를 세우고 손문이 중화민국을 수립하기까지 중국 전체 역사를 통해 정치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친 개념이다. 즉, 하늘의 명을 받들어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바로 천자(天子)였다.
도 도(道)는 도가의 전유물만이 아니다. 도는 윤리적으로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반드시 따라야 할 행동규범이며, 형이상학적으로는 우주가 움직이는 기본 원리 혹은 근원이라는 뜻이다. 나중에 유가에서는 주로 도의 윤리적인 면을 강조하고, 도가에서는 형이상학적 측면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도에 의해 산다는 생각은 같았다.
음양 우주가 음(陰)과 양(陽)의 상관관계로 이루어졌다는 믿음이다. 가장 음적인 것은 달과 땅이고, 가장 양적인 것은 해와 하늘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이 두 가지 보완적 원리가 상호 작용하여 이루어 낸 결과이다.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도 둘인 음양의 원리가 조화를 이루면 모든 것이 순조롭고 평화롭지만, 조화가 깨질 때 온갖 문제가 생긴다. 음양의 원리는 형이상학적 원리로서 인간의 삶 구석구석을 지배했다.
복점 중국 상대(商代)에 거북의 등이나 배 무늬를 보고 점을 쳐 개인이나 집단의 미래를 점치곤 했다. 거북의 등이나 소의 뼈에 소원이나 질문을 간단하게 쓰고, 불 위에 올려 금 가는 모양을 보고 답을 구했다. 이렇게 뼈 위에 새겨진 문자가 갑골문자(甲骨文子)다. 점치는 방법 중 가장 발달한 것이 ’주역‘이다, 주역은 보통 이경이라 하며, ’변화의 책‘이라는 뜻이다. 나무 막대나 동전을 바닥에 던져 그 조합을 보고 음이나 양의 괘를 정한다. 이렇게 나온 괘를 여섯 개 쌓아 올려서 그 모양에 따라 64괘 중 어느 한 가지를 얻고 ’주역‘에서 그 괘가 말해 주는 말의 뜻을 풀어 미래를 예견하고, 그에 대처하는 지혜를 얻기도 했다. ’주역‘은 훗날 점치는 역할을 뛰어넘어, 공자가 주석을 달기도 하고 중국 철학사에서 우주의 원리를 캐는데, 도움을 주는 가장 중요한 문헌이 된다.
효와 조상숭배 동아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부모를 공경하고 돌보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 왔다. 효(孝)의 근본은 부모가 ’언제나 계시도록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공자
(공자의 출생)
유교는 공자(孔子)(기원전 551년~기원전 479년)가 창시했다고 알려졌지만, 유교 전통은 공자 시대에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다. 공자 자신도 겸손하게 ’술이부작(述而不作)‘ 이라 하여 옛날부터 내려오던 것을 그대로 전수할 뿐 새롭게 창작한 것은, 없다고 했다. 그러나 공자는 ’창조적 전수자‘였다. 그때까지 내려오던 전통이 공자에 의해 집대성되어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를 유교의 창시자로 보는 것이다.
한 대(漢代) 사마천이 기록한 ’사기‘ 47장과 기타 문헌에 따르면 공자는 춘추전국 시대 노나라에 지금의 산동성 곡부에서 태어났다. 세 살쯤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가 홀로 키웠다. 19세 때 결혼해서 아들과 딸을 얻었다. 딸은 공자보다 먼저 죽고, 아들은 대를 이어 지금 79대가 대만에 산다. 공자는 19세쯤 관리로 일했는데, 23세에 어머니가 죽어 3년 동안 곡하느라 관리직에서 물러났다가 26세에 다시 공직을 잡았다. 50세쯤에는 노나라에서 법무부 장관이나 재상 비슷한 벼슬에 올라 2~3년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했으나, 이웃 나라 간계에 넘어간 임금이 공자의 간언을 듣지 아니하므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후 14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여러 나라를 다니며 생각을 펴다가 68세쯤 다시 노나라로 와서 가르치는 일과 글쓰기에 전념하다가 72세에 죽었다.
(논어와 사서오경)
공자가 죽은 다음 그의 말, 제자들과 나눈 대화, 제자들의 말을 모아서 엮은 책이 ’논어‘이다. 동아시아에서 논어는 노자의 ’도덕경‘과 함께 가장 중요한 책으로 인정받는다. ’논어‘는 훗날 ’대학‘, ’중용‘, ’맹자‘와 함께 유교 가르침의 바탕을 이루는 ’사서‘ 중 하나가 되었다. 유교 전통에서는 ’논어‘외에 공자가 편집했다고 믿는 ’서경‘, ’시경‘, ’예기’, ‘춘추’, ‘역경’ 다섯 권을 ‘오경(五經)’이라하여 사서와 함께 ‘사서오경’이라 한다.
(공자의 기본 가르침)
정명 공자의 가르침을 한두 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다. 그중에 ‘정명(正名)’은 이름을 바르게 한다는 뜻인데, 당시 사회. 정치적으로 혼란한 춘추전국 시대였던바, 군주가 군주 노릇 못하고, 신하가 신하 노릇 못하고, 아버지가 아버지 노릇 못하고, 아들이 아들 노릇 못하기 때문에 혼란해진다는 것이다. 신하가 신하 노릇을 하지 않고 임금이 되려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따라서 누구나 주어진 이름에 맞도록 바르게 행동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보았다.
인 인(仁)은 ‘논어’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글자다. 인은 어질다는 의미로 사람을 사람답게 해주는 요소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됨’이라고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인’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 공자도 인을 설명할 때마다 그 상황에 따라 대답이 달랐다.
의 ‘의(義)’는 ‘이(利)’와 대조를 이루는 덕목이다. 보통 사람은 무슨 일을 할 때, 그것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지 따지는데, 군자는 ‘옳은 일인가?’ 여쭤보고 옳은 일이라 생각되면 이익이 올지 말지 결과와 상관없이 그대로 추구하는 태도를 말한다. 이는 독일 철학자 ‘칸트’의 ‘단언 명령’이라는 개념을 연상시킨다. 칸트는 결과를 가정한 ‘가언 명령’에 비해 결과와 상관없이 순수이성에 따라 반드시 지켜야 할 명령을 ‘단언 명령’이라 했다.
충과서 인이나 의가 구체적인 인간관계에서 나타날 때 충(忠)과 서(恕)가 된다. 충은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다. 이에 반해 서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마음, 곧 자신이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맹자
(맹자의 위치)
공자가 죽은 지 100년 후에 맹자가 태어났으므로 맹자는 직접 배운 제자는 아니다. 당시 공자의 가르침을 반대하며 겸애설을 주장했던 묵자와, 쾌락설을 주장했던 양주 등에게 이들의 사상을 논박하고 공자의 사상을 널리 펴고 계승하는데, 맹자는 크게 공헌했다. 물론 맹자가 공자의 가르침을 그대로 되풀이한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책 ‘맹자’에 그가 여러 사람을 만나 생각을 펴는 이야기를 통해 공자의 철학인 인의(仁義)를 더욱 세련되게 강조했다.
(맹자의 가르침)
성선설 맹자를 떠올리면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와 ‘성선설(性善說)’일 것이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부연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다만, ‘사단’, 즉 인간은 네 가지 단서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성선설의 논리는, 첫째, 측은히 여기는 마음, 둘째, 실수를 미워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 셋째, 사양하는 마음, 넷째,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다. 인간은 이런 네 가지의 천부적인 가능성을 계발하면 인의예지(仁義禮智) 네 가지 덕성이 형성되고 이를 극대화하면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호연지기 맹자는 인성 계발을 극대화하면 하늘을 알 수 있게 될 뿐 아니라, 하늘과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했다. 하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이기심을 줄이고 줄여 나와 다른 사람과의 구별이 없어지고, 드디어 나와 우주와의 구별마저 없어지는 경지에 이르면 결국 나는 우주와 하나인 상태가 된다. 이런 사람은 인간의 가능성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이른다. 비로소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가진 완전한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맹자는 기본적으로 인간은 누구나 이런 경지에 도달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순자
(기본 가르침)
공자의 정신을 이은 사람 중에 맹자가 이상주의 쪽에 가깝다면 순자는 그 반대로 현실주의에 가깝다. 순자(기원전 298년~기원전 238년)는 성악설(性惡說)로 유명하다. 인간의 본성은 원래 악한데, 자라면서 엄격한 훈련을 통해 선한 성품을 키우고 얻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순자의 사상은 진시황(秦始皇)정권의 정치이념으로 채택되었지만, 단명한 진나라의 멸망과 함께 영향력이 사라졌다가 수천 년이 지나 모택동이 좋아하는 사상으로 다시 각광을 받기도 했다.
(성선설과 성악설)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 중에 대부분 맹자의 성선설을 정설로 받아들였다. 이들의 이론은 인간이 소인배에서 군자나 성인으로 변화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거기에 이르는 방법이 다를 뿐 궁극의 목적은 같은 것이다. 아이에게 피아니스트가 되도록 하는데, 맹자는 “너는 피아노에 소질이 있으니 최선을 다해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라”고 가르치고, 순자는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너도 천성이 게으르니 정신 차리고 열심히 연습해서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되라”고 경고하는 방식이다.
신유학
한 대(漢代) 이후 당대(唐代)까지는 불교나 도교가 성행해서 유교가 별로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송대(宋代)(960년 ~1279년)에, 들어오면서 유교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근래 학자들이 ‘신유학(新儒學)’이라고 한다. 신유학은 고전 유학의 부흥만이 아니라 그동안 성행했던 불교와 도교 사상을 포함하여 중국 전통 사상 전체를 아우르면서 나름의 새로운 사상을 체계화했다.
신유학파는 정호, 정이 형제와 주희(朱熹)(1130년~1529년)로 대표되는 ‘이학(理學)’파와 , 육상산과 왕양명(王陽明)(1472년~1529년)으로 대표되는 ‘심학(心學)’파로 나뉜다. 이학을 ‘주자학’이라 하고 심학을 ‘양명학’이라 한다. 명대(明代) 말기에서 청대(靑代)에는 이학과 심학의 번쇄한 이론보다 실천적 지식을 강조하는 실학(實學)파가 등장했다.
신유학은 성인이 되는 가르침으로 ‘대학’을 중요시 하는데, 성인이 되기 위한 수단으로 여덟 단계, 곧 격물(格物)(사물을 궁구함), 치지(致知)(앎의 정도를 극대화함), 성의(誠意)(뜻을 성실히 함), 정심(正心)(마음을 바르게 함), 수신(修身)(인격을 도야함), 제가(齊家)(집안을 꾸림), 치국(治國)( 사회를 지도함), 평천하(平天下)(세계에 평화를 가져옴)이다.
두 학파는 ‘격물’에 대한 해석이 달랐다. 사물을 궁구하는 것을 두고 이학파는 여러 사물 속에 일관되게 있는 ‘이(理)’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심학파는 내 마음이 곧 ‘이(理)’ 이므로 내 마음을 살피는 것이라고 했다. 두 학파 모두 사물이든 마음이든 오랜 기간 깊이 추구하면 결국 밝음이나 깨침을 얻고, 이런 경지에 이른, 사람이 궁극적으로 세계평화를 가져온다는 주장은 같았다.
조선에서는 주희의 성리학(性理學)이 주류를 이루었고, 심학파는 빛을 보지 못했다. 조선조 유학의 대가 퇴계(退溪)나 율곡(栗谷)은 다 같이 이학파 학자들로서 그 테두리 안에서 이(理)와 기(氣)의 관계를 논하고 밝혔다.
유교의 오늘
한 대(漢代)에 이르러 공자에 대한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는 등 숭배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서양 종교처럼 신격화된 것은 아니다. 공자에 대한, 생각은 근대에 오면서 ‘만세사표(萬世師表)’로 표현되는 등 위대한 스승으로서의 면모를 강조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서양문물이 동양에 전해지면서 유교가 이를 수용하고 대처하는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했다. 그 결과 서양에서 발생한 공산주의가 1949년 중국 본토를 지배하게 되고, 그때까지 이어져 오던 공자에게 드리던 제사가 금지되었다. 그 후 1966년에 시작한 문화혁명 당시에는 공자가 극심한 비판의 표적이 되어 공묘에 있던 공자상이 파괴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물론 조선 시대를 통해 공자를 성인으로 모셨고, 지금도 유교를 받드는 사람들에 의해 성인 대접을 받는다. 조선 시대 유학자들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보다 우리나라가 유교를 더욱 정통으로 발전시키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조선의 종말과 함께 정부가 후원하는 제도로서의 유교는 없어졌다. 그러나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한국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유교가 국민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나라라 할 수 있다.
- 감상 -
유교는 공자가 창시한 줄 알았는데, 책을 통하여 옛날부터 내려오던 생활 상식이나 철학을 공자가 정리하고 다듬었다는 이야기는 처음 접하는지라 다소 의외였다. 공자가 죽은 이후로 제자들과 학자들에 의해 집대성되고 발전되어 동아시아의 근본 철학이 되었다. 여하간 유교가 동아시아 정치, 사회, 생활 양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유교가 종교인가?, 라는 문제는 오랜 숙제로 남아 있다. 책을 펴들고 이 문제를 해결해 볼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선뜻 내놓을 답이 없다. 종교는 신을 모시고 숭배하며 가르침을 따르는 것일진대, 유교에서는 딱히 숭배하는 신이 없다. 조상에 제사 지내는 정도를 신으로 숭배한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는 불교와도 다를 바 없다. 다만, 불교는 내세를 인정하고, 윤회를 벗어나기 위하여 깨달음을 얻기 위한 구도(求道)는 종교적인 색채가 있지만, 유교에서는 딱히 그런 것도 없다.
공자의 가르침대로 따르고 공부하고 행동하는 것은 종교라기보다는 생활 철학이라는 생각이다. 그렇게 볼 때, 소크라테스의 가르침과 철학을 따르면 소크라테스교가 되는 원리다. 아무튼, 종교든 아니든 상관은 없지만, 생활 철학으로서 본받고 배워야 함은 마땅하다.
주자학과 양명학에 대해 무수하게 들었지만, 그 뜻을 알지 못했다. 책을 통하여 그들의 주장과 뜻을 알게 된 것은 소득이다. ‘성리학파’ 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무지했는데, 이제 그 연원이 주자학임을 알게 되었으니 기쁘다. 퇴계와 이이가 우주의 기원과 인간의 심성에 대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며 이(理)와 기(氣)에 심취했을지 짐작해본다. 나중에 공부할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미루어 둔다.
[도교]
동양 사상에서 유교, 불교, 도교가 정신적 기둥이었다. 그중에서 특히 유교와 도교는 대칭을 이루는 양대 산맥이다. 윤리와 실천을 강조하는 유교가 양(陽)에 해당한다면, 좀 더 신비한 내면을 강조하는 도교는 음(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두 사상은 서로 보완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양 사회의 정신적 필요에 부응했다. 도교는 엄격하게 따져서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도가(道家) 사상이고, 다른 하나는 도교(道敎) 신앙이다. 도가 사상은 정신적으로 누릴 수 있는 절대 자유와 초월을 추구하고, 이와 대조적으로 도교 신앙은 육체적으로 불로장생하는 것을, 기본 목적으로 한다. 도가 사상은 노자(老子)와 장자(壯者)의 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체계이므로 후대에 와서 ‘노장사상’이라 한데 묶여 불리기도 했다.
노자
(노자와 도덕경)
노자는 기원전 570년에 태어났다고 알려졌으며, 어머니가 임신한 후 82년이 지나 태어났는데, 태어난 아기의 머리는 뱃속에 오래 있어서 이미 늙은이처럼 하얗게 되었고, 이 때문에 노자, 곧 ‘늙은 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전설이 있다. 한(漢)의 역사가 사마천의 ‘사기’에서 노자는 주나라에서 도서를 관장하던 이이(李珥)라고 결론을 내렸다.
노자가 나이 들어 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서쪽으로 가다가 ‘함곡관’이라는 재를 넘다가 재를 지키는 윤희가 “왜 세상들 등지려 하느냐”고 말렸지만, 소용없음을 깨닫고, 후세를 위해 글이나 좀 남겨달라고 간청했다. 노자는 이 간청에 따라 3일 동안 머물면서 글을 남겼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의 ’도덕경(道德經)‘ 5,000자라고 한다.
1940년대 동양사상을 서양에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한 임어당은 “전체 동양 문헌 중에 어느 책보다 먼저 읽어야 할 책이 있다면 그것이 ’도덕경‘이라 생각한다.”라는 말을 했다. 우리가 의식하든지, 못 하든지, ’도덕경‘에 나타난 사상은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양인의 마음을 움직여왔고, 또 종교, 철학, 예술, 정치의 밑바탕에 자리 잡고 있다.
(도덕경의 가르침)
’도덕경‘ 제1장 첫 문장에서 “’도‘ 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라고 했다. 도는 정의되거나 논의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도덕경‘ 여기저기에서 도에 대한 언급이 거듭된다. 제25장에는 “분화되지 않은 완전한 무엇, 하늘과 땅보다 먼저 있었다.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고, 무엇에 의존하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고, 두루 편안하여 계속 움직이나 위험이 없어, 가히 세상의 어머니라 하겠다.”라고 했다. 제42장에도 “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는다.”라고 했다. 도는 만물의 근원, 존재의 근거라는 뜻이다. 제56장에는 도에 대해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하였다.
’도덕경‘에서는, ’도‘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대신 그 작용을 살피고 거기에 맞추어 살면서 ’덕(德)‘을 보라고 가르친다. 인간에게 이상적인 삶이란 결국 도에 맞추어, 도와 함께 살아가는 것, 도와 함께 흐르고, 도와 함께 춤추는 것이다. 이렇게 살기 위해서는 도의 작용이나 원리를 체득하고 그대로 따르면 된다.
되돌아감 제40장에 “되돌아감이 도의 움직임”이라고 했다. 달도 차면 기울고, 밀물도 어느새 썰물이 되고, 낮이 밤이 되고 밤이 낮이 된다. 이 모든 것은 어느 한쪽으로 가다가 극에 달하면 다른 쪽으로 가는 도의 원리에 따르는 운동이다. 인간사도 새옹지마이니 삶의 오르막이나 내리막길에서 느긋한 마음, 의연한 태도로 대하는 것이 득이요. 덕이다.
함이 없음 ’함이 없다(無爲)‘고 하여 아무 하는 일 없이 가만히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 함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자발적이고 은은하여 보통의 ’함‘이 아닌 함’의 원리이다. 인간도 “인위적 행위, 과장된 행위, 계산된 행위, 쓸데없는 행위, 남을 의식하고 남 보라고 하는 행위, 자기중심적 행위, 부산하게 설치는 행위, 억지로 하는 행위, 남의 일에 간섭하는 행위, 함부로 하는 행위 등 일체의 부자연스러운 행위”를 버리고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득이요 득이다.
다듬지 않은 통나무 도가 아무런 꾸밈이나 장식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통나무’인 것처럼 “물들이지 않은 명주의 순박함을 드러내고, 다듬지 않은 통나무의 질박함을 품는 것, ‘나’ 중심의 생각을 적게 하고 욕심을 줄이는 것.” “완전한 비움에 이르고 참된 고요를 지키는 것.”이 덕이 되는 길이다.
하루하루 없앰 ‘도덕경’에 따르면 “학문의 길은 하루하루 쌓아 가는 것,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 가는 것, 없애고 또 없애서 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면 되지 않는 일이 없다”. 는 것이다.
장자
(장자와 ‘장자’)
장자(기원전 369년 ~ 기원전 286년) 는 맹자와 같은 시기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들 서로에 대해 언급이 없으므로 서로 간에 몰랐던 것으로 추정된다. ‘장자’는 그가 남긴 책을 의미하기도 한다. 현재 내편 7편, 외편 15편, 잡편 11편, 모두 33편으로 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내편 7편만 장자의 글이고 나머지는 장자의 후학들이 장자의 이름으로 덧붙였을 것으로 본다.
(장자의 가르침)
‘장자’는 이래라 저래라 하는 교훈적인 가르침이 거의 없다. 책 내용은 대부분 이야기로 되어 있어 읽는 이가 나름대로 필요한 깨우침을 얻으면 되는 것이다. 사실 장자는 무엇을 가르치기 보다 우리가 가진 상식적 고정관념, 이분법적 사고방식, 기기에 기초한 인습적 세계관이나 종교관의 내적 모순을 우리 스스로 살펴보고 타파하여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도와줄 뿐이다.
장자는 인간을 ‘우물 안 개구리’에 비유했다.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이 가진 편협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즉 사물의 양면이나 전체를 보지 못하고 일면을 절대화하므로 사소한 것을 가지고 희비 하거나 목숨을 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진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의식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한다. 의식의 변화가 있게 되면 죽음과 삶마저도 초월하게 된다. 죽음과 삶이 두 가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같은 사물의 양면일 뿐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장자의 사상은 당대(唐代)에 와서 선 불교를 꽃피우는데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특히 9세기 유명한 선승 임제(臨濟)야말로 장자의 참된 계승자라 일컫는다. 선 불교는 사실 인도불교를 아버지로 하고, 중국 도가 사상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도가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민간 종교로서의 도교)
도가 사상이 죽음과 삶의 문제마저도 초월하는 참자유를 추구하는 것에 비해, 민간 종교로서의 도교는 육체적 생명을 최대한 연장하고 죽음을 맛보지 않는 육체적 불멸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종교다. 이러한 열망을 구체화 시킨 ‘장도릉(2세기)’은 ‘도덕경’을 잃고 그 뜻을 터득한 다음 오경과 도참 서적을 섭렵했다. 시대가 험악하여 벼슬할 생각을 버리고 도를 닦고 단약(丹藥)을 계발하여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장도릉은 지금의 사천 지방으로 옮겨 ‘도교’를 창립했다. 그는 ‘노자상이주’ 등의 글을 지었는데, 여기에는 노자의 사상뿐 아니라 오행(五行), 신선(神仙), 양생(養生), 무술(巫術), 치병(治病) 등에 관한 사상이 포함되었다. 장도릉은 이런 사상을 종합하여 종교적 목표가 ‘불로장생’ 하는 신선이 되는 것이라 하였다. 장도릉은 노자를 ‘태상노군(太上老君)’이라 하여 교주로 받들고, ‘도덕경’을 ‘노자오천문’이라 하여 경전으로 삼고 자신은 태상노군에 의해 봉함을 받은 ‘천사(天師)’라 칭했다.
4세기, ‘갈홍(葛洪)(283년~363년)은 당시까지 내려오던 민간 종교로서의 도교를 ’포박자(抱朴子)‘라는 책을 통하여 종합 정리했다. 이 책에서는 신선이 되는 방법으로, 올바른 음식물과 약초의 섭취, 호흡법, 방중술, 연금술, 기를 보존하기 위한 선생의 실천 등을 제시했다.
민간 종교로서의 도교는 중국에서는 계속 맥을 이어오고, 지금의 대만과 홍콩에서는 큰 사원이 있고 괄목할만한 종교가 되었다. 한국에는 독립된 종교단체로서의 도교는 없다. 한국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무속 신앙이 중국 도교의 역할을 대신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사찰의 삼신각과 그리스도교의 기도원이 어느 정도 도교 색채를 띠고 있어, 도교적 욕구를 충족시켜 준 것도 한국에 도교가 따로 존재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감상-
노자의 ’도덕경‘에서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 이 말의 뜻을 곱씹어보지만, 쉽게 이해할 수 없다. ’도‘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말고 그 원리를 터득하고 거기에 맞추어 살면 된다고 하는데, 원리를 터득하기란 더 어렵다. ’도‘를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해야 하는지 책을 읽고는 알 수가 없으므로 더 깊은 공부가 필요하다.
책에서는 도덕경의 가르침 중에 ’함이 없음‘ 이라는 단원을 통해 “인위적 행위, 과장된 행위, 계산된 행위, 쓸데없는 행위, 남을 의식하고 남 보라고 하는 행위, 자기중심적 행위, 부산하게 설치는 행위, 억지로 하는 행위, 남의 일에 간섭하는 행위, 함부로 하는 행위 등 일체의 부자연스러운 행위”를 버리고 자연스럽게 살아가라고 강조한다. 여기에서 ’함이 없음‘을 해석할 때, 무위(無爲)에서 위(爲)를 ’할 위‘로 해석해서 ’함이 없음‘ 이라고 해석하니 이해하는데 혼란스럽다. 위(爲)를 ’할 위‘라고 해석할 게 아니라 ’꾸밀 위‘로 해석해서 ’무위(無爲)‘를 ’꾸밈이 없음‘ 이라고 해석하면 훨씬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장자는 세상을 대할 때 실재(實在), 있는 그대로 직시할 것을 강조하였는바, 그 실천적 과제로서 죽음과 삶이 두 가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같은 사물의 양면임을 깨닫기를 강조한다. 충분히 공감 가는 가르침이다. 사물의 본성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식할 수 있다면, ’도‘를 깨달을 수도 있지 않을까.
책을 펴기 전에는 노장사상이 도교와 동일하다고 인식했다. 그런데 도교가 노장사상을 동기로 하여 태동한 종교인 것은 맞지만, 같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은 배움이다. 도교가 ’장도릉‘에 의해 종교적 색채를 띠고 발전되어 후대에 와서 정교하게 정립되었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 도교는 인간의 영생을 구원하는 종교라기보다는 불로장생을 꿈꾸는 인간의 욕망을 막연하게 바라고 따르는 무속 신앙에 더 가깝다고 여긴다.
[신도]
신도 란 ’신의 길‘이란 뜻으로 일본인이 받드는 전통 신앙이다. 근대 일본 군국주의에서 초강성 민족주의 이념의 근간이 된 것도, 바로 신도이다. 현재 일본 전체 인구의 4% 미만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신도 신자라고 공식 선언했지만, 신도는 일본의 정체성과 정신을 꼴 지우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런 면에서 신도를 이해해야 일본이 보인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일본 정신의 뿌리가 되는 종교이다,
신도는 일본어로 ’가미노미치‘라고 한다. 가미는 신(神)이라는 뜻으로서 인간에게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고 숭배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모두 ’가미‘로 받들었다. 일본에는 800만의 가미가 있다고 한다. 신도에서는 가미와 조화롭게 사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신도는 이런 면에서 정령 숭배에 기원을 둔 종교라 할 수 있다.
신도의 유래
(건국신화)
많은 가미 중에 중요한 가미 이야기는 건국신화에 잘 드러나 있다. 712년에 편찬되기 시작한 ’고지키‘와 720년에 쓰인 ’니혼쇼키‘의 건국신화에서 부부이면서 남매이기도 한 ’이자나기‘와 ’이자나미‘라는 가미가 있었는데, 이들이 일본 열도를 만들었다. 이들은 또 태양의 여신인 ’아마테라스‘라는 가미도 만들었다. ’아마테라스‘ 가미는 너무나 중요한 가미이므로 보통 ’아마테라스오미가미‘라 한다. 그는 손자를 보내 세상을 다스리게 하고, 그 손자의 증손자가 최초의 일본 천황이 되었는데, 그가 진무(神武)천황이다. 기원전 660년에 왕위에 올랐다고 하지만,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하다. 아무튼, 이때부터 천황의 가계는 끊이지 않고 오늘의 일본 천황까지 이른다고 한다.
(양부 신도)
6세기 중순 한국에서 불교가 들어오면서 불교와 신도가 혼합되기 시작했다. 이런 혼합적 경향으로 나타난 것을 ’양부(兩部)신도‘라 한다. 신도 측으로서는 불교의 여러 부처나 보살이 가미의 현현이고, 또 불교 측에서는 신도의 여러 가미가 불교의 부처나 보살의 현현이라는 생각이었다. 예를 들어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는 태양을 대표하는 부처 비로자나라고 본 것이다. 이런 식으로 두 종교의 경계가 흐려지다가 몇 세기가 지난 후 신도는 하나의 독립종교가 아니라 불교의 일부가 되다시피 했다.
(무사도)
17세기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불교와 그리스도교 등 외국 문화의 영향으로부터 스스로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신도를 부흥시키려는 노력이 일었다. 신도의 부흥과 함께 무사 계급의 행동 강령으로 유교 윤리를 받아들였다. 이때 신도와 유교의 윤리 덕목이 합하여 일본 무사 계급 사무라이를 위한 ’무사도(武士道)‘가 생겨났다. 도쿠가와 시대에 주자 학파였던, ’야마가 소코‘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무사도의 덕목은 충성과 명예였다. 특이한 것은 사무라이 사이에서 선 불교가 유행했다는 것이다. 선 불교의 정신 집중, 무아(無我)에 근거한 생사의 초월, 자기 훈련 등이 무사의 삶과 부합하는 면이 많았기 때문이다.
일본 사회는 아직도 이런 무사도 윤리가 눈에 띈다. 재벌이나 회사가 거의 봉건 영주의 성처럼 운영되는 것이 그 예이다. 아직도 많은 회사원은 사무라이처럼 보스에게 절대 충성을 바친다. 조직 폭력 단체인 야쿠자도 이런 무사도 윤리 체계를 유지하는 가장 전형적인 예라 하겠다.
신도의 종류
신사 신도 신도는 크게 신사(神社)신도, 교파(敎派)신도, 민속(民俗)신도로 나뉜다. 신사 신도는 국가가 직접 주관하던 형태의 신도를 말한다. 1868년 도쿠가와 막부가 끝나고 메이지 시대에 들어오면서 일본 정부는 국민을 결속시키는 통치 이념 내지, 정신적 기반으로서 신도를 채택하고 이를 국민에게 강요했다. 헌법에 일본 천황이 신성불가침의 가미임을 명시했다. 1890년 교육칙어를 제정하고 신도의 기본 가르침을 교육의 기본으로 삼았다. 학생들은 신사참배를 하여야 하며, 신사참배 할 때는 누구나 ’자신에게는 죽고 국가와 하나가 됨‘을 다짐하게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으로 접근하는 연합군 전함을 침몰시키기 위해 비행기를 탄 채 연합군 전함과 충돌하는 가미카제(神風) 자살 특공대를 모집할 때, 많은 지원자가 차례를 기다릴 정도였다는 사실도 크게, 놀랄 일이 아니었다. 일본 제국주의 식민 시대 한국에도 군 단위로 신사를 지어 놓고 한국인 모두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1945년 제2차 대전 패배로 연합군의 요구로 인해 천황이 가미라는 주장이 공식적으로 폐기되었으며, 국가 종교로서의 신사 신도도 끝났다.
교파 신도 교파 신도는 일본에 내려오던 재래 종교 전통을 기반으로 19세기 말부터 생겨난 13개의 신도 계열 종파로서 메이지 정부의 공인을 받은 13개 교단을 말한다. 서민 계층에서 민간 신앙 형태로 유행하던 것이 특정한 교조를 중심으로 교파로 조직된 것이다. 예를 들면 산악신앙에 기초한 후지산을 가미로 숭배하는 파라든지, 개인적으로 단식, 호흡법, 냉수욕, 주문 등을 통한 심신의 단련을 목적으로 하는 파라든지, 무속 신앙에 기초하여 병 고침을 강조하는 파 등이 있다. 특히 나키야미 미키(1798년~1887년)가 세운 종파로서 치병을 강조하는 ’천리교‘가 유명하고, 이는 한국에도 들어왔다.
민속 신도 교단 조직이나 교리 체계도 없이 민간에서 일반적으로 받들어지는 민간 신앙이다. 가장 두드러진 표현은 가정에 가미다나를 설치하는 것이다. 가미다나는 조상의 신위나 조그만 신상이나 기타 종교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는 상징물을 모시는 조그만 제단이다. 집안에 졸업식이나 결혼 같은 경사나 기념할 일이 있으면 가미에게 사연을 아뢴다. 그러나 장례식의 경우에는 불교의 스님이 맡아서 하도록 부탁한다. 보통 신도는 삶을 위한 것이고, 불교는 죽음을 위한 것이라고 믿는다.
신도의 오늘
제2차 세계대전 후 신사 신도가 사라진 다음 일본은 일종의 종교적 공백 상태에 빠지고, 이런 상태에서 이른바 ’신흥 종교‘가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다. 일본 사회가 산업화되고 교육 수준이 높아지면서 신도 같은 종교는 없어질 것 같지만, 놀랍게도 일본인 상당수는 평소에는 종교와 무관한 것처럼, 살다가 곤란한 일을 당하거나, 큰일을 시작할 때는 가미를 찾는다. 이런 풍습은 우리나라의 고사 지내는 풍습과 비슷하다.
-감상-
신도는 토테미즘을 숭배하는 의식으로서 존재했으나 천황과 연결고리를 만들어 종교적 색채를 띠기 시작했다. 여하튼 신도는 일본의 정신적, 문화적, 생활적인 측면에서 골격을 이룬다. 제2차대전 이후 희미해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신사참배에 대한 의식을 쉬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의 정신적 숭배 대상으로서 토테미즘보다는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강요하는 측면이 있다. 종교적 보편성이 희박하므로 전도나 교세 확장은 제한되어 일본 내에서도 일부만 신봉한다.
[조로아스트교]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종교였던 조로아스트교는 현재 신도 수가, 고작 25만 명에 불과한 아주 작은 종교이지만, 세계 종교사에 끼친 영향력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이 종교의 가르침은 유대교로 들어갔고, 유대교를 통하여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로 들어갔다. 그리스도교 ’마태복음‘에 아기 예수가 태어났을 때,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 왔다는 이야기 속의 ’동방박사들‘은 바로 조로아스트교 제사장이다.
창시자 조로아스트
독일 철학자 니체의 저서 ’자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주인공이 바로 조로아스터이다. 그의 출생 연대는 불확실하나 기원전 660년 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본래 이름은 ’자라투스트라 스피타나‘였다. 이름은 ’낙타를 가진 이‘라는 뜻이다. 서른 살에 어느 날 거대한 천사장을 만났다. 그는 세상에 한 분뿐인 참된 신인데, 그의 이름은 ’아후라 마즈다‘이고 조로아스트는 그의 예언자라고 일렀다. 그 후 8년 동안 아후라 마즈다의 나머지 다섯 천사장들이 하나씩 나타나 그에게 진리를 전해 주었다.
조로아스트가 진리를 전하기 시작했지만, 그를 따르는 사람이 없었다. 마침내 그의 사촌 중 하나가 그를 믿고 제자가 되었다. 조로아스트와 사촌은 왕에게 진리를 전하러 갔다가 투옥되어 2년간 옥살이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왕과 온 조정이 조로아스터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그 후 조로아스트는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전쟁을 통해서 퍼져나가기도 했는데, 전쟁 중에 적군이 쳐들어와 조로아스트를 살해했다. 그의 나이 77세였다.
조로아스트의 기본 가르침
신관 세상에는 한 분의 참신이 있는데, 그가 바로 아후라 마즈다로서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이다. 아후라는 ’주(主)‘라는 뜻이고, 마즈다는 ’지혜‘라는 뜻이므로 아후라 마즈다는 ’지혜의 주님‘이라는 뜻이다. 조로아스트는 아후라 마즈다 외에 당시 사람들이 섬기던 다른 잡신은 모두 거짓 신이라고 선언하였다.
세계 여러 나라 종교에서 보통 창조신을 주신 혹은 최고신으로 받드는데, 창조가 끝나고 나면 창조신은 전면에서 사라진다. 그런데 조로아스터가 한 일은 최고 신이지만 잊혀진 신, ’테우스 오티오수스‘를 다시 전면으로 모시고 나와 이 신만이 참된 신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것은 세계 종교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이다. 유대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에서 발견되는 유일신관의 근원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악령 조로아스터에 따르면 아후라 마즈다에서 두 영(靈)이 나왔는데, 선한 영 ’스펜다 마이뉴‘와 악한 영 ’앙그라 마이뉴’이다. 이중 악한 영 앙그라 마이뉴는 샤이틴 혹은 사탄으로 불렸다. 조로아스트교는 종교 최초로 악마에 대한 계보를 체계화한 종교라고도 할 수 있다. 악의 문제에 있어서 종교사적으로 지대한 공헌을 한 셈이다.
대쟁투 세상은 선한 세력과 악한 세력이 싸우는 대쟁투의 현장이다. 인간은 타고난 이성과 자유 의지를 활용하여 선한 길을 택하므로 생애에서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종말관 사람이 죽으면 선한 영혼은 넓고 편안한 다리를 건너 낙원으로 가고, 악한 영혼은 칼날보다 더 예리한 다리를 건너다가 결국 지옥으로 떨어진다. 낙원과 지옥에 간 영혼은 거기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다. 아후라 마즈다가 예정해 놓은 세상 끝에 이르면 그는 이 세상을 완전히 쓸어서 창조 때의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회복해 놓는다. 이때 영혼들이 부활하고, 악한 영혼은 순화되어 선한 영혼과 합류한다. 그러나 사탄과 그의 악귀들은 유황불에 완전히 소멸되어 새 세상에는 더 이상 악이나 악의 흔적이 없게 된다.
조로아스트교의 공헌
기원전 586년 유대 왕국의 멸망으로 유대인은 바빌론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끌려가 살았다. 기원전 538년 고레스 왕이 일어나 바빌론을 멸망시키고 메도-페르시아 왕국을 건설했다. 히브리어 성경에 따르면 고레스 왕은 유대인을 해방하고 유대인에게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을 허락한 ‘메시아’였다. 조로아스트교는 바로 고레스 왕과 그 제국이 신봉하던 종교였다.
자연히 유대인은 조로아스트교의 영향을 받았다. 유대인이 586년 바빌론 포로로 가기 전에는 천사장, 사탄, 육체 부활, 심판, 낙원, 지옥, 세상 종말 등의 개념이 없었는데. 539년 포로에서 풀려난 이후에 쓰이거나 편찬된 문헌에는 이와 같은 개념이 등장한다. 그러다가 예수 당시에는 이런 개념이 유대교 신학의 근간을 이루게 되고, 초기 그리스도인도 이런 개념을 그대로 도입했다. 이슬람교도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를 통해 무리 없이 이런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현재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에서 이런 개념을 빼면 뭐가 남을까 할 정도로 조로아스교가 이들 종교에 기여한 공로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가히 획기적이었다.
-감상-
조로아스트교가 교세가 줄어들어 명맥이 무의미하지만,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성립의 근간을 제공함으로써 조로아스트교가 종교에서 할 일은 다 한 셈이다. 그의 씨앗이 고등종교로 발전되어 현재 전 세계의 중심축이 되었으니 작거나 미미한 족적은 아니다. 세계종교를 공부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한 축이다.
창조주 주님, 유일신, 사탄의 개념들이 조로아스트교에서 성립되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된 것은 독자로서 충분한 보상이 된 셈이다.
[유대교]
서양 정신사를 지배해 온 그리스도교 사상의 근원은 유대교와 그리스 철학이었다. 종교적으로는 예루살렘에서, 철학적으로는 아테네의 종교와 사상이 만나 그리스도교라는 종교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유대교는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이슬람교의 근원이 되므로 유대교를 이해하는 것은, 이들 종교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유대교의 시작
(출애굽)
‘출애굽’ 사건은 노예로 살던 유대인(히브리인)들이 애굽(이집트)에서 나와 자유로운 민족으로 해방된 사건이다. 출애굽 사건은 기원전 13세기 초, 바로 왕 람세스 2세 치하에서 일어났으며, 유대인의 종교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의례다.
당시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나 여러 거대한 토목공사에 동원되어 고생하던 히브리인들을 야훼 신의 명령에 따라 인도해 낸 지도자는 모세였다. ‘출애굽기’에 따르면 모세는 레위족에 속한 히브리인이었으나 히브리인 가정에서 태어난 모든 남자아이는 죽이라는 이집트 왕의 명에 따라 그 부모가 아기를 바구니에 넣어 나일강에 띄워 놓은 것을 이집트 공주가 주워 키웠다. 모세는 이집트 공주의 양아들로 자라면서 왕자로서 받아야 할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모세가 히브리인이 핍박받는 것을 보고 이집트인을 살해해서 피신하여 목동으로 있을 때, 야훼 신이 나타나 이집트에서 고통당하는 히브리 백성을 구출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게시를 받았다. 모세는 그의 형 아론과 함께 이집트로 들어가 토목공사 노예로 시달리는 히브리인 200만 명 정도를 야훼 신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넜지만 야훼 신이 지정한 가나안에는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곧장 들어가지 못하고 40년을 헤맸다.
이 시기에 모세는 십계명과 여러 율법이나 행동 강령을 기초로 하여 새로운 민족, 새로운 국가로 거듭나게 하였다. 그뿐 아니라 야훼 신과 맺은 언약을 통해 ‘선택된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되었다. 이때, ‘언약궤’가 야훼 신과 함께 하심이 언약의 상징으로 주어졌다. 이처럼 출애굽은 유대인에게 새로운 법, 새로운 민족, 새로운 자의식, 새로운 신관, 새로운 종교를 제공한 최고 중요한 사건이다.
(출애굽의 배경 - 창세기 이야기)
아브라함과 그 자손 출애굽 사건이 유대인에게 절대적인 의미의 사건이므로 히브리어 성서에 처음으로 나오는 ‘창세기’ 이야기는 애굽 사건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창세기’에는 메소포타미아 지방 갈대아 우르에 아브라함이 살았는데, 그곳에는 다신론 신앙이 주류였다. 야훼 신이 아브라함을 불러 아버지의 땅, 아버지의 신앙을 떠나 그가 ‘지시할 땅’으로 가면 거기에서 장차 그를 통해 큰 민족이 일어나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고 지금의 팔레스타인 가나안 땅으로 부인 사라와 함께 떠났다.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 75세였다. 10년이 지나도 대를 이을 아들이 없자, 사라는 여종 하갈을 남편에게 들여 임신하게 하고 아들을 얻었는데, 그가 이스마엘이다. 그 후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고 사라가 90세가 되었을 때, 사라도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이삭이다. 아기를 낳은 사라는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한다는 이유를 들어 아브라함에게 일러 이스마엘과 하갈을 집에서 내쫓았다. 지금 이슬람교를 받드는 아랍족은 이렇게 쫓겨나 일가를 이룬 이스마엘이 자신들 종족의 조상이라 생각한다.
이삭은 아버지의 고향 메소포타미아에 있던 친척 처녀 리브가를 아내로 맞아, 에서와 야곱이라는 쌍둥이를 얻었다. 이삭은 에서를 좋아했고, 리브가는 야곱을 좋아했는데, 리브가가 야곱을 위하여 술수를 부렸는데, 이 일로 에서와 야곱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에 야곱은 에서를 피해 메소포타미아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갔다. 거기서 20년을 살면서 아내가 된 외삼촌의 두 딸 레아와 라헬 그리고 그들의 몸종들에게서 12명의 아들을 얻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얍복 강기슭에서 천사와 씨름하고 그를 이기므로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이라는 뜻을 가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형, 에서와 화해하고 고향에 정착한 야곱은 아내 라헬에게서 얻은 요셉과 베냐민을 편애했다, 이를 시기한 형제들이 요셉을 이집트 대상들에게 팔았다. 요셉은 이집트 바로 왕의 시위 대장 보디발의 집에 팔려갔는데,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물리친 죄로 무고하게 감옥에 가고, 그 인연으로 이집트 왕의 꿈을 해석해 주게 되는데, 앞으로 7년 대풍년과 7년 대흉년이 들 것이니 흉년에 대비해 풍년 동안 양식을 비축할 것을 권고했다. 이 일로 그는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다.
예언대로 7년 풍년이 있고, 7년 가뭄 때 가나안 땅에도 흉년이 들어 요셉의 형제들이 양식을 구하러 이집트로 오고, 마침내 야곱을 비롯하여 70명이나 되는 온 식구가 이집트로 이주하여 고센 땅에 정착했다. 야곱의 열두 아들에게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생겼다. 이들이 이집트에 정착한 후 400년이 흘러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는 왕이 등장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삼고, 그 고역을 시킬 때 모세가 등장했다.
천지 창조 창세기 첫 장에는 하나님은 6일 만에 아담과 하와를 포함하여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고 제 7일에는 쉬셨다. 둘째 장에는 인간을 만드는 과정이 담겨 있다. 아무튼, 하느님이 지으신 세계가 창조주가 보기에도 ‘좋았다’ 할 만큼 훌륭했지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다음, 또 그 아들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여 살인자가 되는 등 세상은 점점 나빠져서 죄악이 천지에 가득하게 된다.
결국, 노아를 시켜 방주를 만들게 하고 노아의 식구 여덞 명과 각종 동물과 새와 곤충 몇 쌍씩만 방주를 타고 살아남게 하고 나머지는 다 멸망시켰다. 방주에서 나온 다음 하느님은 노아에게 다시는 물로 멸망시키는 일이 없으리라 약속했다.
그 이후 인간은 다시 번성기를 시작하고 하느님의 약속을 잊은 채, 물로 멸망 당하는 일은 면해보겠다고 하늘에 닿을 수 있는 탑을 짓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벨탑이다. 히브리어 성서에 따르면 하느님은 이를 좋게 여기지 않고, 이들의 말을 혼란하게 하여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도록 했다. 할 수 없이 탑 쌓는 일을 포기하고 말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어울려 땅에 널리 퍼져 살게 되었다. 아브라함은 노아로부터 10대에 해당 한다.
사사시대
광야에서 40년을 헤매던 이스라엘 백성은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의 인도로 요단강을 건너가 원주민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하여 가나안을 정복하고 12지파가 나누어 차지한다. 전쟁하는 동안에는 언제나 언약궤를 메고 다니면서 야훼 신의 지도를 받았다. 가나안 정복 후 200년은 열두 지파를 통괄해서 다스리는 왕이 없었다. 적군이 침입하면 그때그때 임시 지도자가 나와서 이들을 물리쳤는데, 이런 지도자를 사사(士師)라고 하였다. 이들 중 유명한 사람은 ‘삼손과 데릴라’의 삼손과 ‘기드온’ 성서를 통해 알려진 기드온 같은 사사들이다.
이스라엘 왕국 시대
(사울과 왕국의 건설)
왕이 없이 하느님이 직접 다스리는 신정 정치에 불만이 생기기 시작할 무렵, 하느님의 지시를 받은 선지자 사울이 이스라엘의 첫 왕이 된다. 그러나 사울은 실패한 왕이 되었다. 사람들이 아직 왕권정치에 익숙하지 못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다윗과 왕국의 전성기)
남쪽 베들레헴 목동 출신의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두 번째 왕이 되었다. 다윗의 재위 기간(기원전 1,000년 ~ 기원전 961년)은 이스라엘 왕국의 전성기였다.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았다. 다윗이 유부녀 밧세바에게 눈이 멀어 그의 남편 우리아를 전방에 배치하여 전사하게 하고, 그를 궁으로 불러들여 왕비로 삼았다.
(솔로몬과 왕국의 분열)
밧세바의 첫아들은 야훼 신에 의해 죽었다. 그 후에 난 아들이 솔로몬이다. 왕자의 난이 극심했지만, 결국 솔로몬이 다윗을 이어 왕이 되어 다윗의 엄청난 부(富)도 물려받았다. 그는 재위 기간(기원전 961년~기원전 922년)에 화려한 성전을 짓고 그 지성소에 ‘언약궤’를 봉안했다. 솔로몬은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부인을 위해서 아름다운 왕궁을 짓고 셀 수 없이 많은 후궁과 궁녀를 거느렸다. 이른바 ‘솔로몬’의 영광이었다.
솔로몬 재위 기간에 생긴 종교적, 정치적, 군사적 실책으로 여기저기 민란이 일어나는 등 나라의 기초가 흔들리다가 결국, 그의 죽음과 함께 남북으로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열두 지파 중 열 지파가 뭉쳐 예루살렘에 반기를 들고 북방 ‘이스라엘’을 세우고, 유다와 베냐민 두 지파가 남아 예루살렘을 지키며 남방‘ 유대’를 이뤘다.
(바빌론 포로)
나라가 갈라진 후 200년쯤 지난 기원전 722년 북방 이스라엘은 아시리아 왕국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고, 아시리아 왕국의 인구 분산 정책에 따라 열 지파는 뿔뿔이 흩어졌다. 이것이 이른바 ‘디아스포라’(이스라엘 사람들의 흩어짐)의 시초가 된 셈이다.
남쪽 유대는 좀 더 있다가 기원전 586년 바빌론 왕 네부카드네자르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는데, 이때 유대인 10만 명이 포로로 끌려가 바빌론에서 함께 살았다. 이 기간을 유대인의 바빌론 포로 혹은 수인(囚人) 기간이라고 한다. 북방 이스라엘인은 사라지고, 유대인만 남았으므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을 그때 이후 유대인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들은 바빌론 포로로 있을, 동안 야훼 신이 더 이상 자기 민족만을 보호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신은 만국을 지배하는 보편 신이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이때, 조로아스트교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고, 유대교 신앙을 도입하였다.
예언자 운동
북방 이스라엘의 멸망이나 남방 유대의 포로 기간을 전후해서 예언자들이 많이 등장했다. ‘예언자’ 하면 보통 앞일을 미리 예견하는 예언자를 말하기 쉬운데, 당시 예언자의 주 기능은 미래를 점치는 것보다 야훼 신의 말을 받들어 대변하는 ‘예언자’였다. 이들 예언자는 하느님의 대변인으로 부패한 왕권과 사회를 위해 경고와 질책의 말을 전했다.
이때부터 ‘승리 주의적’ 야훼 신에서 보편신, 사랑과 긍휼의 신을 강조한다. 페르시아 해방자 고레스를 하느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즉, ‘메시아’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런 예언자들의 한결같은 경고는 나라가 야훼 신을 멀리하여 부패하면 결국, 망할 것이라는 기별이었다. 이렇게 종교인으로서 사회 정의와 공의를 외치는 예언자적 전통은 유대교가 인류에게 남긴 큰 공헌 중 하나이다.
포로 시기 이후의 유대교
(성전 재건과 ‘토라’의 편집)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유대인을 해방시켜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했다. 소수의 유대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나, 상당수의 유대인은 그대로 바빌론에 주저앉아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더욱 확대시켰다. 포로에서 돌아올 당시 지도자는 에라와 느헤미아였다. 이들의 지도로 유대교는 재건 사업을 시작했다.
기원전 520년 ~ 기원전 516년에 제2성전을 건축하고, 성전에서 제사장이 사용할 목적으로 ‘토라’를 편집했다. 안식일, 음식에 관한 규례, 할례, 유월절 등의 의식이 ‘토라’에 모두 담기게 되었다.
(그리스의 영향)
페르시아 제국도 기원전 333년 알렉산더 대왕이 이끄는 그리스 제국에 망했다. 알렉산더 대왕은 이집트로 가는 길에 유대를 점령해서 자기의 세력권 안에 두었다, 이때부터 유대를 비롯한 중동 지역에 그리스 문화가 스며들기 시작하여 그리스의 말, 의복, 건축, 사상 등이 유행했다. 특히 그리스어는 그 일대에서 국제어 역할을 했다. 이때 히브리어로 된 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
로마 식민지 시대의 유대교
(유대교 당파들)
마카비 시대 전후로 유대에는 종교 및 정치이념의 차이에 따라 여러 종파 내지, 당파가 생겨났다. 규모가 큰 것으로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세네파 등이 있었다. 이들 중 사두개파와 바리새파 사이의 갈등이 내전으로 확대되고, 이로 인해 시리아에 주둔하던 폼페이 장군이 이끄는 로마 군대가 이를 평정한다는 구실로 기원전 63년에 유대에 진주해 유대를 식민지로 삼고, 그 후 심한 세금으로 유대인을 수탈했다. 로마 통치자들은 안티파터를 왕으로 삼고, 그가 죽자 그 아들이 왕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예수 탄생 이야기와 관련되어 잘 알려진, 헤롯 왕이다.
(메시아주의)
야훼 신의 약속에 따라 유대가 세계를 지배하고, 그런 나라로 인도할 메시아가 나타나리라 확신했다. 유대인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으니 야훼가 그 약속을 지킬 때가 되었다 믿고 기다렸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가 바로 그 대망의 메시아(그리스도)라고 믿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여전히 메시아가 오기를 고대했다.
(예루살렘 멸망)
메시아를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자 유대인 중 ‘열성당’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66년 로마에 반기를 들었다. 결국, 70년 로마 황제의 아들 티투스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은 제2 성전의 기초가 되었던 벽만 남고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 후 중건되지 않고 기초 벽만 현재까지 서 있는데, 이것이 바로 ‘통곡의 벽’으로 지금도 유대인들의 순례자들이 찾아가 기도를 한다.
132년 다시 봉기를 일으켰지만, 전 도성이 완전히 파괴되어 팔레스타인은 실제로 유대인이 거의 살지 않는 곳이 되었다. 이후 유대인들은 완전히 흩어져 종교적, 민족적 중심지가 없이 모두 디아스포라 상태에서 떠돌며 살게 되었다. 성전이 없어지고 제사장 계급도 없어지니 갈라져 싸우던 사두개파도, 바리새파도, 에세네파도 없어졌다.
(시너고그와 ‘탈무드’)
유대인들의 성전이 없어지고 뿔뿔이 흩어져 성전에 모이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때 등장한 것이 ‘시너고그’(모임, 회당)로서 지난 2,000년 동안 유대교의 중심이 되었다. 시너고의 지도자는 ‘랍비’로서 ‘나의 선생’이라는 뜻이다. 시너고그는 제사 드리는 곳이, 아니라 ‘토라’를 읽고 기도하는 장소다. 랍비는 제사장이나 목사가 아니라 ‘토라’를 읽고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그렇지만 랍비는 실질적으로 신부나 목사 같은 역할을 했다.
랍비들은 야훼 신으로부터 더 이상 계시가 없는 것으로 믿고, 아브라함이나 모세 시대 유목민에게 주어진 율법이 그때와 다른 환경에 사는 자신들에 적용될 수 있도록 성서를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재해석 과정에서 여러 주석이 붙었는데, 이런 주석을 집대성한 것이 6세기 초 바빌론에 있던 랍비들에 의해 편집된 ‘탈무드’이다. 이후 ‘탈무드’는 유대인에게 히브리어 성서와 함께 최고의 권위를 가지는 종교 서적이 되었다.
중세 유대교
그리스도교의 등장과 함께 유대교는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있었다.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의 완성으로 보고 유대인은 모두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신자가 모두 유대인으로 시작된 유대인의 종교였던 그리스도교는 바울의 전도 활동 등으로 점점 그리스 문화에 젖은 비유대인 사이에 퍼져서 예수를 그리스의 종교나 철학으로 교리 화하였다. 특히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는 할례나 기타 유대인의 규례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치는 등 유대교 뿌리를 떠나 그리스화하면서 유대인이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이방 종교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 이르자 그리스도인 중에서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이 커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로마인에 의해 죽은 예수를 유대인이 죽였다고 했다. 그리스도 경전인 ‘신약’에는 유대인 전체가 예수의 배반자라는 인상을 남겼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품고 있던 적대감이 312년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공식 종교가 되면서 여러 행동으로 옮겨지고, 이에 따라 유대인의 입지는 더욱 불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슬람교가 생기면서 이슬람교 국가에 많이 정착하게 되었는데, 그리스도교 국가보다는 이슬람교 국가가 유대인을 ‘책을 가진 백성’이라는 이유로 더 관대하게 대하였기 때문이다. 유대인과 이슬람교 인이 이루어 낸 문화가 그 당시 여러 면에서 유럽 문화를 훨씬 능가하였다.
그리스도교 국가에 있던 유대인들은 여러모로 박해를 받았다. 유대인에게 그리스도를 죽인 수치의 상징으로 특수한 모자를 쓰게 하거나 가슴에 천을 달고 다니게 했다. 십자군이 생기면서 독일을 시발점으로 전 유럽에 걸쳐 있던 유대인을 ‘불신자’로 지목하고 무더기로 살해하였고, 남아 있는 유대인에게는 추방령을 내렸다. 독일, 영국, 프랑스에서는 유대인의 거주권을 박탈했다.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던 유대인은 스페인에 가서 살았는데, 거기서도 그리스도교로 개종을 하든지 떠나든지 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밖에도 유대인은 땅이나 가옥 등 부동산을 소유하지 못하였다. 자연히 돈이 있으면 빌려주거나 보석을 취급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에 거주하던 유대인은 ‘게토’라는 구역에 따로 살게 하고 통행 금지하여 관리했다.
근대 유대교
16세기 그리스도교 종교개혁은 유대인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마르틴 루터가 유대인에게 호의적으로 대하며 유대인을 프로테스탄트로 개종시키려 했지만, 유대인들이 이를 거절했다. 유대인의 해방은 1789년 나폴레옹이 이끈 프랑스혁명이었다. 이른바 ‘인권선언’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법 앞에서는 평등함을 선언했는데, 이에는 유대인도 포함되었다. 나폴레옹은 가는 곳마다 게토를 없앴다. 유대인은 법적으로 게토에서 해방되었다. 주류사회의 저항도 있었지만 결국, 대다수 유대인이 게토에서 해방되어 주류사회에 편입되었다. 그 대표자가 멘델스존 같은 사람이었다. 유대인도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고, 그때부터 유럽에서 명성 높은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유대교의 종류)
개혁파 유대 사회의 개방과 함께 유대교 사상에도 변화가 왔다. 교육을 받은 지식층 유대인들은 유럽 계몽사상과 보조를 맞추어 유대교를 개혁하려 하였다. 이들이 ‘개혁파 유대교’이다. 이들은 메시아의 도래나 죽은 자의 부활이나 유대 땅에 나라를 세운다는 생각도 버렸다. 또한, 여자에게도 랍비가 될 자격을 주었다.
정통파 개혁파의 급진적인 움직임에 반대하는 ‘정통파 유대인’들이 생겨 개혁파를 혁파하려고 했다. ‘토라’에 나타난 야훼의 계시가 최종이며, 그 말씀과 ‘탈무드’의 지시에 충실해야 한다는 정통 믿음을 개혁파가 뒤엎었기 때문이었다. 대체로 정통파 유대인이 개혁파 유대인보다 많았다. 수세에 몰린 개혁파는 영국이나 미국으로 건너가서, 미국은 정통파보다 개혁파의 수가 더 많다. 이외에도 ‘보수파 유대교’, ‘재건파 유대교’, ‘근본주의파 유대교’ 등이 있었다. 유대교인의 경우 어머니가 유대교인이면 자동으로 유대교인이지만, 아버지만 유대교인이면 별도로 유대교에 입교해야 유대교인이 된다.
(시온주의)
1800년대 중반에 들어오면서 유대인 중에 경제적,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등장하면서부터 반유대주의를 부추기는 계기가 되었다. 유대인은 결국 자신들의 나라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절실하게 느꼈다. 오스트리아 의사 ‘테오도르 헤르츨’은 1896년 ‘유대국’이라는 책을 써서 “조국 시온으로 돌아가자”고 호소했다. 이 운동을 ‘시온주의’라고 했으며, 유럽 여러 나라로 확산되었다.
팔레스타인에 이주한 유대인들은 1909년 ‘텔아비브’라는 도시를 건설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1917년 영국을 위해 복무하던 시온주의자가 영국 외상을 설득해서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한 국가 건설을 우호적으로 생각한다’는 ‘벨푸어 선언’을 발표하게 했다.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이 관장하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유대인들이 대거 이주했다.
(유대인 대량 학살)
1933년 히틀러가 나치 정부를 수립하고 ‘유대인 문제 해결’이라는 반유대인 규정을 제정했다. 1941년에는 ‘최후의 해결’이라는 정책으로 유대인을 완전히 말살하려고 했다. 유대인 대량 학살의 정치, 경제적 원인과 동기가 여러 가지겠지만, 결과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세계 유대인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600만 유대인이 살충제로 사용되던 ‘지클론 B’ 가스로 살해되었다.
1947년 유엔총회에서 유대인에게 나라를 건설하도록 허용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무수한 난관을 극복하고 1948년에 탄생시킨 ‘조국’이 바로 ‘이스라엘’이다. 이 지역에 본래부터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이들은 이웃 지역으로 피신 가서, 그곳에 살던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결집하여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구성하고 자신들의 ’조국‘을 회복하기 위해 오늘까지 계속 싸우고 있는데, 평화의 길은 아직도 요원하다.
유대인이 지키는 것
정통 유대인들은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 안식일로 지정하고 철저히 지킨다. 안식일 제도는 유대인의 종교 생활에 근간이 된다. 유대인이 안식일을 지켰다기보다는 안식일이 유대인을 지켰다는 말이 성립될 정도다. 유대인은 음식을 엄숙히 가린다. 또한, 유대인 남자아이들은 어릴 때 ’언약의 표‘로 할례를 받는다. 그리고 남녀 13세가 되면 ’바르 미츠바(계명의 아들)‘, ’바트 미츠바(계명의 딸)‘라는 성인식을 치르고 유대 사회에서 성인으로서의, 자격을 갖는 것이 특징이다.
유대의 오늘
2013년 통계에 의하면 유대인의 수는 1,400만 명이다. 이스라엘 인구 800만 중 약 600만 명이 유대인이다. 미국에 약 550만 명, 캐나다에 약 37만 5천 명, 그 외에 유럽과 기타 여러 나라에 200만 명 정도가 분포되어 있다. 최근 세계적인 개방의 물결에 따라 비유대인과의 결혼이 늘어나고 있다. 비유대인들과 결혼한 부부의 자녀 중 3분의 1 정도만 유대교를 실천하고 있다.
많은 유대교 사상가와 유대인이 현재 가지는 최대의 의문은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과 현대 이스라엘 건국이 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엄청나게 새로운 정황에서 민족적 정체성과 종교적 의미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재점검하려는 노력이라 볼 수 있다.
-감상-
종교적으로 유대교는 조로아스트교의 영향을 받아서 그리스도교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이번 기회에 역사적인 배경과 종교적인 흐름을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은 보람이다.
유대교를 알게 되면서 구약과 신약의 구분을 정확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또한, 예수가 유대교인이라는 사실도 새롭게 알게 된 정보다. 그 보다, 더 충격적인 정보는 이슬람과 그리스도교가 아버지는 같고 어머니가 다른 형제의 자손들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현대의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는 왜 앙숙이 되었을까. 신을 믿는 종교의 세계에서도 신의 사랑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한 인간의 욕망을 버릴 수는 없는가 보다. 신이 사랑을 원하는 만큼 듬뿍 주지 않아서 그런 걸까.
유대교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현재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과의 전쟁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유럽에서 유대인을 학살하고 배척하려 했던 이유가 뭐였을까에 대한 물음에는 아직 정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겠다. 그리스도교가 발생하면서 유대인과 다툼이 생겼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혹시 절대자를 차지하기 위한 암투였을까. 유대인들이 자신들만 신의 계시를 받은 자들이라는 믿음에 대한 반감이었을까.
2,000년 이상 박해를 받았던 유대인들은 근대에까지 이어져 대량 학살당하기까지 했다. 독일의 히틀러에게는 2,000년 전 독일인들이 유대인을 박해했던 피가 아직 살아 있었던 것일까. 왜 그런 감정들은 지워지지 않고 이어져 왔을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현재도 유대인들은 주변국들과 싸우지 않는 날이 없으니 그들의 역사적 소명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미래의 유대인들은 유럽에서 어떤 대우를 받게 될까. 계속 박해의 심리가 이어지게 된다면, 그 해결책은 없는 걸까. 유대교를 포기하면 유대인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일까. 알아갈수록 더 오리무중이다.
[그리스도교]
그리스도교는 현재 세계에서 신도 수가 가장 많은 종교로 대략 18억~20억 명 정도 된다. 한국에서도 1970년대 이후 그리스도교인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최근 통계에 의하면, 가톨릭(11%)과 개신교(18%)를 합해 남한 인구의 3분의 1이 그리스도인이다. 이는 한국 전통 종교인 불교를 믿는 인구를 넘어선다. 그리스도교는 이제 한국인들에게 외래 종교가 아니다.
창시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교는 나사렛 예수의 삶과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에 기초한 종교라 할 수 있다. 현재는 예수가 널리 알려졌지만, 예수 당시에는 그를 따라다니던 제자들과 얼마의 무리를 제외하고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그에 대한 기록은 ’신앙 고백서‘ 격인 ’사복음서‘ 이외에는 전무 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사복음서의 내용은 ’신앙 해설서‘의 성격이므로 객관적인 역사적 자료로는 불충분하다.
(출생과 성장)
예수의 출생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헤롯 왕 때에”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헤롯이 죽은 기원전 4년 이전으로 추측된다. 서기 26년이나 27년에 침례를 받을 당시 예수의 나이가 30세였으므로, 역산하면 기원전 6년~기원전 4년에 출생했을 것이다.
예수가 갈릴리에서 자라나 갈릴리 사람이라는 것은 이견이 없다. 출생 연도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마태복음의 기록에 의하여 기원전 4년으로 보고 있다.
(침례와 시험)
예수는 30세에 침례 요한에게서 침례를 받았다. 당시는 물을 뿌리거나 바르는 ’세례‘가 아니라 전신이 물에 잠기는 ’침례‘였다. 침례를 받은 후 곧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광야로 나가 40일간 금식과 기도로 시간을 보냈다. ’공관복음‘은 예수가 사탄의 시험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 예수는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고 초능력이나 권력이 아닌, 의식 변화를 통한 일반적인 세계관이나 가치관으로 바뀌는 체험을 한 것이다.
(갈릴리에서의 활동과 가르침)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침례와 시험을 받은 후 갈릴리로 돌아와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복음을 외쳤다. 학자들은 이 기별이 예수가 가르친 복음의 핵심이었다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그러나 이 기별의 참된 뜻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석은 학자마다 다르다. 즉, ’예수의 종말관‘이 무엇이었나. 알아보는 문제를 두고 여러 해석이 있다.
철저한 종말관 ’알베르트 슈바이처‘에 의하면 예수는 자신의 당대에 세상 끝이 이를 것으로 믿고, 그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고 가르쳤다.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러 보내면서 세상 종말이 임박했으니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도 내주라“는 등의 가르침을 주면서, 작은 일로 다투지 말라고 가르친 것이다.
실현된 종말관 영국의 신약학자 ‘다드’는 예수가 미래에 올 종말을 기다리지 않았다고 본다. 예수의 활동이 바로 천국 건설을 위한 것이므로, 천국은 이미 실현된 것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왔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언은 ”하늘나라에 이르렀다.“고 번역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구속사적 종말관 스위스 신학자 ‘오스카 쿨만’은 예수가 그의 활동으로 천국이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으므로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라 해석했다.
실존적 종말관 독일 신학자 ‘루돌프 볼트만’은 예수가 임박한 종말을 가르친 것은, 시간이나 장소를 말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존적 ‘결단’을 촉구하는 시각이라고 해석했다.
비종말관 ‘마커스 보그’를 비롯한 최근의 예수 세미나 학자 중 일부는 예수가 종말론적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환기적 종말관 작가는 예수가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했을 때, 가장 핵심적인 말은 ‘회개’라고 본다. ‘회개’란, 우리 내면의 완전한 ‘의식개혁’을 촉구하는 것으로서, 예수는 이런 의식개혁을 촉발하기를 원했고, 이를 위한 수단으로 사람들에게 천국이 임박했음을 환기시킨 것이다. ”천국이 가까워 왔으니 의식 개변의 체험을 하라“는 가르침이었다는 주장이다. 이는 예수가 스스로 체험한 의식의 변화를 사람들이 경험해 보기를 원했다는 뜻이다.
예수는 ‘천국 복음’을 3년 정도 가르치며 열두제자를 모았다. 그중에는 어부가 많았다. 열둘이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숫자라 할 수 있다. 그는 제자들에게 천국 건설을 위해 세속적인 돈이나 욕망에 집착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새나 꽃처럼 특별히 스스로를 위해 애쓰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돌보신다는 뜻이다.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는 노자(老子)를 연상하게 한다.
예수의 가르침은 당시로는 ‘파격적’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정결제도’에 따라 병든 사람, 죽은 사람, 피 흘리는 사람, 천한 사람 등을 부정 타는 사람으로 피했는데, 예수는 나병 환자, 죽은 사람, 혈우병, 여인 등 누구라도 그의 도움을 원하는 사람을 마다하지 않았다.
예수가 전한 가르침의 중심은 ‘자비’였다. 당시 모두가 ‘레위기’의 명령에 따라 하느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해야 된다고 생각할 때, 예수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라고 가르쳤다. 건강상태, 사회적 위치, 인종, 종교에 따라 누가 의로우냐 거룩하냐 깨끗하냐 바르냐 하는 것이 표준이었던 세상에서 그는 이런 차별과 장벽을 허물고 ‘누가 고통당하느냐’라는 것을 하나의 표준으로 삼고 고통당하는 사람과 스스로 고통을 함께하는 ‘자비’를 실천하라고 가르쳤다.
그는 최후의 심판에서도 정결하냐, 거룩하냐, 교리적으로 올바르냐, 제도나 규례를 성실히 따랐느냐, 하는 외부적인 표준과 상관없이 사람들이 ”주릴 때 먹을 것 주고, 목말랐을 때 마실 것 주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헐벗었을 때 입을 것 주고,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고,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주는 등 사람들에게 얼마나 자비를 베풀고 섬겼는지가 판단의 기준이 된다고 하였다. 이런 사랑과 자비와 동정의 가르침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예수도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다”고 하였다.
(메시아 고난의 길)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에 대한 반대가 일기 시작했다. 예수는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말했다. 베드로가 메시아인 예수가 고난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예수는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했다. 그 이유는 자기를 잊어버리는 ‘하느님의 일’ 대신에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예루살렘 여행과 죽음)
예수는 제자들과 여자들을 데리고 유월절 절기에 예루살렘으로 길을 떠났다. 예루살렘에는 디아스포라 각지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분주했다. 모두 이 절기에 메시아가 나타나지 않을까 기대감으로 부풀었다. 그중에는 예수를 메시아로 영접하는 사람도 많았다. 목요일 저녁, 제자들과 어느 집 다락방에서 이른바 ‘최후의 만찬’을 가졌다.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고,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주면서 그의 살과 피를 받으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를 기억하라고 하였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성만찬’ 혹은 ‘성찬’을 하는 이유이다.
만찬이 끝나고 모두 갈람산 겟세마네 동산으로 갔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이르고, ‘돌 던질 만큼’ 거리에 가서 홀로 기도했다. 얼마 후 유다의 안내를 받은 ‘큰 무리가 칼과 몽둥이를’ 가지고 나타나 예수를 잡아갔다. 유대 대제사장 가야바의 심문을 받고, 결국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 끌려갔다.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질문했다. 빌라도는 명절 관례에 따라 예수를 풀어주려고 했지만, 유대인들이 반대하고 오히려 민란을 꾸미다가 잡혀 온 바라바를 대신 방면하라고 요청했다. 결국, 유대인들이 원하는 대로 사형 선고를 받고, 다음날 금요일 아침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 십자가 형틀에 달려 죽임을 당했다. 십자가에서 한 말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엘로이 엘로이 레마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그가 정치범이었다는 뜻이다. 당시 로마인은 유대인 사이에 저항이 잦아 한시도 그들에 대해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특히 갈릴리는 무력 봉기로 로마를 물리치려는 열심당의 본거지라서 민란이 잦아 경계 대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갈릴리 사람 예수가 입성하여 백성을 선동하여 소요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그를 처형했다고 보는 것이 역사적 순리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들은 그 당시 그리스도인이 지닌 유대인에 대한 반감을 반영해서, 예수가 죽은 것이 전적으로 유대인 때문이요, 로마인은 단지 유대인 등살 때문에 할 수 없이 사형을 집행했을 뿐이므로 전혀 책임이 없는 것처럼, 기술했다. 복음서의 이런 기술 방식은 지난 2천 년 동안 그리스도인이 유대인을 미워하고 박해한 근거를 제공한 셈이다.
(부활과 승천)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가 죽고 3일 만에 정식으로 장사 지내려고 무덤에 가보니 무덤을 막은 돌이 옆으로 비켜져 있고 무덤은 비어 있었다. 사복음서가 부활 사건에 대하여 각각 다른 이야기를 하므로 정확한 정황을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예수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했다는 ‘확신’이 절망 중이었던 제자들과 그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용기와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결정적 요소가 되었다. 부활한 예수가 어떻게 되었는지 복음서에 분명한 언급은 없고, ‘사도행전’에 보면 부활 후 40일 만에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려 졌다고 한다.
초대교회의 시작
(예루살렘 교회)
선지자 요엘이 말세에 많은 사람이 성령을 받으리라 예언한 대로 자기들이 성령을 받은 것이라며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소개한 다음, 예수가 바로 “주와 그리스도”임을 전했다. 이 일로 하루에 3천 명이 침례를 받고 제자로 합류했다. 이들은 사유재산을 처분하고 ‘각 사람의 능력보다는, 필요에 따라“ 나누어 썼다. 원시 신앙 공동체가 성립된 것이다. 제자들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고치는 등 ’기사와 표적‘을 많이 행하면서 공동체 구성원의 수는 점점 커졌다.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 교회였다. 이때의 지도자로 단연 두각을 드러낸 사람은 베드로와 예수의 형제 야고보였다. 야고보는 예수 생전에는 예수와 상관없이 살다가 예수의 부활 후 제자가 된 사람이다.
(바울)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의 수가 많아지면서 유대인의 반대와 박해도 커졌다. 이때 그리스도인 박해에 앞장선 사람은 유대인 출신 ’사울‘이었다. 그는 예루살렘 예수쟁이 박멸 운동에 전념하다가 어느 날, 하늘에서 빛이 내려 눈을 뜨지 못했다. 그때, 그리스도인에게 안수를 받아 눈도 고치고 침례도 받았다. 그는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다니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과 ’그리스도‘임을 전했다. 이 경험으로 옛 사울은 죽고 새 사람 ’바울‘이 되었다. 바울은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열성적인 전도와 신학 사상으로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분파적인 성격에서 벗어나 어엿한 보편 종교로 발전했다. 그리스도교의 창시자가 ’예수냐 바울이냐‘하는 질문까지 할 정도였다. 물론 예수는 유대인으로 나고 유대인으로 죽었다. 생전에 ’그리스도교‘나 ’그리스도인‘ 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다. 30년간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던 바울은 네로 황제가 그리스도인을 박해할 때인 60년경에 로마에 갔었는데, 65년경 거기서 처형되었다.
(신약성서의 성립)
초기 그리스도인은 예수가 곧 재림하리라고 믿었으므로 그의 행적을 기록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기억하는 사람이 점점 사라지고, 더구나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 멸망 당하면서 예루살렘 교회도 없어졌으므로, 누군가 예수의 행적을 기록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모아 처음으로 나온 것이 ’마가복음‘이다. 20년 후인 90년경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나왔다. 얼마 후 100년을 전후해서 ’요한복음‘이 기록되었다.
교회의 박해와 발전
(로마교회의 등장과 발전)
70년 예루살렘 멸망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없어진 다음, 로마 제국 내의 큰 도시인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로마 등의 교회가 중요한 교회로 등장하였다. 그중에 로마교회 주교가 가장 강력한 지도자로 부상하여 교황이 되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으로 급속히 퍼지면서 그만큼 박해도 커졌다. 64년 네로 황제 때의 박해를 비롯하여 95년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등 박해의 물결이 휩쓸었으나, 그리스도인의 수는 커져만 갔다.
(그리스도교 공인)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리스도인이던 어머니와 부인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교에 호감을 가졌다. 313년 밀라노 칙령을 공표하고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를 신봉할 자유를 허락했다. 그 자신은 죽을 때 가서야 그리스도인으로 세례를 받았다.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 그리스도교는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로 선언되었다.
(니케아 공의회)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25년 그리스도교 지도자를 니케아에 모이게 하고, 그리스도교 분파 중에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대해 상충하는 이론이 많아, 이를 통일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삼으려는 문제를 해결토록 했다. 이것이 ’니케아 공의회‘이다.
알렉산드리아 출신 아리우스가 이끄는 파는 예수가 피조된 존재로서 진정으로 인간도 아니고, 신도 아닌 그 중간 제3의 존재라고 보았다. 이 파가 득세하는 것 같았으나, 젊은 신학자 아타나시우스가 나타나 ’예수는 독생자로 태어났지,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아버지와 아들은 ’동일한 존재‘라고 주장했다. 결국,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정죄 되고 아타나시우스파의 이론을 그리스도교 정통 교리로 받아들였다.
이때 만들어진 기본 신조가 몇 번의 수정을 거쳐 381년 교회의 공식 입장인 ’니케아 신조‘로 공표되었다. 그 후에도 여러 번 예수에 대한 교리를 확정하기 위한 공의회가 열렸는데, 451년 소아시아 칼케돈 회의에서 예수는 ’진정으로 신이시며 진정으로 인간‘이라는 이른바 양성론을 포함한 공식교리를 다시 확정했다.
(아우구스티누스)
2세기~4세기에 그리스도교 옹호론자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중에 가장 위대한 사상가는 아우구스티누스였다. 그는 마지막 30년 동안 수없이 많은 글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학의 기둥을 세웠다. 그의 책 ’신의 도성‘에서는 역사를 신의 도성과 세상 도성의 투쟁사로 보고, 인간은 거기서 훈련을 받으므로 역사에 의미가 있다는 주장을 통해 서양 사상사에서 최초의 ’역사 철학‘이 된 셈이다. 그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은혜와 사랑에 힘입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중세교회
(교회의 분리)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갈등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도 시대부터 교회 내에는 교리, 정치, 감정적으로 언제나 대립이 생기고 파당이 생겼다. 여러 가지 이유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우선 정치적으로는 동방에 있는 교회가 서방 로마 교황의 절대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교리적으로는 ’필리오케 교리‘(성령이 아버지로부터 나온다는 구절에 대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도 나왔다는 이론)를 서방교회가 받아들인, 반면 동방교회는 이를 반대했다, 가장 직접적으로는 서방교회에서 일으킨 십자군이 이슬람교인으로부터 성지를 회복하겠다는 명목으로 원정 가는 도중 콘스탄티노플에 이르렀을 때, 동방교회의 권위를 무시하고 온갖 행패를 부린 사건이다.
결국, 1054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서로가, 서로를 파문하는 일로 영영 갈라서게 되었다. 동방교회는 ’동방정교회‘ 혹은 ’그리스정교회‘라고 하고, 서방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라 하였다. 동방교회는 지금의 이스탄불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본부를 1453년 이슬람교 침공으로 인해 모스크바로 옮겼고, 서방교회는 로마에 본부를 두었다.
이 둘의 다른 점 몇몇을 들어보면, 동방정교회는 성직자에게 일률적으로 독신 생활을 의무화하지 않는다. 그리고 조각상을 허용하지 않는다. 세례가 아니라 침례를 준다. 성찬식에 빵만 주는 게 아니라 포도주를 함께 준다. 교황의 권위나 교황의 무오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중세의 교황권)
5세기 로마 제국이 망하고 서방 유럽은 여러 봉건 국가로 갈라졌다. 이런 와중에 유럽을 통합할 수 있는 유일한 안정 세력은 교회였다. 8세기부터는 봉건 제왕이 교황의 재가를 얻어야 왕이 될 수 있는 정도였다. 9세기에는 정식으로 권위의 위계를 설정해서 세상 위에 교회, 교회 위에 교황이라는 자리매김을 분명히 했다. 교황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옹립하거나 폐위시킬 수도 있었다. 봉건 제왕은 그의 발에 입을 맞추었다.
(스콜라 신학과 신비주의 사상)
교황이 절대권을 가지면서 권력 남용, 부패 등 부작용이 발생했다. 한때는 본부를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기고, 교황이 둘이 되는 일까지 생겼다. 그런 중에도 교회는 신학적으로나 영적으로 매우 활발하였다. 12세기~13세기에 유럽 전역에 대학이 생기고 각 대학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이 신학이었다. 이때 활동하던 신학자를 스콜라 신학자라 한다. 그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토마스 아퀴나스‘였다.
아퀴나스는 신의 존재를 이론적으로 증명하려 했다. 18세기 칸트에 의해 ’순수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신을 이렇게 이성의 한계 내에 놓고 증명할 수 없다고 반박된 이후 이런 논증을 절대적인 논증이라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종교개혁
이런 신학적 노력이나 신비주의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일반 상태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보는 사람이 많아졌다. 특히 15세기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성서를 직접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나 성서에 나오는 초대교회와 당시의 로마 가톨릭교회를 비교하면서 불만이 더욱 커졌다.
(마르틴 루터)
이들과 달리 ’적절한 시간, 적절한 장소‘에 나타나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이 바로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성서를 가르치던 젊은 신학자 마르틴 루터였다. 그는 교회에서 하는 일 중 옳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95개 조항을 적어 비텐베르크 교회에 걸었다. 그는 면죄부로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로마서‘에 쓴 것처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됨‘을 강조했다. 루터는 교회 안에 있던 권위와 위계질서를 무너뜨렸다는 의미에서 ’현대성‘의 문을 연 셈이다.
루터가 1529년 스파이어 회의 판결에 저항했으므로 그의 개혁 운동을 프로테스탄트(저항자) 운동이라 불렀다. 루터는 신부가 결혼할 것을 권장하고 자신도 결혼했다.
(장칼뱅)
루터 이후에도 개혁자는 계속 나왔다. 프랑스인 장칼뱅은 파리대학에서 고전학을 공부하고 26세에 신학을 공부하여 칼뱅주의 교단에서 성서 다음으로 중요한 책 ’그리스도교 강요‘라는 책을 펴냈다. 그는 이 책에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로마교회에 의해 타락되기 전 상태로 고치려 한다고 했다. 장칼벵은 스위스로 가서, 목회했는데 그가 죽은 이후 그의 가르침을 찾아 스위스로 왔던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영국 등 유럽 각지로 흩어져 칼뱅의 가르침에 따른 교회를 설립했다.
(영국교회)
영국에서의 개혁은 주로 정치적인 이유에서다. 영국 왕 헨리 8세가 왕비와의 사이에 아들이 없어 왕비와 이혼하고 새 왕비를 맞으려 교황에게 이혼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교황이 이를 거절했고, 이 때문에 ’믿음의 수호자‘라고 칭함을 받던 영국 왕이지만 교황의 거절과 상관없이 새 왕비를 맞아들인 다음 로마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1534년 스스로 ’영국교회‘의 수장이 되었다. 한국에서의 ’성공회‘가 영국교회다.
(재세례파)
다른 종교개혁이 철저하지 못했으므로 자기들만은 ’뿌리‘까지 개혁한다고 주장하여 ’근본 개혁자‘라 한다. 이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릴 때 세례를 받은 사람은 성인이 되어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대부분 북아메리카로 이민 갔다. 거기서 집단 거주지를 이루어 살며 아직도 마차를 이용하는 등 옛날 생활 방식 그대로 지키며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기타)
직접적인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은 건 아니지만, 그 이후에 생긴 종파들을 살펴보면,
청교도 영국 여왕의 종교 박해로 여러 곳으로 나가 살던 영국인들이 1558년 엘리자베스 여왕 즉위와 함께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칼벵파의 영향을 받아 영국교회에 남아 있던 가톨릭적 요소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예배의식을 간소화하고, 교회도 ’장로제‘로 바꾸려 했다. 교회를 ’청결히‘ 하려 한다고 해서 ’청교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들 중 더러는 영국교회에 남고 일부는 분리되어 분리주의자가 되어 네덜란드로 이주해 거기서 회중교회와 침례교회가 되었다.
교회에 남아 있던 청교도들은 청교도 혁명을 일으키는 등 우여곡절 끝에 1640년 정권을 잡은 다음 영국을 청교도 국가로 바꾸고, 교회를 청결하기 위해 엄격한 행동 강령을 강제했다. 그 후 1660년 찰스 2세가 왕위에 올라 영국교회를 회복시키고, 청교도를 영국교회로부터 추방했다.
침례교 청교도 혁명 전에 네덜란드로 간 분리주의 청교도 중 일부는 재세레파 메노나이트교인들의 영향을 받고 성서에는 영아 세례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여, 스스로 성서대로 물에 잠기는 ’침례‘를 받고 교인 전원에게 모두 그런 침례를 주었다. 이들은 1612년경 영국으로 돌아와 침례교회를 설립했다. 1639년에 미국 로드아일랜드 침례교회를 설립하면서 미국 각처로 퍼졌다. 현재 미국 남 침례교회는 미국 개신교 파 중 가장 크다.
회중교 네덜랃드로 갔던 분리주의 청교도 중 일부가 교회에는 감독이나 장로 등 특별한 머리가 필요 없고, 그리스도와 하나 된 모든 회중이 다 참여하여 의사를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 중 일부는 영국으로 돌아가고, 다른 일부가 1612년 메이플라호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간 ’순례자‘로서 이들이 세운 교회가 회중 교회다. 이들은 약 200년 동안 미국 동북부 지방에서 실질적인 국교의 역할을 했다.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해 하버드 대학, 예일 대학 등을 세우기도 했다.
퀘이커 이들의 공식 명칭은 ’종교 친우회‘로서 영국의 ’조지 폭스‘에 의해 시작된 종교단체다. 이들은 교회 형식이나 십일조 등을 반대하고, 종교란, 교리를 받아들이거나 설교를 듣는 행위가 아니고 ’내면적 빛‘으로 밝아지는 체험을 하는 것 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노예제도 반대, 평화운동 등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한국에서도 초기 함석헌 선생을 중심으로 모이던 모임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감리교 영국교회(성공회) 신부의 다섯째 아들이었던 ’요한 웨슬리‘는 옥스퍼드 대학 재학 시절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와 함께 ’신성클럽‘이라는 작은 모임을 만들고 일정한 방법을 통해 하느님의 임하심을 직접 체험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들은 ’회심‘을 통하여 사물을 보는 안목과 삶 자체가 바뀌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다. 1735년 요한 웨슬리는 미국 조지아로 전도 여행을 떠나는 도중 배 위에서 모라비아 형제단 사람들을 만나 회심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웨슬리는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와 회심의 경험을 주위 사람들에 전파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는 영국교회를 떠날 마음이 없었으나, 그의 열성적인 전도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하나의 교파로 독립했다. 그가 죽을 때, 그를 따르는 이가 영국에서만 7만이나 되었고, 미국에서는 급격히 성장했다. 감리교는 미국에서 침례교회 다음으로 큰 교단으로 발전하였다.
안식일교 지금까지의 여러 종파는 유럽에서 생겨났는데, 안식일교, 여호와의 증인교, 모르몬교는 모두 미국에서 생겨난 미국산 교회다. 세 교파의 공통점은 모두 종말관에 기초한 점이다. 세 교회 모두 문자 주의를 고수하고, 물에 잠기는 침례를 주장한다.
19세기 초 미국 동북부 지방에선 예수가 곧 재림한다고 믿고 가르치는 ’재림운동‘이 활발했다. 그 대표자가 침례교 평신도 ’윌리엄 밀러‘였다. 그는 여러 번 예수 재림을 예언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고 떠났지만, 끝까지 남은 사람들이 모여 제7일 안식일예수재림교’를 세웠다. 한국에도 들어와 위생병원, 삼육대학, 시조사 등을 운영하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교 창시자 ‘러셀’은 윌리엄 밀러의 재림운동에 영향을 받았으나 그는 안식일 교회에 가담하지 않고 자기대로 성서를 해석하여 1914년에 예수가 재림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이미 시작된 하늘나라가 아직 완성이 안 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완성되는 해를 여러 번 지정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아무튼, 그날이 오면 악의 세력들은 완전히 소멸되고, 여호와의 증인들이 증언하는 진리를 받은 사람들만 새로 회복된 지상 낙원에서 살게 된다. 이들은 ‘파수대’라는 책자를 들고 집집마다 방문하여 전도한다.
모르몬교 모르몬교의 정식 명칭은 ‘말일성도 예수그리스도의 교회’로서 미국에서 생긴 교파 중에 교인 수가 가장 많다. 창시자는 ‘조셉 스미스’이다. 그는 뉴욕에서 어느 교회에 다닐까 고민하다가 1822년 어느 날 계시를 받았는데, 아무 교회에도 가지 말고, 하느님의 말씀이 적힌 금판(金版)을 보라고 했다. 1년이 지나 뉴욕 맨체스터에서 땅에 묻힌 금판을 캐내어, 거기 적힌 ‘개정된 이집트 상형문자’를 우림과 두밈 이라는 두 보석의 힘을 빌려 판독했는데, 그것이 바로 ‘모르몬경’이다. 그 금판은 천사가 회수해 가버려 지금은 볼 길이 없다.
스미스는 하느님의 나라가 곧 미국에 임한다고 선포하고 추종자를 얻었지만, 박해 때문에 피해 다니다가 일리노이주에서 분노한 폭도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스미스가 죽고 교회는 둘로 갈라졌는데, 그중 큰 쪽이 제2 지도자 ‘브리검 영’의 인도 아래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모르몬교는 일부다처제였지만 1890년 법에, 의해 이를 포기했다. 이들은 모르몬의 침례를 받은 사람들만 미국에 세워질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 또한, 죽은 조상도 침례를 받을 수 있으므로 조상이 누구인지를 알아내기 위하여 세계에서 가장 잘 된 족보 도서관을 가지고 있다. 특별히 성직자는 없고 모든 남자가 제사장 역할을 한다.
가톨릭의 개혁
프로테스탄트교회가 개혁을 부르짖으며 가톨릭교회에서 분리해 나가 새로 교회를 세우는 동안 가톨릭교회 내에서도 이에 대처하려는 움직임이 생겼다. 이를 ‘반종교개혁’이라 한다. 종교개혁자들이 대부분 성례(聖禮)를 성만찬과 세례 두 가지로 간소화 한데, 반하여 가톨릭에서는 일곱 가지 세례를 공식화하였다.
이때 가톨릭교회에서 생긴 또 한기지 반응은 스페인 출신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에 의해 설립된 ‘예수회’의 출현이다. 로욜라는 1540년 교황으로부터 예수회 설립을 허가받았다. 예수회는 특히 학문 연구와 선교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여러 나라에 선교사로 가서 교육에 열중한다. 중국에 선교사로 갔던 그 유명한 마테오 리치도 예수회 회원이었고, 현재 서울에 있는 서강대학교도 예수회에서 세운 교육 기관이다.
가톨릭교회는 그 외에도 1854년 마리아가 동정녀였을 뿐 아니라 원죄의 흔적이 없이 태어났다는 것을 주장하는 ‘무구수태설’, 1869년에 열린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이 교리와 윤리 문제를 공식적으로 공언할 경우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교황무오설’, 1950년 마리아가 죽어서 영혼만이 아니라 육체를 가지고 승천했다는 ‘육체승천설’을 공식화했다.
1958년 교황 요한 23세가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하고 프로테스탄트교회나 동방교회와 어긋나는 방향으로만 가는 가톨릭교회를 화해와 공존의 방향으로 돌리는 혁명을 단행했다. 주요 내용으로는, 가톨릭이 아닌 그리스도인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유대인이 예수의 죽음에 책임이 없다는 것,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 금서목록을 철폐한다는 것, 힌두교와 불교 등 세계 여러 종교와도 대화와 관계를, 가지자는 것 등을 공식적으로 채택했다. 가톨릭 역사상 가장 큰 변화였다.
근래의 그리스도교
(근본주의)
18세기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천문학, 생물학, 역사학, 문헌 비판학, 철학 등의 학문이 발달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비판적으로 보려는 시각이 늘어났다. 이에 위기를 느낀 미국의 그리스도인 중 일부는 1910년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에 입각한 ‘성서무오설’, ‘동정녀 탄생설’, ‘대속설’, ‘육체 부활설’, ‘재림설’ 등은 무슨 일이 있어도 양보할 수 없이 지켜야 할 근본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근본주의’라 한다. 최근 근본주의자들은 낙태, 여성 목사 안수를 위시한 여권 신장, 동성애, 안락사, 뉴에이지 등이 성서의 가르침에 위배 된다고 주장하며 이를 반대하는 등 사회,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
(에큐메니컬 운동)
20세기 들어오면서 교회들이 분파가 갈라지는 것을 본 많은 그리스도인은 교회 일치 운동을 전개한다. 교회 일치는 하나로 뭉친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양성 속의 일치’를 주장하면서 하나로 뭉쳐 세상에 더욱 효과적으로 봉사하자는 의도였다. 이런 움직임을 ‘에큐메니컬 운동’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여기에 가입하기를 반대하는 교회끼리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를 결성하였다.
(새로운 신학적 흐름)
20세기 중반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새롭게 해석하고 적용하려는 신학적 노력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독일의 ’루돌프 볼트만‘은 성서를 ’비 신화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교 신학이 강자의 논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에, 대한 반성의 결과로 힘없고 소외된 사람을 위한 신학이 생겨났다. 대표적인 것은 1960년 ’제임스콘‘의 흑인의 눈으로 성서를 해석하려는 ’흑인 신학‘ ’구티에레즈‘에 의해 주도된 ’올바른 교리‘ 보다는 ’올바른 실천‘을 강조한 ’해방 신학‘ ’메리 데일리‘나 ’로즈메리 루더‘ 등에 의해 여성이 완전한 인격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창된 ’여성 신학‘ 등이 있다. 한국에서도 서남동, 안병무 등에 의해 한국인의 한을 푸는데, 이바지할 수 있는 ’민중 신학‘이 나왔다.
그리스도교의 오늘
서양에서 그리스도교인의 숫자는 점점 줄어든다. 미국도 유럽보다는 형편이 나은 편이지만 줄어들기는 마찬가지다. 특히 목사나 신부나 수녀가 되려는 지원자가 급속히 줄어들고 있기도 하다. 반면에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는 그리스도교인의 숫자가 늘어나는 추세다. 전통적으로 이슬람교인이 주종을 차지하던 아프리카에 이제는 그리스도교인의 숫자가 더 많다. 한국은 그리스도교 선교의 기적을 이룬 나라이다, 지금 미국 주요 신학교는 한국 학생이 없으면 운영이 곤란할 지경이라 하니 격세지감이다. 이제는 숫자로 보아 그리스도교를 ’서양 종교‘라 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교인의 숫자가 줄어든다고 하여 그리스도교를 떠난 사람들 모두가 종교와 무관하게 살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의 관심과 종교적 필요가 기존의 제도적 종교에서는 충족될 수 없음을 발견한 많은 사람이 다른 곳을 찾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이 원하는 것은 ’영성‘이지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자기들은 ’영적‘이긴 하지만 ’종교적‘이지 않다고 한다.
이제 서양은 동서양 종교 사상이 공존하는 곳이 되었다. 즉, 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서양인들에게 선택의 폭이 넓어진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교의 전통 가르침을 더욱 철저하게 강조해야 한다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새로운 시대의 패러다임 전환을 통해 새로운 그리스도교로 거듭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는 이들도 있다.
-감상-
그리스도교의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큰 수확이다. 막연하게 예수교라고 알고 있던 그리스도교를 이해함으로써 서양의 역사, 철학, 종교에 대한 전반적인 부분을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솔직히 예수의 출현과 신격화된 내용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를 믿는 종교인 입장에서 이해되어야 할 부분이다.
초기 서방교회가 로마에서 뿌리를 내려 가톨릭교회가 되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 분파로 나누어지는 일이 생겨 교회의 종류가 많아졌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리스도교가 예수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하느님의 구원을 받는다는 설득이 논리적이지 못하니까 이견이 분분하게 되고, 그에 따라 여러 교회가 생기게 된 것이 아닐까. 이 문제는 현재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이 서양에서 급격히 줄어든다는 현실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근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책에서는 침례교, 감리교 등이 생기게 된 배경을 나열하고 설명했는데, 우리나라에서 유독 많이 믿는 장로교회가 생긴 배경을 다루지 않아서 아쉽다.
가톨릭교회가 지나치게 의례적이고 보수적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도 내부적으로 다른 주장이 많았지만, 교황 요한 23세 때, 혁신적으로 개혁했던 점은, 가톨릭교회가 세상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변화하기 위한 포석임을 잘 대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인이 줄어든다는 점은 21세기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방향을 잡아야 할지 고민이다.
그렇지만 가톨릭교회보다는 비교적 의례가 간편하고 보편성이 많이 확보된 장로교회나 감리교회, 침례교회 등에서도 신도가 준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의 의례가 복잡하고 지나치게 교리를 엄하게 적용하여 생긴 문제는 아닌 것 같다. 현대인들은 특정 형식에 매여 있기를 강요하는 종교적 의식보다는 실리적으로 자신의 영적 체험을 원하는 추세다. 이런 점에서 교회도 기본적인 논리의 수정이 불가피한 시점이 도래하지 않았을까. 실증적인 영적 체험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깨달음을 강조하는 불교와 엇비슷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 교회가 강력한 종교적 힘으로 끌고 왔던 경험을 내려놓고 스스로 영적인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방향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2,000년의 역사를 가진 그리스도교가 깊이 고민해야 할 시점은 분명히 도래했다. 실리적인 현대인들의 마음을 잘 녹여낼 수 있는 실증적인 방법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영적인 체험을 원한다는 것은 종교를 떠났다는 것은 아니다. 믿음에 대한 종교적인 접근 방법을 다르게 요구할 뿐이다.
[이슬람교]
’이슬람‘은 ’복종‘이라는 뜻이고, ’무슬림‘은 ’복종하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이슬람교는 현재 약 16억 명의 신도를 가진 종교로서 세계 큰 종교 중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고 있는 종교이다. 이슬람은 중동의 아랍 여러 나라에서 신봉하는 종교로 알려졌지만, 실은 이란, 아프리카, 파키스탄, 인도,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필리핀, 중국, 러시아 등에서도 중요한 종교다.
창시자 무함마드의 삶
(출생과 결혼)
무함마드는 570년 아라비아 메카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여종 하갈 사이에서 난 이스마엘이 메카에 와서 살게 되었는데, 그 이스마엘이 바로 무함마드가 속한, 족의 선조였다고 한다. 무함마드가 25세 되던 해 ’하디자‘라는 15’살 연상의 과부와 결혼했는데, 둘 사이에 아들 둘과 딸 넷이 있었다. 그의 딸 ‘파티마’에게서 하산과 후세인 두 외손자를 얻었다.
(종교체험)
610년 무함마드가 40세 되던 해, 라마단 달 어느 밤 동굴에서 잠들었다가 “읽으라, 하느님께서 계시한 것을!”이라는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왔는데, “그대는 하느님의 사자(使者)로다”라는 소리가 들렸다. 이 종교체험은 ‘꾸란’ 96장에 ‘능력과 영광의 밤’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도와 박해)
무함마드는 자기가 받은 계시에 따라 하느님이 한 분뿐이라는 것, 심판이 임박했다는 것, 평등, 박애 등 윤리적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 등을 가르치고, 우상 숭배나 영아 살해를 금하라고 외쳤다. 사람들이 이를 조롱했었는데, 그 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조롱은 적개심으로 바뀌고 적개심은 박해로 변했다. 박해가 심해지자 무함마드는 다른 도시로 피신했다.
(메디나로의 피신)
메카로부터 북쪽으로 400km 떨어진 한 도시 부족들 사이에 분쟁이 생겼는데, 무함마드가 이를 조정했다. 그들은 무함마드가 메시아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초청했다. 622년 9월 24일 무함마드는 박해를 피해 그리로 옮겨갔다. ‘메디나’라고 부른 그 도시를 ‘예언의 도시’라 불렀다. 무함마드가 죽은 후 이렇게 피신한 서력 622년을 이슬람력의 원년으로 삼았다.
메디나에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이 많았는데, 그들은 무함마드의 종교를 새롭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메디나에서 그들은 처음으로 ‘기도하는 집’ 모스크를 짓고, 매주 금요일 함께 모여 기도하고, 개인적으로는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는 제도를 수립했다. 처음에는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다가 유대인과의 관계가 악화, 되면서 메카를 향해 기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슬람 전통에서 예루살렘은 메카, 메디나와 함께 3대 성지로 꼽힌다.
무함마드는 종교적으로만이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크게 성공했다. 자기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공동체나 대상을 주로 공격하여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이런 군사적인 성공이 신의 뜻에 의한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고, 종교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나라를 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메카에서 피신하여 메디나로 이주한 지 10년 되는 630년에 메카를 점령하고, 아라비아 전역에 걸쳐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는 실질적 지도자가 되었다.
(메카의 점령)
메카를 점령하고 제일 먼저 ‘카바’라는 성전을 찾았다. 메카의 경계를 정하는 경계비를 세우고 그 경계 안에서는 모든 이슬람교인이 마음 놓고 순례 여행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모든 아랍인에게 이전까지 혈연에 따른 공동체에 충성하였지만, 이제부터는 믿음의 공동체인 ‘움마’에 충성하라고 촉구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632년 무함마드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메카를 향해 순례의 길을 떠났다. 거기에서 무함마드는 무슬림의 결속을 강조하며, “여러분,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고 명심하도록 하오. 그대들은 알지니, 무슬림 개개인은 다른 무슬림의 형제이며, 따라서 모든 무슬림은 형제지간이오” 메디나로 돌아와 3개월 고생하다가 632년 6월 62세의 나이로 죽었다.
꾸란
(‘꾸란’의 형성)
이슬람의 경전은 ‘읽다’ ‘읊다’의 뜻을 가진 ‘꾸란’이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무함마드에게 온 하느님의 계시를 그대로 읊은 것이라는, 데서 나온 말이다. ‘꾸란’은 비신앙인의 눈으로 보면 기적이나 다름없다. 이것은 아랍 문학의 모델이 되어 아랍어를 배우는데 가장 좋은 책으로 읽히기도 한다. 이슬람교인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듣는 것도 ‘꾸란’ 구절이고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듣는 것도 ‘꾸란’이다.
‘꾸란’은 114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6,000절로 된 전체 길이는 그리스도교 신약성서의 약 5분의 4정도 된다. 꾸란은 무함마드가 죽고 20년 동안 제2대, 제3대 지도자를 거쳐 완성되었다. ‘꾸란’은 하느님의 직접적인 계시라, 믿으므로 이것이 가지는 권위는 세계, 어느 다른 경전보다 크다. ‘꾸란’은 하느님이 직접 들려주신 말씀이므로 아랍어 말고 다른 말로 번역해도 안 된다고 한다. 이슬람교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도 본래는 완전한 계시로서의 성서를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불완전하고 부패 되었다고 본다.
(꾸란의 가르침)
이슬람교인은 ‘꾸란’에 이 마지막 시대 사람들에게 필요한 하느님의 교훈이 모두 담겨 있다고 믿는다. 거기에는 하느님과 그의 통치에 관한 신학적 가르침, 성지 순례와 단식 등 의식에 대한 지시, 결혼, 간통, 살인 등과 같은 민, 형사 문제 해결에 관한 지침, 기타 예의나 윤리적인 교훈이 들어 있다.
한 분 하느님 무함마드 이전 아라비아에서는 여러 신을 섬겼다. ‘꾸란’은 하느님이 한 분뿐이라는 유일신 사상을 강조했다. ‘알라’는 아랍어로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예언자 하느님은 역사를 통해 그때그때 필요한 예언자를 보내셨는데, 지금까지 12만 4,000명이라고 한다. 이 중에 직접 이름을 거론한 예언자는 무함마드를 포함하여 28명이다. 아담, 노아, 아브라함, 이스마엘, 이삭, 모세, 다윗, 솔로몬, 엘리야, 요나, 사가랴, 침례 요한, 예수 등이다. 이 중에서 중요한 다섯 명은 무함마드,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예언자는 무함마드로서 ‘말세를 위한 예언자’ 혹은 ‘예언자들의 인(印)’으로서 이후에는 다른 예언자도 다른 계시도 있을 수 없다.
최후의 심판 모든 사람은 죽으면 부활하게 되는데, 부활하게 된 사람은 하느님 앞에 나가 심판을 받는다. 이런 종말관은 조로아스터교나 유대교, 그리스도교와 비슷하다. ‘꾸란’에서도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인정한다. 단 예수가 신성을 가진다거나 신이라고는 인정하지 않는다.
다섯가지 기둥
모든 이슬람교인은 의무적으로 다섯 기둥을 준수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이슬람은 교리 중심의 종교라기보다는 실천 중심의 종교라 할 수 있다.
고백 ‘하느님 외에는 신이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의 예언자’라는 것을 고백하고 증언하는 것이다.
기도 하루에 새벽, 정오, 오후, 일몰, 밤 – 이렇게 다섯 번씩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기 전에는 반드시 정결례를 치르는데, 입과 콧구멍을 씻는 등 세수를 하고, 팔꿈치까지 손을 씻고, 젖은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고, 발목까지 발을 씻는다. 물이 없을, 경우 모래로라도 씻어야 한다. 신발을 벗고 깔개를 깔고 메카를 향해 기도한다.
헌금 ‘자가트’라는 말은 ‘정결하게 하다’ 혹은 ‘증가 시키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헌금을 해야 하는 이유는 사람의 욕심이나 소유에 대한 집착을 깨끗하게 씻어 주고, 헌금한 사람에게 물질의 증가를 가져 주기 때문이다, 모든 성인인 1년 이상 계속해서 가진 재산의 2.5%를 구제금으로 바친다.
단식 ‘라마단’ 한 달 동안 낮시간에 단식한다. 무함마드가 고행하다가 신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달을 기념하는 것이다. 낮시간에는 먹는 것, 마시는 것, 성행위 등을 완전히 금한다. 밤이 되면 단식에서 풀려난다. 병자나 여행자,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 어린아이는 단식에서 제외된다.
순례 모든 이슬람교인은 일생에 적어도 한 번 메카로 순례를 해야 한다. 메카는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이 한 분 하느님을 위해 성전을 짓고 예배하는 곳이다. 아브라함의 순례를 본받아 모두가 이곳으로 순례하는 것이다. 순례 중에는 성행위를 하거나 머리나 손톱을 깎아도 안 된다.
이슬람 교파에 따라서는 지하드를 여섯째 기둥이라 여기기도 한다. 지하드는 ‘성전(聖戰)’을 의미하지만, 성전이 꼭 총칼을 들고 싸우는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나 하느님의 일을 위하는 것이면 지하드이다. 최근에 와서 이슬람 국가나 종교가 위협을 받을 때 이를 방어하는 일 등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힘쓰는 것이 지하드의 주된 일처럼 되었지만, 사는 곳에 모스크를 짓는 일, 멀리 떠나서 전도하는 일 등 광범한 종교 활동도 지하드이다. 이슬람교인은 알코올, 돼지고기, 노름을 금하고 있다.
이슬람교의 확산
무함마드가 아라비아반도를 통일하여 이슬람교 세력이 확대되는 전기를 맞는다. 그가 죽은 후 이슬람은 곧 아라비아 경계를 넘어, 635년 다마스커스 함락, 636년 페르시아 함락, 637년 예루살렘 점령, 641년 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를 접수하는 등 이슬람 제국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확대되어 갔다. 제3대 칼리프가 들어오고도 이슬람 제국은 계속 팽창하여 711년 스페인 점령 후 7세기 동안 다스렸다. 13세기 몽골 군대가 이슬람을 제압할 때까지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몽골의 지배자들도 스스로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결국, 이슬람 제국은 확장되었다. 이슬람 세력은 1453년 비잔틴 제국의 본거지였던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하여 그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꾸고 그 제국이 차지하던 땅 대부분과 러시아, 파키스탄, 인도, 중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까지 퍼졌다.
이슬람의 인도 진출은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지게 한 중요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이슬람 상인은 당나라 때 중국 서안에도 많았는데, 이슬람을 ‘회교’라고 하고 무슬림을 ‘회민’이라 했으며, 한반도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이슬람이 이렇게 급격하게 팽창한 이유는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점령하고 이슬람교로 강제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첫째, 이슬람은 인간을 차별하지 않았다는 점. 둘째, 복잡한 이론이나 교리나 예식 같은 것 없이 단순 명료하고 실천적 종교인 점. 셋째 비잔틴 제국이 부패하고 억압적이어서 사람들은 이슬람 군대를 침략자로 보기보다는 해방자로 보는 경향이 많았다는 것 등이다.
이슬람 분파
무함마드가 죽으면서 후계자를 정해놓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의 친구였던 ‘아부 바르크’가 2년 동안 후계자를 대신했다. 그는 죽기 전에 ‘우마르’를 제2대 후계자로 지목하였고, 우마르는 10년 동안 여러 나라를 점령하는 등 세 확장에 힘썼다. 우마르는 죽기 전에 여섯 명의 위원을 지명하여 그중에서 후계자를 선출하라고 명했다. 이 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치열한 내분이 생기고, 이때 이후 이슬람 역사는 파벌 간 암투의 연속이었다.
무함마드의 심복 겸 사위였던 ‘우스만’과 그의 사촌 겸 사위였던 ‘알리’ 사이에 경쟁이 치열했다. 우스만이 다음 후계자가 되어 12년간 통치하고 암살당했다. 그다음 알 리가 제4대 후계자로 나왔지만, 역시 암살되었다. 이때 이후 우스만을 지지하는 파와 알리를 따르는 파가 영원히 갈라서게 되었다.
(순니파)
‘순니파’란 ‘전승주의파’라는 뜻이다. 전 세계 이슬람교인의 85% 정도가 이 파에 속한다. 이 파는 제1대 후계자 ‘아부 바르크’부터 정식으로 인정하고, 종교적, 율법적 권위를 ‘꾸란’과 ‘전승’에서 찾는다.
(시아파)
‘시아파’란 ‘분리파’란 뜻이다. 세계 이슬람교인의 10~15%를 차지한다. 이들은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를 따르던 사람들이다. 656년 알 리가 암살당한 후, 지도자 다리는 우마이야 가문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알리의 아들 후세인이 이에 도전했지만 실패하고 모두 죽임을 당했다. 시아파는 알 리가 죽은 후 칼리파(후계자)는 끊어지고, ‘이맘’을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로 여긴다. 현재 이란은 시아파를 공식 종교로 받아들인 나라이고, 이라크 인구의 3분의 2 정도가 시아파이다. 이들은 사우디아라비아, 인도, 파키스탄, 아프리카 등에 흩어져 있다.
(수피)
‘수피파’는 완전히 독립된 종파로 볼 수는 없지만, 이들은 염색하지 않는 ‘수피(양털 옷을 입은자)’를 입고 다녀서 ‘수피파’로 불린다. 이슬람 세계에서 그 수는 미약하지만, 이들은 율법주의적, 형식주의적 이슬람에 반대하고 신비 체험을 강조하는 신비주의자이다. 수피파는 ‘하느님 안으로의 몰입’ 체험을 강조한다. 이들은 진리가 말이나 이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몰입되는 체험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수피들 중에서 한 집단은 이런 체험을 갖기 위한방법으로 한자리에서 서서 빙글빙글 도는 회전무를 추기도 하는데, 이들을 ‘춤추는 수도사’라고 한다.
이슬람의 오늘
근세에 와서 이슬람은 과거 찬란했던 권력과 문화에도 불구하고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 원인으로 몽골인이 이슬람 지배 세력으로 떠오르면서 무슬림 학자를 죽이고 도서관을 불태우는 등 과거 500년 동안 쌓은 이슬람 전통을 말살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이슬람교 자체가 탄력을 잃고 침체, 내지 고착화했기 때문이라 분석하기도 한다.
아무튼,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이슬람 국가들이 유럽의 지배 밑으로 들어가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던 영국이 중동에 대한 영향력을 지속하기 위한 수단으로 중동 한가운데에 이스라엘을 독립 국가로 인정해 버린 점도 간과할 수는 없다.
그러다가 1970년대 석유가 경제적으로 중요한 자원으로 등장하자, 산유국이 모여 OPEC를 형성하고, 한편 옛날 서양 식민지로 있던 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 40여 개가 대거 독립국이 되면서 이슬람 세력이 일약 세계무대에서 새로운 힘으로 부상했다.
이슬람 국가들이 석유를 수출해서 번 돈으로 서양문물을 대거 받아들이면서, 이에 반대하고 전통을 보존하고 사수한다는 이슬람 근본주의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79년 이슬람 시아파 근본주의자 호메이니가 정권을 잡은 것이다. 호메이니는 서방 세계나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들과 결탁하는 사우디아라비아 등 다른 이슬람 국가도 사탄의 세력이라고 주장하고 근본주의에 입각한 폭력적 혁명 이념을 다른 이슬람 국가에도 영향을 미쳤다.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한 탈레반 군사정권도 이슬람 근본주의 입장에 서서 서방 국가의 영향을 받은 법률을 전부 폐기하고 순니파 이슬람의 전통적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법으로 삼았다. 2001년 9월 11일 뉴욕 무역센터와 워싱턴 국방성 건물에 대한 공격으로 수많은 인명 피해를 준 사건은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에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엄격히 말하면 타협이나 공존을 거부하고 자기만 진리와 정의를 독점하고 있다고 믿는 독선적 이슬람 근본주의자와 그리스도교 및 유대교 근본주의자 사이의 대결과 충돌이라 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근본주의의 충돌’인 것이다.
9.11 사태 이후 세계 각지에서 이슬람을 제대로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이슬람교인이 모두 근본주의자는 아니라는 것과 9.11이 이슬람 종교 자체 때문에, 생긴 사건이 아니라는 인식이 보편화 되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이슬람교와 다른 종교와의 대화를 확대시키는 좋은 계기가 되었으며, 세계종교 분쟁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세 종교 –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하고 ‘아브라함 적 종교’라 불리고, 다 같이 ‘하느님’을 섬기는 유일신교인 이슬람교, 유대교, 그리스도교가 서로를 좀 더 이해하고 협력한다면 세계평화에 크게 기여하게 될 것이다.
-감상-
이슬람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안정되게 정착한 상태에서 발생 된 종교이므로, 그들의 틈새를 비집고 생존해야 하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었다. 이를 극복하고 전도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들은 초기부터 무력을 사용했다. 무력으로 급속도로 이슬람교를 확대하는데, 성공했던 경험은 그들로, 하여금 무력 사용의 보편성과 당위성을 합리화하였다. 그 결과 오늘날에도 이슬람교인들은 무력 사용을 두려워하지 않고 종교 분쟁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 아닐까.
무력 사용을 좋아했던 그들이 몽골을 침략하여 이슬람교 교세를 확장하였으나, 근세에 와서 오히려 그들이 몽골에 의해 지배되는 상황이 연출되어 역으로 차별당하고 교세가 쪼그라드는 현상이 발생했다니 역사적 아이러니다.
유일신을 세 종교가 받든다는 자체가 모순이다. 각 종교는 각자의 신을 모셔야 하는데, 하느님의 신을 서로 자신의 신이라고 믿는 이상, 분쟁을 피하기란 쉽지 않겠다. 세계 종교사에서 이 문제는 미래에도 쉽게 해법을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종교 본연의 가치를 훼손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자고로 종교는 인류의 평화와 철학적 가치를 보편화하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는데 그 목표가 있을진대, 싸움의 불씨를 제거할 수 없는 환경이니, 종교가 인간에게 꼭 필요한 수단인지 자문하게 된다.
[바하이교]
바이하교는 시아파의 신아에 근거해서 생겼지만, 지금은 세계종교의 하나로 인정받는다. 시아파는 열두 번째 이맘(지도자)이 9세기에 사라졌지만, 그가 언젠가는 다시 와서 세상을 구원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1844년 시아파 알리 무함마드가 스스로 열두 번째 이맘이라고 주장하고 종교적, 사회적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한 채 1850년 공개 처형되었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의 뒤를 이어 세상에 보편적 종교를 수립할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1863년 제자 중 후세인 알리가 스스로 예언된 이맘이라고 선포하고, 이름을 ‘바하올라’라고 했다. 그가 기다리던 이맘이라고 믿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을 ‘바하이’라 한다.
바하이교는 세계 모든 종교는 한 근원에서 생겨났다는 것, 모든 종교 가르침에는 근본적으로 일치하는 면이 있다는 것, 모든 종교 예언자들은 한 하느님으로부터 단편적인 계시를 받았다는 것, 유대교에서 메시아 오심을 기다리고, 그리스도교에서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고, 불교에서 미륵불의 출현을 기다리는데, 바하올라가 이 시대를 위한 마지막 예언자로 나타났다는 것, 종교와 과학에는 모순이 없다는 것, 성별이나 인종에 차별이 없다는 것, 누구에게나 의무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는 것, 섬김의 정신으로 하는 일은 예배와 같다는 것, 영원하고 보편적인 평화를 수립하는 것이, 인류 최고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 등을 가르친다.
시아파가 압도적인 이란에서는 무함마드 이후 예언자가 나타났다고 주장하는 이 종교를 용납할 수 없었다. 1979년 호메이니 정권이 들어서면서 박해가 더욱 심해져 많은 사람이 순교했다, 현재 600만 정도의 신도가 230여 국가에 퍼져 있다.
[동학]
한국에서 생긴 종교로는 동학(천도교), 증산교, 원불교, 통일교, 대종교 등이 있는데, 이들 중 가장 먼저 생겼을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한국의 대표적 민족 종교라 할 수 있는 동학에 대하여 살펴본다.
동학의 역사
(창시자 최수운)
동학의 창시자는 수운 최제우(1824년~1864년)이다. 어릴 때 이름은 복술이었고, 어른이 되어 제선 이었지만 뜻을 세우고 제우로 고쳤다. ‘제우’란 어리석은 세상 사람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수운은 지금의 경주 부근 월성군에서 아들이 없던 60세의 양반 아버지와 과부 한 씨 사이에서 태어나 10세에 어머니를, 17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는 청년 시절을 어렵게 보내고, 30세쯤,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가 당면한 인류 문명의 총체적 붕괴에 기인한다고 믿고, ‘나라를 살리고 백성을 편안하게’하며, 나아가 ‘인간을 두루 구할’ 수 있는 길을 찾아 구도의 길을 나섰다.
수운은 전통 종교인 유불선은 그 기운을 다했고, 서학인 가톨릭도 그 공격성이나 흑백 논리로 보아 세상을 구할 수 있는 도가 못 된다고 확신하고, 붕괴되는 선천 문화를 개벽할 수 있는 새로운 도를 찾으려 했던, 것이다.
1860년 4월 37세 되던 해,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한다. ‘갑자기 마음이 차고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한 음성을 듣게 되었다. “두려워 말고 저어하지 말라. 세상 사람이 나를 상제라 이르나니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너를 세간에 내어 사람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나니 의심치 말고 의심 말라’고 했다.
득도 다음 해 6월 포교를 시작했다. 그의 득도에 대한 소문이 퍼져 찾아오는 사람이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이 다 같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므로 인간은 모두 동등하다고 가르쳤다. 양반, 상인의 계급과 서열이 엄격하던 그 시기에 이런 가르침은 혁명적이었다. 많은 사람이 호응하자 양반층과 관으로부터 ‘혹세무민’하는 가르침이라는 비난과 박해를 받았다.
전라도 남원 등지에 피신하여 살다가 결국 1863년 11월 경주 용담정에서 제자 20명과 함께 체포되고, 이듬해 3월 10일 대구에서 41세의 나이로 참수형에 처해졌다. 득도한 지 4년 만의 일이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그의 글을 모아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라는 제목의 책을 엮었다.
(최수운의 계승자들)
수운이 죽고 해월 최시형(1827년~1898년)이 제2대 교조가 되어 순교하기까지 35년 동안 동학이 이 땅에 뿌리내리도록 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그는 수운이 남긴 가르침을 사상적으로 더욱 분명하게 정리하고 의식을 제도화하는 등 교단으로서의 기틀을 확립하는 데 공헌했다, 급속도로 확장된 교세는 1894년 ‘동학혁명’으로 나타났다. 동학혁명으로 많은 신도가 희생되고 교세도 허약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최시형이 72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당하고, 그 뒤를 이은 이가 의암 손병희였다.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하고 교단을 근대화하는 데 성공했다. 동학 내에서도 파벌은 있었지만, 일제 강점기를 통해 ‘개벽’ ‘신여성’ ‘어린이’ 등 잡지 출판 및 문화 활동으로 여성 운동, 어린이 운동, 농민 운동, 항일 운동에 크게 공헌했다.
동학사상
(신관)
동학사상은 한국에서 역사적으로 내려오던 유불선 전통뿐 아니라, 민간에 퍼져 있던 무속신앙 및 새로이 전래 된 그리스도교를 통합한 면이 강하다. 동학의 가르침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곧 한울님“이라는 ‘인내천‘ 사상과, ”사람을 한울님 섬기듯 섬기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가르침이다. 동학의 신관은 신의 초월을 강조하는 유신론도 아니고, 신의 내재만을 강조하는 범신론(汎神論)도 아니고, 초월과 내재를 동시에 인정하는 범재신론(汎在神論)에 가깝다.
(인간관)
모든 인간은 한울님의 신령한 본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인종, 성별, 계급 등과 상관없이 모두 평등하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 한울님 섬기듯 해야 한다. 자기 속에 내재 한 신성을 자각하고 인간으로서 할 일을, 다하는 완전한 인격의 사람을 동학에서는 ’한울사람‘ ’지상신선‘ ’성인‘이라 한다. 결국, 동학은 신과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관계를 강조하는 가르침이다.
(개벽과 이상적 사회)
동학에서는 우리가 사는 지금 세상을 ’선천(先天)‘ 세상이라 하고, 새로 올 세상을 ’후천(後天)‘세상이라 한다. 이것의 가르침은 지금까지의 낡은 세계 질서는 붕괴되고, 새로운 세계 질서가 창조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선천의 역사는 투쟁과 갈등과 투쟁으로 점철된 상극의 역사였지만, 이런 상극의 역사를 공존과 조화의 역사, 곧 상생의 역사로 바꾸는 것이 ’개벽‘이다. 개벽은 삼경(三敬), 곧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이라는 윤리적 실천 덕목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의례
동학에서는 오관(五款)이라 하여, 마치 이슬람에 다섯 기둥이 있듯, 다섯 가지 신도로서 실천해약 할 사항을 제시한다.
주문 가장 많이 외우는 주문은 ’삼칠주‘ 혹은 ’21자 주문‘이 있다.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주主 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
청수 날마다 저녁 9시에 가족이 모여 맑은 물을 떠 놓고, 가정의 평화와 보은 감사를 위해, 평화가 멀리 퍼지기를 기원하며, 21자 주문을 105회 외우고, 물을 나누어 마신다.
시일 일요일마다 모든 신도가 함께 모여 ’내 마음이 네 마음‘임과, ’모두 하나 됨‘을 확인하고 실천하는 의식을 치른다.
성미 아침, 저녁으로 밥 지을 때, 식구별로 한 술씩 떠서 모았다가 바친다.
기도 시시때때로 한울님께 정성껏 마음을 고하는 심고(心告) 시일, 저녁 9시에 드리는 시일 기도, 7, 21, 49, 105일 등 기간을 정하고 하는 특별 기도가 있다.
동학의 오늘
동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천도교는 해방 후 교단이 남북으로 갈리면서 남한에 사는 교인을 중심으로 새로운 조직을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천도교의 교세는 그렇게 크지 않으나 동학의 가르침은 세계 종교사에 나타나는 보편적 가치의 결집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일부 학자들은 한국인에게 가장 알맞은 종교로 동학을, 21세기 대안 종교로 동학을 추천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동학에 대한, 연구와 관심이 더욱 깊어지기를 바란다.
-감상-
동학의 가르침은 특별한 신을 따르는 게 아니라, 사람을 존중하고 사람을 따른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이 중심 신관이다. 일반적인 종교의 신관이 무작정 신을 따르라는 가르침에 비하면 상당히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동학은 공격당할 게 없다. 그런 연유로 21세기 대안 종교로 추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종교의 특성상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신에 대한 경외심을 배제할 수는 없다. 동학에 그런 부분이 모자라기 때문에, 세 확장에 실패했을 수도 있다. 인간은 자신이 힘들어 의지하고 싶을 때, 가까이 있는 사람이 조금의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궁극적인 어려움을 구원해 줄 수 있는 능력은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도 모자람이 많은 인간이기 때문에 자신의 고차원적인 어려움을 해결해 주기에는 너무나 뻔하고 얕은 게 사람이다.
동학의 인간존중 사상이나 평등사상은 인간 세계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가르침이다. 그렇지만 종교로서 역할을 하기에는 뭔가 좀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인간은 선사시대부터 돌이나 나무 등에 신성함을 느끼고 도움을 얻고 구원을 받으려는 심리가 존재해 왔다. 그것은 논리나 합리적인 가치로 설득할 이유도 없고, 설득할 필요도 없는, 그냥 그런 것이다. 분명히 종교는 신의 영역을 확보해야만 존재의 가치가 굳건해진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겠다.
[맺으며]
책 한 권을 들고 논문 읽듯이 읽었다. 개인적으로 ’종교‘라는 말을 떠올리면 믿음, 사랑, 구원, 그리고 전쟁이다. 인류를 구원하겠다고 메시아가 나타나고, 미처 나타나지 않았으면 그를 기다리는 종교를 통하여, 수많은 선(善)한 기능이 있었지만, 전쟁으로 인해 구원보다는 인간에 대한 멸시와 인류의 고통을 자초했던 점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하여 세계 각 종교의 근원을 대충이나마 파악할 수 있게 된 점을 자랑으로 생각한다. 수많은 종교가 생기고 다시 사라지는 과정에서 종교 간 다툼이 생기고, ’이단‘이라고 박해했던 점을 상기시켜 본다. 과연 ’이단‘이라는 조건이 성립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반론을 제시하면, 맨 처음 생긴 종교 이외에 ’이단‘ 아닌 종교가 현실적으로 존재 가능할까. 결국, ’이단‘을 규정하여 박해함으로써 다툼이 생기고 전쟁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유대교가 생기고 난 후, 그리스도교가 생기는 과정에서 유대교를 박해했던 점. 이슬람교가 생겨 기존의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를 피해 뿌리 내리기가 쉽지 않자, 강압과 무력으로 굴복시키고 교세를 확장했던 점 등을 들 수 있다. 어디가 이단이고, 누가 이단인가. 세상에 종교는 얼마든지 생길 수 있고, 사람들이 종교 지도자를 따르는 한 이단은 있을 수 없다. 다만, 나쁜 종교는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세상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는 한, 종교도 그 본질에 대하여 변화해야만 생존 가능할 것이다. 그것을 극도로 반대하는 세력에서도 많은 문제점이 생긴다. 예를 들어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근본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세상 변화에 대한 유연성이 결핍되어 순혈주의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다른 종교에 대한 반감이 극대화되어 2001년 뉴역 무역센터 테러 같은 극단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동아시아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는 불교나 유교, 도교 같은 종교는 별 다툼이 없다. 불교를 제외하면 유교나 도교는 종교적인 색채가 분명하지 않은 점이, 한 몫을 했겠지만, 이들 종교의 특징은 신을 숭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에 반해,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하고, 다 같이 하느님을 섬기는 유일신교인 점이 다툼의 근원적인 불씨가 아니었을까. 문제는 종교 간 이런 다툼이나, 그로 인한 전쟁을 언제까지 묵과할 것인가. 서로 대화하고 타협으로 실마리를 찾으려 노력하지만, 언제든지 불씨는 당겨질 수 있는 상황인 점은 실로 우려스럽다.
자기만의 종교가 절대적 정의라고 고집하고, 타 종교에 대해서는 멸시나 이단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면 종교로 인한 분쟁은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이 종교 간 이해를 돕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 아무튼, 인간이 종교가 없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종교에 귀의해서 영혼을 살찌우고 선한 영향력으로 삶을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면, 타 종교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선량한 마음으로 이해하고 포용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책을 읽으면서 ’독후감‘이라는 명분으로, 독후감을 썼다기보다는 ’요약‘ 했다. 그것은 종교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보다는 책을 요약함으로써 책 내용을 한 번 더 세밀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랐다. 나름 요약하면서 각 종교의 특징과 요점을 잘 기억했다 생각했는데, 막상 마무리할 시점에 이르고 보니, 자꾸 잊어먹게 된다. 개괄적인 종교에 관한 내용에 대해서 궁금증이 생기면 이 요약본으로 해결할 수 있는 아이템을 장착했으니 잊어도 크게 두렵지는 않다.
책을 통하여 유익한 정보를 제공해 주신 저자 ’오강남‘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아울러 긴 요약본 읽어주신 독자들에게도 심심한 감사를 전합니다. 장문이어서 오타가 있을 수 있으며, 사실과 다른 내용이 있을 수 있는 점은 오류라 생각하시고 양해 바랍니다. 늘 안녕하세요.
2025년 6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