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독후감

'테러리스트 김구' 를 읽고

桃溪도계 2024. 9. 21.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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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테러리스트 김구'라는 책을 접하고 잠시 충격을 추스르고 책을 읽었다. 그냥 읽을 수가 없어서 메모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다가 독후감을 형식으로 썼다. 책의 구성은 사실에 근거한 논거를 제시하고, 입증할 수 있는 자료들에 대하여 주석을 달았다.  시공간적 배경을 세밀하게 나열하였으므로, 책에 대한 감상보다는 요약하기에 급급했다. 다만, 그동안 신화처럼 받들던 김구에 대하여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작가는 이 시점에서 김구를 테러리스트라고 규정하면서 많은 고민을 한 흔적이 역력하다. 김구에 대한 진실이 제대로 가려진다면, 우리는 독립운동사와 건국사를 포함한 근현대사를 다시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김구에 대한 진실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이대로 묻힌다면, 우리는 떳떳하지 못한 역사를 품게 될 수도 있다.

 

[지은이] 정안기

[발행일] 2024815

[발행처] 미래사

 

 

테러리스트 김구

 

백범 김구(본명 김창수)는 일제강점기 상하이 임시정부의 총통으로서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명확한 족적을 남긴 사실에 대해서 부정하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구가 남긴 백범일지의 허구성에 대한 논란이 잦아들지 않고, 그의 독립운동 행적의 진위 여부에 대한 다툼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작가는 책머리에서 김구를 테러리즘 없는 테리리스트라고 규정하고 있다. , 김구는 무고한 시민을 대상으로 한 테러를 자행한 일은 없으므로 테러리즘은 아니다. 독립이라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테러를 실행했지만, 결코 애국 충절에 의한 의열 투쟁은 아니라고 단정한다.

 

김구의 테러 활동을 크게 항일테러, 밀정테러, 정적테러로 분류한다. 그의 테러행위에 의해 피살된 사람은 총 81명으로 집계하고 있다. 그중에서 일본인은 3명이며, 78명이 한국인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테러의 목적은 독립운동을 위한 암살이라고 정의하는데, 한계에 봉착한다. 물론 78명의 한국인들 대부분 김구의 주장처럼 밀정이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 김구의 노선에 반대 의견을 낸 젊은 청년들을 밀정으로 취급했다는 논란을 피하기는 쉽지 않다.

 

작가는 김구에 대하여 근거 없는 비방의 목적은 없었다. 다만, 한 때, 존경했던 김구의 행적이 의롭지 못하다는 의심에서 접근하고 연구논문 형식으로 전개했다. 본 저서는 철저하게 사실에 근거하였으며, 기술된 내용에 대해서는 방대한 자료를 찾아내고 탐독하여 그 근거를 제시했다.(613페이지 중, 주석이 185페이지 분량이다)

 

본 저서를 통하여 독자들은 무작정 작가의 의도에 매몰되거나 휘둘리지 말고,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김구의 또 다른 면에서의 관찰에 초점을 두고 읽으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본 독후감은 테러리스트 김구를 통하여 그의 행적을 면밀히 파악하고 이해함으로써, 김구의 우상화에 방점이 찍혀 금기시되었던, 김구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를 또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함이다.

 

연구논문 형식의 창작물의 특징을 잘 살펴서 독자의 감상보다는 작가가 제시한 사실에 대하여, 일단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반론이나 간단한 독자의 의견을 적시하면서 본 독후감을 전개할 것이다.

 

 

 

 

 

[항일테러]

 

(치하포 사건)

갓 스무 살이었던 18963, 김구는 안악군 치하포에서 쓰치다 조스케를 살해했다. 이 사건에 대해 백범일지에서는 본격적인 항일투쟁에 나선 청년 김구가 민비 시해에 대한 복수를 위해 맨주먹으로 일본군 육군 중위를 때려죽인 국모 보수로 알려져 있다.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해서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했다. 동학 팔봉접주를 자처했던 김구는 11월 단발령이 공포되자 안태훈 진사(안중근의 부친)에게 역성혁명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김구는 안진사와 절교하고 동학 참빗 장수 김형진 등과 거사를 모의했다. 그러나 18961월 실행했던 역성혁명 모의 장연 산포수 사건은 실패했다. 이 사건으로 김구는 지명수배당해 피해 다니다가 치하포 한 여점에 머물렀다.

 

그날 간단한 시비로 쓰치다 조스케를 살해하고 시신을 강물에 유기했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던 1,000냥을 갈취하여 800냥은 여점 주인에게 맡기고 25냥을 공모했던 일행들에게 나눠줬다. 75냥으로 나귀 한 필을 사서 자신은 100냥을 들고 현장을 떠났다. 1,000냥의 무게가 450kg 이어서 들고 다닐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그래서 800냥을 여점 주인에게 맡기고 어음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떠났던 100냥의 무게가 45kg이니까 운송수단으로서 나귀가 필요했던 이유라고 작가는 추측한다.

 

수사 및 재판과정의 기록에 의하면 쓰치다 조스케는 김구가 백범일지에서 주장한 것처럼 일본군 중위가 아니라 약을 파는 장사치였다. 테러의 의도는 극적인 공포 효과를 노리는 폭력행위인데, 치하포 사건은 테러라기보다는 단순한 재물 탐심에 의한 살인행위였다고 단정한다. 결론적으로 김구가 자행한 첫 테러는 의거성을 강조하고자 국모 보수를 거론했지만, 거짓말인 것이다. 치하포 사건은 김구가 장연 산포수 사건에 연루되어 도피하는 과정에서 도피자금을 마련하고자 저지른 금전욕에 동기화된 범죄적 폭력사건인 것이다.

 

치하포 사건의 원인이 되었던 장연 산포수 사건은 김구가 을미사변, 단발령 등 일본의 내정간섭이 가중되는 시점에서 산포수들을 규합하여 관아를 습격하는 역모를 계획했다는 점을 볼 때, 치하포 사건은 단순한 금품 갈취를 위한 범죄라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 김구는 동학 팔봉접주로서 나라의 혼란한 질서를 민란을 통하여 바로잡아 보려는 더 큰 꿈을 꾸고 있었던 사실을 부인할 수 없지 않을까. 다만, 치하포 사건에서 잔인하게 살해당한 쓰치다 조스케를 일본군 중위라고 거짓말한 사실과, 갈취한 800냥을 여점 주인에게 맡기고 어음을 받았는데, 동네 못사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했다는 백범일지의 거짓 기술은 김구의 의거성에 대한 신뢰성을 의심하기에 충분한 단초가 되고도 남는다. 또한, 김구의 폭력성은 잔인하고 건달의 본성이 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난봉꾼 데러리스트 이봉창)

193218일 이봉창은 도쿄 사쿠라다몬 외곽에서 육군 관병식을 마치고 환궁하는 쇼와 천황 폭살 테러를 감행했지만 실패했다. 테러의 결과만을 볼 때는 이봉창은 감투 정신이 투철한 독립 운동가이다. 문제는 그의 평소 삶의 방식과 폭살 테러를 감행하게 된 경위에 대하여 살펴보면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그의 어린 시절은 건축업과 운송업을 하는 아버지 덕분에 대체로 유복하게 자랐다. 그러나 아버지 사업이 기울어지던 청소년기부터는 궁핍한 생활을 이어가다가 방황의 시간이 길어졌다. 이봉창은 경성에서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나태하고 방탕한 그의 생활 태도는 진득하게 일할 수 있는 곳이 마땅찮았다. 결국에는 많은 빚을 지고 25세에 일본 오사카로 새로운 직장을 찾아 입성한다. 일본에서도 많은 직업을 전전긍긍했지만 제대로 정착하지 못했다. 근본적으로 그는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하루살이 인생이었다. 도박에 빠져들었을 뿐만 아니라, 몇 번이나 회삿돈을 횡령하여 음주와 매춘을 일삼다가 그의 입지는 좁아졌다.

 

결국, 그는 빚에 조 달리는 현실 도피를 위해 상해로 도항한다. 상해에서 목표로 두었던 회사에 취직 못 하고 하루하루 연명하다가 동료들에게 술기운을 빌어 독립운동한다며 일본 천황을 왜 못 죽입니까따졌던 적이 있었다. 이때, 김구가 옆방에서 듣고 있다가 천황을 처단할 수 있다는 이봉창의 객기에 귀를 기울였다.

 

19313월 백정선(김구의 가명)을 만나게 된다. 김구는 여차저차 일본 상황들을 탐문 하고는 천황 폭살 테러를 구체화하기 위하여 이봉창을 몇 번 더 만났다. 그해 12월 거사를 결정하고 김구는 폭탄 두 발과 자금을 전해준다. 193218일 이봉창은 폭탄테러를 감행했다. 문제는 폭탄의 위력이 워낙 미미해서 수레바퀴 하나가 빠지는 정도의 타격밖에 주지 못했다.

 

곧바로 대역 범으로 체포된 이봉창은 19321010일 교수형에 처형당했다. 이봉창의 심문 과정에서 드러난 그의 진술을 간추려보면, 그가 상해로 넘어오기 전까지는 한 번도 독립운동이나 의거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다. 상해에 온 것도 취직을 위한 도항이었다. 백정선을 만난 것도 자신이 의도했던 일은 아니었다. 다만, 백정선과 몇 차례 면담이 이어지면서 테러를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심문할 때까지도 백정선이 김구인 줄 몰랐다고 자백했다. 심지어 폭발력이 상당하다고 받아 온 폭탄이 폭음탄 수준밖에 안 돼 적잖이 실망했다. 결국, 그는 김구에게 이용당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백범일지에서는 1931년 김구가 임정 재무부장과 민단장을 겸임하고 있을 때, 이봉창이 찾아와 저는 일본에서 노동하다가 독립운동을 하고 싶어 상해에 가 있다기에 상해로 왔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에 김구는 조사가 필요하다고 느껴 그의 행동거지를 살펴봤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민단사무소 직원들과 술자리에서 취기가 돌자 주담을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당신들은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일본 천황을 왜 못 죽입니까?’라는 말을 해서 김구는 유심히 들었다. 저녁 무렵 이봉창이 묵고 있는 여관을 방문해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구는 이봉창이 살신성인의 큰 결심을 품고 임정을 찾아왔음을 확인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백범일지의 이 내용은 이봉창의 진술 내용과 비슷하지만, 이봉창이 상해로 오게 된 동기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작가는 김구가 이봉창을 이용해 일본에 타격을 주려고 테러를 감행한 것은 사실이나, 폭탄의 수준이 폭음탄 수준인 것을 보면 천황을 죽일 의도보다는 천황 폭살 테러의 후폭풍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거나, 난봉꾼 이봉창이 과연 천황 폭살 테러를 감행해서 성공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어 일본에 경각심을 주기 위한 행위였을 것이라고 단정한다. 실제로 이 사건을 계기로 세계적으로 논란이 커지자 미주, 하와이, 멕시코 등 동포들이 김구를 애호하고 신임하는 서신이 눈송이처럼 날아들었고, 그전까지 임시정부를 반대했던 사람들도 이제는 태도를 바꾸어 김구를 격려했고, 민족을 빛내는 사업을 해달라고 금전적 지원도 늘어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독자는 이봉창이 청년기를 지나온 그의 삶의 궤적을 볼 때, 그는 독립운동과는 거리가 먼 건달 생활을 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가 방탕한 생활 속에서 어느 날 개가천선하여 김구를 찾아와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어필했다는 백범일지의 내용은 다소 설득력이 떨어진다. 또한, 일본 천황을 테러의 목표로 삼으면서 위력이 미미한 폭탄을 사용했다는 점은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다.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인데 김구는 어떻게 위력이 저급한 폭탄을 이봉창에게 건넸을까 하는 점은 이해가 불가하다. 한 편으로는 일본 천황을 테러의 표적으로 삼았다는 자체만으로도 테러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상당한 타격을 입힐 수밖에 없는데, 김구가 위력이 약한 폭탄을 일부러 건넸다는 가정에 대해서도 의문은 남는다. 과연 김구는 자신의 입지를 공고화하기 위하여 이봉창을 이용한 것이 사실일까. 이봉창은 죽음으로서 자신의 결기를 증명하고자 맹세했는데, 김구는 이봉창에게 마지막까지 자신을 백정선으로 숨겼다는 사실은 이봉창을 이용하여 큰 대의를 위함이었을까.

 

(한 사랑의 독립전사 윤봉길)

1932429일 상해 홍구 공원에서 거행된 일본군 관병식 겸 천장절 기념식장에서 폭살 테러가 발생했다. 일본군 시가카와 대장 등 2명이 사망하고, 1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테러범은 충남 예산 출신의 25세 청년 윤봉길이었고, 사주 공범은 임정 재무장 겸 한인 애국단장 김구였다.

 

윤봉길은 유년 시절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19193.1 운동에 충격을 받고 자퇴를 했다. 14세 되던 1921년에 근동의 성주록 선생의 문하로 들어가 한학을 공부했다. 1926년 뜻을 세우고 야학을 개설하여 농민들의 정신계몽에 앞장섰다. 그러던 중 192912월 광주학생운동을 계기로 농촌 계몽운동의 한계를 실감하고 학생들에게 항일투쟁을 호소하다가 덕산 주재소에 발견되어 옥고를 치르고는 야학당도 폐쇄했다. 이 충격으로 이듬해인 1930년 부모, 아내, 자식을 두고 혈혈단신 망명길에 올랐다.

 

백범일지에서 밝힌 윤봉길의 폭살 테러 경위를 살펴보자.

어느 날 홍구 시장에서 채소장사를 하던 윤봉길이 김구를 찾아와 큰 뜻을 품고 천신만고 끝에 상해에 왔다며, 김구에게 지도 해줄것을 요청했다. 이에 김구는 얼마간 윤봉길을 지켜보았으며, 학식도 어느 정도 갖춘 젊은 청년에게 믿음이 가서 마음 터놓고 얘기해보니 대장부였다. 마침 김구는 429일 홍구 공원에서 열리는 천황의 천장절 경축식에 일정을 맞춰 거사를 계획하고 사람을 구하던 중이었다. 이에 윤봉길에게 넌지시 마음을 떠보았다. 그러자 윤봉길은 가슴에 한 점 번민이 없어지고 마음이 편안해진다며 준비해 달라고 답했다.

 

김구는 즉시 이봉창 의거 때, 폭탄을 제조했던 왕웅(김홍일)에게 또다시 폭탄제조를 의뢰했다. 이번에는 강남조선소에 선을 닿아 물통과 도시락 폭탄의 성능시험을 했다. 폭탄 두 발 중 한 발은 투척용이고 다른 한 발은 자살용으로 준비했다. 폭탄을 받아든 윤봉길은 사전에 답사하는 등 치밀하게 준비했다. 거사당일, 김구는 점원 김영린에게 편지를 주어 급히 안창호 형에게 보냈다. 편지 내용은 오늘 오전 10시경부터 댁에 계시지 마시오. 무슨 대사건이 발생할 듯합니다.”라는 내용이었다.

 

그날의 거사는 김구 혼자만 알고 있었다. 오후 1시경 폭탄이 터져서 홍구 공원은 혼비백산이었다. 김구는 즉시 안공근 등과 함께 피치목사의 집으로 피신했다. 안창호 등은 일경에게 붙잡혔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임시정부 및 민단 직원들과 부녀단체까지도 꼼짝할 수 없게 되자 김구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김구는 사태를 수습하는 차원에서 510일 사건의 주모는 본인이라고 선언했다.

 

거사를 계기로 중국 측으로부터의 보호와 물질 등 다양한 편의를 제공 받았으며, ‘만보산 사건이후로 악화 일로에 있던 한인들에 대한 중국인들의 감정이 많이 호전되었다. 더불어 임정에 대한 신뢰가 높아졌으며, 해외 한인 교포들의 성원도 넘쳐났다.

 

윤봉길의 테러는 성공한 테러인가.

상해 홍구 공원 천장절은 상해파견군 관병식도 겸해서 거행되었다. 19321월에 발생했던 상해사변에 대하여 일본 측의 자축기념 행사였으므로 15만 이상의 인파가 모인 대규모 행사였다. 상해사변에 대한 국제연맹 중재, 알선에 따라 1932430상해정전협정을 앞두고 천장절이 거행되었다.

 

거사당일 윤봉길은 아침 일찍 기념식장을 찾아 전체적인 레이아웃을 확인하고 일반관람석 우측 앞부분에 자리를 잡았다. 기념식이 거행되어 기미가요를 합창하던 와중에 윤봉길은 물통 폭탄을 투척하였다.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행사장은 아수라장이 되었으며, 윤봉길은 곧바로 몰려든 성난 군중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하고 체포되었다. 결국, 윤봉길은 자살폭탄을 터뜨리지 못했다. 당초 김구는 윤봉길에게 한국인이라 낌새를 차릴 수 있는 물품을 일절 휴대하지 못하게 했으며, 자살용 폭탄은 자신의 얼굴에 투척함으로써 그의 신분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할 계획이었으나 이행하지 못하고 체포된 것이다.

 

김구와 윤봉길의 테러 목적은 폭탄테러를 상해정전협정 파기와 중일전쟁 재발 및 확전의 기폭제로 삼아 장기적으로 일본을 피폐시켜 조선 독립의 기회를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폭살 테러의 당사자를 중국인으로 위장하려 했으나, 윤봉길의 자폭테러 실패로 조선인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결국, 윤봉길의 폭살 테러는 중일전쟁의 재발 및 확전이라는 정치적 목적 달성에 실패했고, 무고한 일본인 군관민 유력자에 대한 무도한 폭살에 그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학계와 사회는 테러의 수단과 목적을 동일시하여 숭고한 의열 투쟁이라고 칭송해왔다. 윤봉길의 폭살 테러는 일본군의 지도자를 살해한다는 1차 목표는 성공했으나, 궁극의 지향점이었던 중일전쟁의 발발 등 정치적 목적 달성에는 실패한 테러였다.

 

안창호 체포의 진상과 둘러싼 의혹에 관하여

당시 안창호는 임정 계열을 제외한 상해 한인사회에서 정신적 지도자였는데, 사건 당일 오후 3시경 어린이날 기념행사 논의를 위하여 이유필의 자택을 방문했다가 잠복해 있던 경찰에 의해 체포된 것이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거사 당일 아침 7시경 윤봉길을 환송하고 그길로 조상섭 상점에 들어가 편지 한 통을 써서 점원 김영린에게 주어 급히 안창호 형에게 보냈다.(...) 나의 편지를 보고도 그날은 아무 일이 없으리라 짐작하고 이유필의 집을 찾아갔던 안창호 선생이 체포된 것은 그의 불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 안창호 체포는 김구 자신과 무관한 안창호 자신을 불찰이라고 강변했다.

 

이 사건을 두고 당대인들의 다양한 증언과 정황을 고려하면 믿을 수 없다는 이론이 분분하다. 안창호는 임시정부 분들하고 사이가 서먹서먹하여 물과 기름과 같이 겉돌았다. 장강일기의 주인공 정정화는 도산은 백범의 테러 투쟁에 대하여 그 효과를 의문시하여 별로 찬성하지 않았던 분으로, 윤의사 거사에 대하여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고 증언했다. 심지어 무력입국론자인 김구가 자신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비폭력 자강 주의자 안창호의 제거와 흥사단 와해에 윤봉길 폭살 테러의 후폭풍을 활용했다고 한다.

 

상해 한인사회에서는 흥사단의 청년들이 주류를 형성했다. 이들은 임정의 존립에 위협적이었다. 그 때문에 김구와 그 일파는 걸핏하면 흥사단 계열 청년들을 일본 앞잡이로 폭행하는 일이 잦았다. 이런 정황들을 볼 때, 안창호의 체포는 김구의 백범일지 주장과는 달리 김구의 의중이 반영되었으리라는 짐작이 그냥 낭설은 아닌 듯하다.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장개석의 이름을 빌려 윤봉길 사건을 독립운동사 영원불멸의 업적이라 분식하고 미화했다. 그러나 백범일지에는 장개석의 이런 발언은 찾아볼 수 없다. 19332월 장개석은 김구와의 최초 면담에서 “100만 원을 제공하면 2년 이내에 일본, 조선, 만주에서 대 폭동을 일으키겠다.”는 김구의 제안에 대해 장개석은 특무공작(테러)으로는 독립할 수 없으며, 진정한 항일 독립을 위해서는 군관양성 등 좀 더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항일 역량의 구축이 불가결하다고 지적했다.

 

중국 정부는 한국독립 지사들의 무분별한 테러 활동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물질적, 재정적 원조를 통해서 김구와 임정의 생활을 돌보는 방식을 취하게 되었다. 장개석 정부가 임정을 후원하게 된 것은 이들의 테러 활동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무분별한 테러 활동을 제어,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이 영향으로 윤봉길 사건 이후 더 이상 제2의 이봉창과 윤봉길이 등장할 수 없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작가는

갈무리에서 윤봉길은 실패한 테러리스트였지만 강의한 사랑의 독립전사로 규정한다. 테러의 수단은 가장 극적인 공포 효과를 노린 폭탄을 사용함으로써 그 피해자는 정치 지도자도 있었지만, 다수의 민간인도 있었다. 당초 테러의 목적이었던 중일전쟁을 발발케 하고 일본을 피폐 시켜 조선 독립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던 계획은 실패였다. 결론적으로 천황을 노린 이봉창의 폭살 테러에 대한 중국사회의 뜨거운 반응을 경험한 김구는 제1차 상해사변을 자신의 정치적 야심에 활용하려 했다. 윤봉길의 강의한 사랑을 절호의 먹잇감으로 삼아 폭살 테러에 동원했고, ‘중국의 국민정부에 팔아넘겨 보기 좋게 시세를 얻었다. 테러의 의도는 거대한 공포의 확산이 아니라 김구와 윤봉길의 서로 다른 의도의 동상이몽이었다.

 

독자는

굳세고 굳센 윤봉길의 독립 의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그는 분명 선각자적인 기질이 있었으며, 가족보다는 애국을 향한 그의 진정성에 공감한다. 그는 대한민국이 독립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강대국들 간 전쟁으로 인한 낙수효과뿐이라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홍구공원 테러는 단순히 일본 정치 지도자들을 제거하는 수준이 아니라, 중일전쟁에 불씨를 당겨 일본이 피폐해지면 독립할 수 있다는 신념을 굳게 가졌다고 생각한다. 반면, 김구의 행적에는 몇 몇 의구심이 남는다. 이봉창과 윤봉길의 테러를 사주한 김구의 의도가 겉으로는 그동안 알려진 대로 투철한 독립의식에서 비롯된 행위였다. 그러나 당시 상해 한인사회에서의 임정과 김구의 신뢰도가 추락하고 있었다는 점과 도산 안창호의 흥사단 세력이 힘을 받고 있었다는 점을 볼 때, 테러행위가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순수한 의도도 있었겠지만, 그 이면에는 철저하게 계산된 개인적인 정치적 야심이 섞였음을 의심하게 된다.

 

[김구는 공식적으로 3명의 일본인을 살해(테러)했다. 치아포에서 일본인 약장수 쓰치다 조스케를 직접 살해했다. 이 사건은 독립운동과 전혀 상관없는 개인적인 금품갈취 사건이어서 김구의 공적으로 내놓기 부끄러운 사건이다. 그렇지만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이 사건을 일본군 중위를 죽였다고 거짓으로 꾸며 자신의 위상을 포장한다.

 

이봉창 사건에서는 폭탄의 수준이 미미해 인명사고가 한 명도 없었다. 왜 폭탄 전문가에게 의뢰한 폭탄의 성능이 폭음탄 수준이었을까 하는 의문은 아직도 풀리지 않는다. 당시 폭탄을 제조했던 왕웅은 폭발력은 약하지만, 중량이 가볍고 불발탄이 없으며 휴대가 간편하다는 이점이 있어서 택했다고 밝혔다. 정황으로 볼 때, 폭탄은 기성품이 아니라 의뢰자의 주문대로 제조된다. 그렇다면 김구는 왜 이런 성능이 미약한 폭탄으로 천황을 노렸을까.

 

윤봉길은 홍구 공원에서 폭탄테러를 감행해 일본 군사령관 시라카와 대장 등 2명이 사망하고, 1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사건에서도 김구의 행적은 아리송하다. 백범일지에서는 도산 안창호에게 피신하라고 서신을 보냈다고 했지만, 정작 안창호는 서신을 받은 사실이 없다는 듯 이유필 자택에 태연하게 들렀다가 체포되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안창호는 상해에서 쫓겨났다. 그런 점에서 김구의 상해에서의 흥사단 위력의 제압 의도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김구는 평생 독립운동을 했지만, 항일테러로 인한 일본인 사망자는 3명에 불과하다. 그의 위상과 명성에 비하면 초라한 성적표다. 또한, 상해 임시정부의 수장으로서 대한민국의 명맥을 이어오느라 갖은 고생을 했지만, 상해 한인사회에서 임정이 신뢰를 받지 못하고 흥사단과 알력이 있었던 것은 그의 리더십이 적잖이 실망스럽다. 결과적으로 당시 상해 한인사회에서 최고의 민족지도자로 추앙받고 있던 도산 안창호를 쫓아낸 것은 그의 의도된 정적의 축출이었을까 하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다.]

 

 

 

[밀정테러]

 

(사회주의 항일혁명가 김립)

19193.1운동 이후에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이 연대해서 상해 임정을 조직했다. 하지만 수뇌부는 국무총리 이동휘의 사회주의와 대통령 이승만의 민족주의 세력 간의 대립과 갈등이 있었다. 고려공산당 상해파의 수장 이동휘 계열은 급진적 무장투쟁 노선과 의원내각제를 주장하였으며, 실력양성 노선의 안창호 계열, 외교독립 노선의 이승만 계열과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외교독립 노선으로는 조선 독립이 곤란하다며 사회주의혁명을 주장하던 이동휘 계열은, 19205월 이승만 대통령이 현순을 워싱턴 주재원으로 발령하자 대통령 불신임 운동을 일으키며 사직서를 내고 임정탈퇴를 선언했다. 이때, 김립이 이동휘에게 임정탈퇴 일시 유보와 국무총리직 유지를 권고했다. 당시 김립은 소비에트 정부로부터 200만 루블의 자금 획득을 추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립은 1880년 함북 명천 출신으로 본명은 김익용이다. 유년시절에는 한학을 수학했고, 상경해서는 보성전문 법학과와 정치학을 전공했다. 1910년 보성전문학교 졸업 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연해주와 북간도를 무대로 본격적인 민족운동을 개시했다. 1915년 이동휘와 함께 독립군 장교를 양성하는 대전학교를 설립했지만, 독일군 장교를 영입했다는 이유로 독일의 정탐혐의를 받고 러시아 당국에 체포되어 석방되기도 했다. 이후 19184월 이동휘와 함께 한인사회당을 결성해서 활동하다가 일본군의 하바롭스크 점령을 피해 도피하여 은신했다. 19199월 김립은 블라디보스토크를 근거지로 하는 항일운동을 포기하고 임정 국무총리로 선임된 이동휘와 함께 상해로 이주하여 이동휘를 보좌하는 국무원 비서장에 임명되었다.

 

1920년 김립은 한형권과 박진순을 모스크바로 보냈다. 그들은 레닌을 만나 소비에트 정부의 임정 승인, 한국독립군 지원 및 사관학교 설치 지원 등의 명목으로 200만 루블 지원을 약속받았다. 모스크바 자금은 전액 금괴로 지급되었다. 왜냐하면 제 1차 세계대전 및 러시아혁명의 충격에 따른 루블화의 급격한 인플레이션으로 가치가 폭락하고 국제 결제 시스템이 붕괴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금괴의 운반을 할 수 있는 방안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1차로 60만 루블에 해당하는 금괴만 인수하기로 확정하였으나, 그나마도 운반상의 문제로 40만 루블(금괴 약 330kg, 현재 가치로 한화 510억원)만 인수했다.

 

한형권과 박진순이 수령해 온 40만 루블의 금괴를 인수하기 위하여 김립이 시베리아로 밀파되었다. 김립은 인수한 금괴를 한형권과 한인사회당 비밀연락원 이태준의 활동비 지급, 환전에 따른 환차손, 한인사회당 박애, 계봉우의 활동비 지급 등으로 소모하고 상해까지 운반한 자금 총액은 31만 루블이었다. 1차분 60만 루블 가운데 나머지 20만 루블은 192111월에 독일을 경유하여 상해로 운반했다.

 

자금을 수령한 시점에서 김립이 사직하고 이동휘도 19211월 국무총리직을 사임했다. 이들은 외교독립 노선을 추구하는 이승만 계열과 힘겨루기를 하기 보다는 국제정치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소비에트 혁명정부와 연대해서 무장독립을 추구하겠다는 야심이었다. 이후 김립이 모스크바 자금을 활용하여 추진한 정치공작은 1)극동공산당동맹 결성 2)고려공산당 창당 3) 동아공산당 연맹을 결성하는데 소비하였다. 이외에도 임시정부 재정, 중국공산당, 일본사회주의자, 만주 무력단체 군비, 조선 국내 운동비 등에 나누어 썼다고 한형권이 증언했다.

 

1921년 초, 상해 한인사회에서는 모스크바 자금을 둘러싼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상해 의 자금 경색은 일상생활이 곤란할 정도였다. 상해 한인사회는 김립의 자금을 탈취하려고 쫓고 쫓기는 가운데 유언비어가 난무하였다. 급기야 임정은 19221월 이동휘와 김립을 성토하는 포격문 제 1호를 발표했다. 포격문의 내용은 김립은 이동휘와 결탁해서 국금을 횡령하고 공산이란 미명하에 간악한 음모를 꾸미고 있으니 극형에 처할 만하다.”

 

이로부터 15일이 지난 210일 김립은 고려공산당 소속 김철수 등과 상해 갑북 철로 변을 걷다가 청체불명의 청년 2명에게 13발의 총격을 받고 즉사했다.

 

백범일지에서 김구는 김립 암살사건과 관련해서 레닌이 제공한 자금 200만 루블은 임정 앞으로 제공된 독립운동 자금인데, 김립은 이를 횡령해서 북간도에 토지를 매입하고 첩을 들이는 등 탕진했다. 이에 오면직과 노종균이 임정 자금을 횡령한 파렴치범 김립을 단죄했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제 1차분 40만 루블의 지출권은 누구에게 있었을까. 먼저 얀손보고서를 살펴보자. 김립 암살사건으로 모스크바 자금을 둘러싼 분규가 격화되자 공여 자금의 관리권을 가진 코민테른이 야코프 얀손으로 하여금 특별감사관으로 지명했다. 얀손은 19225월부터 자금을 수령한 사람들의 진술을 다각도로 확보하여 그해 8[얀손보고서]가 작성되었다. 얀손보고서에 의하면 19209월 당시 40만 루블의 수령자는 임정 대표 한형권이 아니라 한인사회당 대표 박진순이었다. 코민테른 제 2차 대회에 출석한 한인사회당 대표이자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 박진순 앞으로 모스크바 자금의 인출권과 지출권이 주어졌다. 이 사실은 러시아 외무인민원부의 공문서 가운데 외무차관 카라한이 작성한 전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얀손보고서는 모스크바 자금에 대한 사적 유용과 횡령은 없었다고 소명했다.

 

그동안 김립은 임정 공금을 횡령한 파렴치범으로 그의 피살은 정당한 응징으로 인식되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임정의 공금을 횡령하고 유용한 파렴치범으로 김립의 죄악을 단정했으나, 구체적인 진상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그렇다면 오면직과 노종균은 김구와 어떤 관계이며 왜 김립을 암살했을까. 두 청년은 1894년 황해도 안악 출신으로 동갑내기 단짝이었다. 이들은 김구가 19033년간 교사로 재직했던 안악 양산학교를 거쳐 평양 대성중학을 중퇴하고 조선일보 등에 안악지국 기자로 활동했다. 당시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상해 임정에서 파견된 홍완기를 지원하다가 일본 수사의 표적이 되어 상해로 망명하여 옛 스승 김구와 만났다.

 

이들은 1921, 당시 임정의 경무국장이던 김구와 만난 자리에서 그놈을 처치해서 징계해야 할 터인데 기회도 사람도 마땅찮아서 이럭저럭 오늘까지 끌어오는 중인바, 그대들이 왔으니 어떻게 그놈을 처치해 줄 수 없느냐고 상의했으며, 이들도 스승의 말에 쾌히 승낙했다. 19221, 이들은 김구로부터 김립은 러시아로부터 입수한 40만 루블의 임시정부 운영자금을 갈취하여 부도덕한 용도에 소비한 자이므로 임시정부의 강화를 위하여 동인을 살해하라는 명령과 함께 사진, 주소, 권총을 받았다. 그리고 210일 갑북 보통로 인근에서 김립을 발견하고 미행하다가 총격을 가해 살해했다. 이후 이들은 김구의 알선으로 사천성으로 피신했다. 요컨대 김구는 자기 제자들을 김립 암살에 동원해 살인자로 만들었다. 당시 임정 경무국장 김구야말로 김립 암살사건의 진범인 것이다.

 

소비에트는 혁명정부를 지지하는 정치세력의 확장과 공산주의 세계화를 위한 선전 활동, 그리고 사회주의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하는 용도로 자금을 박진순에게 지급했으며, 감사결과 자금 유용도 없었다고 얀손보고서는 분명히 밝혔다. 그렇다면 김구는 김립을 왜 암살했을까.

 

김구는 모스크바 자금이 사회주의 민족해방을 위해 한인사회당과 고려공산당 앞으로 제공된 혁명자금임을 알았다. 그런데도 김립을 암살한 동기에는 다른 설명이 필요하다. 김립은 국제정치세력의 강대국으로 부상한 소비에트 혁명정부와 연대하는 한편, 모스크바 거금을 활용해 임정을 개조하고 더 실질적인 독립운동에 나설 것을 구상했다. 그런데 임정은 19194월 이래 체제와 노선을 두고 내분에 휩싸였다. 당시 김구는 임정의 유지, 옹호를 주장하는 임정 고수파의 행동대장 이었다. 그런데 모스크바 거금을 이용해 반 임정 세력을 결집시키고 국제공산주의와 연대하여 세를 불려 나가는 행태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작가는

김구가 김립에 대하여 공금횡령과 탕진 운운은 김립 암살을 정당화하기 위한 기만에 찬 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임정과 자신을 동일시했던 김구의 입장에서 김립은 임정의 분열과 파괴를 획책하는 광의의 밀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김립 암살테러는 정치적 신념을 결여한 범죄적 폭력이었다. 임정 고수파 김구의 입장에서는 김립이 공금을 횡령해서가 아니라 거금을 동원한 임정의 분열과 파괴를 저지하는 한 편, 반 임정주의자들에게 죽음의 공포를 전시하려는 의도였다고 일갈한다.

 

독자는

본 도서를 통하여 김립이라는 인물을 처음으로 접한다. 그는 적극적인 항일운동을 하였으며, 새로운 독립 노선을 개발하기 위하여 볼세비키 정부와의 혁명 외교를 기획하고 실행한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동아시아 최초로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당했고, 모스크바 자금을 활용해 고려공산당을 창당하고 서기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독립운동사에 김립은 그동안 빛을 보지 못했다. 아마 김구의 패륜아 취급에 따라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은폐된 때문이 아닐까. 한때 임정에 참여하여 국무원 비서장을 지내기도 했는데, 임정 경무국장 김구는 동지인 김립을 왜 암살했을까. 먼 이국땅 상해에서 독립이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활동하는 사람들끼리 암살테러를 자행한다는 것은 리더십에 문제가 있다고 봐야한다. 아무리 좋은 일에도 의견이 일치할 수는 없다. 그런데 김구는 자기의 노선에 거슬리거나 반대하는 자는 제거해버리는 독재적인 심리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김구 입장에서는 임정의 밀사로 파견해서 소비에트 자금을 인수해왔으면 당연히 임정 자금으로 소비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얀손보고서에 의하여 자금의 성격이 분명하게 규명되었으니 자금의 지출권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시비가 되지 않는다. 다만, 김립이 그 자금으로 임정의 분열을 획책하고 또 다른 세력을 확장하게 되면 김구의 입지가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만들어진 밀정, 옥관빈)

193381일 오후 10시경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서 조선인 중년 남성이 2발의 총격을 받고 사망하는 암살테러가 발생했다. 피살자는 상해 한인 거상이자 국민당 상해시 대의원 옥관빈(43)이었고, 암살범은 남화한인청년연맹 소속의 오면직과 엄형순이었다. 이들에게 암살을 청부한 배후는 한인애국단장 김구였다. 이들이 내세운 옥관빈 암살의 명목은 일제의 밀정 처단이었다.

 

옥관빈 암살을 실행한 인물은 정화암(본명 정현섭)이다 그는 1986년 전북 김제 출생으로 1920년 상해로 망명해 무정부주의자로 변신했다. 19314월 이회영을 중심으로 오면직 등과 함께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했다. 남화연맹은 모든 권력과 사적 소유를 부정하고 경제적 평등사회 구현을 내걸었다. 이들은 직접 행동론으로 실천하고자 흑색공포단을 결성하고 19335월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 암살미수 사건을 시작으로 8월 옥관빈, 12월 옥성빈, 19353월 이용노, 11월 이태서 암살을 자행했다. 이들은 생계형 테러단체로서 청부살인을 행한 것이다.

 

옥관빈은 18918월 평남 중화군에서 출생했다. 유년시절에는 서당에서 수학했고, 이후 평양에서 소학교와 숭실학교와 대성학교를 거쳐 보성전문학교에서 법률학을 전공했다. 1909년 윤치호 최남선 등과함께 청년학우회를 창립하여 활동했다. 1911년 안악사건으로 복역하다가 사면을 받은 적이 있다. 그렇지만 191212‘105인 사건으로 피체되어 재차 투옥 당했으며, 재판 결과 4년 징역형 처분을 받았다가 19142월 증거불충분으로 면소 처분을 받았다. 이때, 출옥과정에서 향후 정치운동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전향서를 썼다는 소문이 돌면서 친일 시비에 휘말렸다. 1914년 출옥이후 옥관빈은 상업에 투신하여 일본계 은행에 잠시 몸담았다가 관서재목상회를 설립하여 사업을 확장했다. 19193.1운동 때, 옥관빈은 시위에 참석하지 않았으나 5월경 상해 임정 교통부가 주도한 연통제 사건에 휘말리면서 검속대상이 되어, 9월 모친과 함께 상해로 망명했다.

 

옥관빈은 상해에 도착해서도 지난 날 특별사면 당시 전향서를 썼다는 이유와 일본계 삼화은행 근무 경력이 빌미가 되어 밀정 시비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억울했던 옥관빈은 안창호를 찾아가 호소했다. 안창호도 옥관빈 밀정설을 알고 있었지만, 중상모략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했다. 그는 제자 옥관빈에게 처세를 조언하고 격려했다. 당시 옥관빈의 처지는 곤란했다. 임정과 한인사회로부터는 밀정혐의에 시달렸으며, 일제로부터는 불령선인으로 취급받았다. 그래서 그는 중국귀화를 선택해 주류사회에 진입하고자 몸부림 쳤다. 이후 옥관빈은 임정과의 관계를 끊고 실업가의 길로 들어섰다. 옥관빈은 상리에 밝아 독일인과 합작한 여덕양행, 합명회사 배달공사, 중국인과 미국인 자본가의 공동출자로 무역회사 삼덕양행, 상해고려상업회의서 창설, 한약제약 회사인 불자약창 설립 등 발군의 기업가적 자질을 발휘해 상해의 거상이 되었다. 1920년대 후반 상해 주류사회에 진입해 불교계 및 정관계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상해에서의 옥관빈의 위세는 대단했다. 김구 입장에서는 흥사단과 가깝게 지내며 안창호에게 정기적으로 자금을 후원했던 옥관빈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김구는 그런 옥관빈을 제거할 생각으로 안공근을 통해서 정화암과 만났다. 정화암, 김구, 안공근 3명은 옥관빈 처단에 합의했다. 임정은 윤봉길 폭살테러 이후 중국 장개석 정부의 후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자금은 있었지만 일을 해낼 만한 사람이 없었다. 반면에 정화암 측은 사람은 있으나 자금이 없었다. 그래서 임정의 재력과 남화연맹의 인력이 합작하기로 했다. 정화암은 남화연맹 소속 엄형순과 한인애국단 소속 오면직으로 하여금 옥관빈을 암살했다. 김구는 옥관빈 청부 암살에 1천원을 정화암에게 지급했다.

 

옥성빈은 옥빈관의 4촌 형으로 상해 프랑스 조계 경무국 경찰로 있던 중, 마약 밀매상 김해산의 거처를 방문했다가 괴한의 총에 맞았다. 살인범은 한인애국단 소속 김동우와 남화연맹 소속의 엄순봉이었다. 이들은 정화암을 통해서 김구와 안공근으로부터 암살 청부를 받았다. 옥성빈 역시 옥관빈과 마찬가지로 김구 등 임정계열로부터 밀정 혐의에 시달렸다. 옥성빈 또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른 적이 있다. 1924년 김구에게 폭탄을 제공한 혐의로 체포되어 5년간 수형생활을 마치기도 했다. 193312월 재상해 일본영사관은 옥성빈은 사촌 동생 옥관빈이 81일 김구 일파에게 암살되었다며, 복수를 위해 자신의 프랑스 조계 공무국 형사 지위를 이용해 범인 수사에 분도 하던 중에 암살당했다.”고 지적했다. 193312월 재상해 프랑스 조계 경무국도 모사꾼 안공근을 거론하며, “옥성빈이 중국인 정부와 협의해서 암살당한 사촌 동생에 대한 복수를 노린다는 사실을 알고 안공근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 가능한 한 빨리 적수를 제거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라고 밝혔다. 결국 옥성빈은 옥관빈의 복수혈전을 준비하던 와중에 김구로부터 살인청부를 받은 암살자들에게 피살되었다. 김구가 남화연맹 정화암에게 지급한 청부살인 금액은 앞서 옥관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1천원이었다.

 

옥관빈 암살을 둘러싼 몇 가지 쟁점이 있지만, 조선총독부 기밀 자료 및 이규창의 증언에 의하면 김구가 정화암에게 옥관빈 암살 청부 대금으로 1천원을 지급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옥관빈 암살의 주범이 누구인가를 둘러싸고 김구의 관련성을 부정하고 남화연맹의 독자적 소행이라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남화연맹은 김구가 제공하는 금전적 유인에 이끌린 살인청부업자에 불과했다. 옥관빈 암살의 배후는 한인애국단 단장 김구였다.

 

옥관빈 암살의 결정적 동기는 19324월 윤봉길 폭살테러 이후 한국독립당과 한인교민단을 장악한 흥사단과 임정의 대립, 항쟁이 격화되는 와중에 1932715일 흥사단의 유력자겸 상해고려상업회의소 집행위원장 조상섭에 대한 남화연맹(오면직, 엄형순, 이규창)의 무장강도 사건이었다. 이는 김구의 사주를 받은 남화연맹의 소행으로 흥사단 계열에서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동안 침묵으로 관망해왔던 옥관빈은 1933726~ 27일 김구와 그 일당의 타도를 결심했다. 결국 옥관빈은 임정과 남화연맹에 대한 무시와 경멸이 직접적 암살의 동기라 할 수 있다. 간접적 동기는 김구와 그 일당이 옥관빈의 반격을 예상한 김구파의 선제적 테러공격이었다.

 

작가는

옥관빈은 1919년 상해로 망명한 이후 타고난 기업가적 수완을 발휘해 단기간에 상해 거상으로 성장했고, 중국사회의 유력자로 변신했다. 그럼에도 김구와 임정으로부터 협잡꾼이라는 중상과 모략에 시달렸다. 그때마다 옥관빈은 사업으로 성공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꿈을 키웠지만 밀정이라는 모함을 받고 암살을 당했다. 결국 그는 김구와 임정이 만들어낸 밀정이라고 주장한다. 옥관빈은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라는 임정의 요구를 매몰차게 거절했고, 김구의 폭력지상주의 독립노선에 반대했다. 풍부한 자금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갖춘 옥관빈의 움직임은 김구에게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그래서 김구는 남화연맹과 연대해 선제적 암살테러를 자행했다. 테러의 동기는 정치적 신념이 아니라 잡지 [삼천리]의 지적대로 함원피살이었다. 옥관빈 밀정설은 김구가 만들어 퍼뜨린 황당무계한 비방이었으며, 옥관빈 암살테러는 금전거래가 오가는 전형적인 청부살인이었다.

 

독자는

작가가 주장하는바, 옥관빈은 만들어진 밀정이라는 의견에 일견 동의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옥관빈은 어떤 자료에서도 조선총독부나 일본의 사주를 받은 흔적이 없으며, 임정이나 김구 측에서도 말로만 밀정이라고 했지 밀정이라는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오직 그는 상해에서 사업으로 성공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금전과 영향력을 활용해 상해 임정의 김구 세력에 의한 독재적인 운영에 반대 의견을 피력했으며, 흥사단의 안창호를 도왔던 사실과 증언이 다소 존재한다. 김구의 독립운동 노선과 안창호의 독립운동 노선은 경계가 분명하다. 김구는 폭력에 의한 강압적인 독립운동 노선을 주지했기 때문에 상해 한인사회에서 안창호의 독립노선보다 인지도가 떨어졌다. 자존심 강한 김구 입장에서는 불안한 열등을 극복하지 못해 무자비한 테러를 감행한 것은 아닐까. 결국 옥관빈의 암살은 밀정에 의한 테러라기보다는 임정의 자치권이 흔들리는 위협을 피하기 위한 극단적인 수단이 아니었을까. 옥관빈의 사례에서도 김구의 리더십이 보이지 않는다. 그의 국가에 대한 궁극의 철학은 무엇이었을까.

 

(안중근의 막냇동생 안공근)

1939530일 중국 중경에서 안중근의 막냇동생 안공근(50)이 암살되었다. 안공근은 1920년대 임정 외교특사로 대소외교를 담당했고, 1930년대 전반 한인애국단 김구의 참모장으로 이봉창과 윤봉길의 폭살테러, 옥관빈과 옥성빈 암살테러에도 깊이 관여했던 인물이다. 암살범은 청부살인자 남화연맹의 정화암이었고, 사체처리는 당시 김구의 주치의 유진동이 담당했다. 정화암에게 청부살인을 의뢰한 배후는 한국국민당 집행위원장 김구와 비서 3인방이었다.

 

18952월 동학접주를 자칭했던 김구는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 진사를 찾아와 인연을 맺었다. 상놈 됨의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김구는 동학운동으로 개과천선하여 장래 정도령이 계룡산에 신 국가를 건설한다는 동학의 종지를 듣고 감격해서 동학에 입당하게 되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1893년 말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에 나름 주름잡는 팔봉접주라 자칭했다. 189412월 말 황해도 동학군이 해주성을 공격할 당시 김구는 서문 공략의 선봉장을 맡았으나 일본군의 총 몇 발에 혼비백산하여 흩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황해도 일대의 동학당 토벌에 앞장서고 있던 안태훈 진사로부터 밀서가 왔다. 밀서의 요지는 군이 만일 청계를 침범하다가 패멸 당하게 되면 인재가 아깝다.”는 것이었다. 당시 안진사는 문무양전을 겸비한 장쾌한 인물이었다. 일발필중의 철궁지예는 물론이고 시문에도 탁월한 문장가였다. 그는 동학란이 일어나자 자신의 은거지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에 의려소를 차리고 창의군을 일으켰다. 189412월 산포수 70명과 장정 100여명을 이끌고 동학 접주 원용일의 동학군 2만 명을 격파해서 명성을 떨쳤다. 그 때문에 황해도 일대의 동학 각 접은 안태훈을 두려워했다.

18951115일 단발령 공포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의병들이 벌떼같이 일어났다. 김구는 안진사를 찾아 단발령 창의를 제안했지만, 안진사는 아무 승산 없이 일어났다가는 실패 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로 김구의 제안을 단박에 거절했다. 그 직후 김구는 안진사와 절교하고 황해도 장연 산포수를 동원한 장연 산포수 사건을 획책했다. 그런데 문제는 안진사도 이 역모에 휘말리고 말았다. 다름이 아니라 김구는 장연 산포수 사건을 기획하면서 산포수를 모집하는 과정에서 안진사의 명성을 도용했던 것이 화근이 된 것이다. 결국 안진사는 김구와의 인연 때문에 자신과 전혀 무관한 역모사건에 휘말렸고, 그로 인해 동학당 토벌의 혁혁한 위훈에도 불구하고 역도라는 누명을 쓴 채 궁지에 내몰리게 되었다. 김구는 벼랑 끝에 몰린 자신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준 안진사를 배신하고 절벽으로 내몰았다.

 

안공근은 18897월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에서 안태훈 진사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는 둘째 형 안정근과 함께 청계동 한문 사숙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1906년 진남포로 이주한 뒤 천주교 계통의 삼흥학교에서 영어 등 근대교육을 받았다. 19073월 경성사범학교에 입학했고, 같은 해 8월 진남포 보통학교 부훈도(판임관 47)가 되었다. 19091026일 큰형 안중근의 하얼빈 저격 사건이 일어나자 둘째 형 안정근과 함께 진남포경찰서에서 엄중한 취조를 받았으나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그해 11월 안정근과 함께 여순감옥에 수감된 큰형 안중근을 면회하기 위해 여순에 도착했다가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참고인 심문을 받았다. 1910326일 안중근이 교수형 당할 때까지 옥바라지를 하고 시신을 수습해 장사를 지내고 귀향길에 올랐다. 큰형 안중근과 관계된 쓰라린 경험은 안공근의 인생 역정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이후 안공근 일족은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안중근 가족들이 거주하고 있는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당시 안중근 일족은 도산 안창호의 도움을 받아 서북출신의 혁명가들이 항일집단촌을 형성하고 있는 동청철도 동부선 목릉력 인근에 정착했다. 둘째형 안정근이 일족들의 생활비 부양에 힘쓰고 있는 와중에도 안공근은 큰형 안중근의 상급학교에 진학해서 나라의 동량이 되어 달라는 유지를 받들어 러시아 유학길에 올랐으나 학비 부족과 가족부양 문제로 학업을 중단하고 19144월 안정근이 있는 니콜리스크로 귀환했다. 이때, 안공근은 안정근이 운영하는 잡화점 일을 도왔다. 1914년 당시 안공근은 큰형 안중근의 후광을 입어 조국 독립을 꿈꾸는 항일 무리들 가운데서는 거물급 핵심인물이었다. 19149월 안공근은 조선인 김정국을 일제의 밀정으로 몰아 살해한 혐의로 지명수배를 받고 있어서 두 형제는 1915년 경 러시아 국적을 취득했다.

 

191911월 안정근이 안창호의 권유로 권속들을 이끌고 상해로 이주했다. 안창호는 안공근이 러시아어에 능통하고 모스크바 사정에도 밝아 러시아 외교특사로 추천해서 19205월 상해에 도착했다. 19214월 이승만 대통령은 임정의 내각을 구성하면서 안공근을 외무차장에 임명했다. 19217월 안공근은 임정 초대 러시아 대사 신분으로 모스크바에 도착해 볼세비키 혁명정부를 상대로 차관교섭을 벌였지만, 별다른 성과 없이 지내다가 192410월 상해로 귀환했다. 6개 국어에 통달한 안공근은 상해에서 미국 혹은 영국대사관의 통역으로 고용되어 일하기도 했다.

 

상해로 돌아온 안공근은 1926년 한인교민단 단장 취임, 팔인단 테러 단장 취임, 19276월 여운형 조상섭 등과 한국독립운동촉진회를 결성하고 회장 취임, 19277월 안창호가 주도하는 유일당 운동에 참여, 19283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결성, 19301월 안창호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창당 후 기초위원 선출 등 여러 항일운동 관련하여 끊임없이 매진했다. 1920년대 후반부터는 안정근과는 달리 안창호의 서북파 혹은 흥사단과도 정치적 거리를 두고 임정과 김구가 표방하는 폭력지상주의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193111월 김구는 이봉창의 천황 폭살테러를 기획하는 과정에서 한인애국단을 결성했다. 주요 임무는 일제 요인 암살과 시설 파괴였으며, 단원은 안공근, 엄항섭, 안경근 등이었다. ‘한인애국단은 임정의 예하 특무조직이었으나 김구의 사조직이나 다름없었다. 안공근은 김구의 참모장이 되어 인사, 통신, 정보 등 특무활동 전반을 총괄하였다. 19324월 윤봉길 폭살테러 사건을 계기로 김구가 일경의 추격을 받고 도피하자 안공근이 한인애국단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19342월 김구가 장개석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설치한 한인 군관학교를 양성하기 위한 육군중안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의 운영책임도 안공근이었다.

 

193511월 김구와 그 일파는 한국국민당을 창당했고, 안공근도 당내 유력자로 부상했다. 그런데 19361월 김동우와 오면직이 안공근의 인색함과 전횡에 반발해 김구파를 이탈해서 한국맹혈단을 결성하여 한국독립당재건파와 합세했다. 이에 안공근은 정보망을 가동해 이들의 동태를 파악해서 일본영사관 끄나풀 위혜림에게 흘려, 오면직을 비롯한 핵심단원들이 일본 영사관 경찰에 검거되었다. 안공근 입장에서는 일본 영사관에 심어놓은 정보원과 경찰력을 동원해 배신자들을 처단하고 장래위협 요인을 제거한 셈이다. 안공근은 각종 정보공작 총책으로서 세력기반을 확대해 나갔다. 그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일제로부터 검속이 강화되었으며 지명수배를 받기까지 했다. 김구의 두뇌이자 손발이었던 안공근은 김구를 세계적 테러리스트이자 임정의 헤게몬(hegemon)으로 만드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193111한인애국단결성을 계기로 시작된 안공근과 김구의 협력관계는 193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안공근은 일본어, 러시아어, 영어, 중국어, 프랑스어 등 총 6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탁월한 어학 능력의 소유자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상해 주재 각국의 영사관을 드나들면서 인적네트워크를 구축했다. 하지만 그를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정정화의 [장가일기]에 의하면 상해에 있을 때, 공금을 챙겨 홍콩으로 피난했던 일이 있었다고 전한다. 또한 특무대 소속 김동우 오면직 등 중견 단원들은 김구의 독재 전제적 행동과 안공근의 전횡불륜행위에 불만을 품고 김구파를 이탈하였다. 특히 안공근 자신은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면서 부하들 처우에 인색했다는 불만도 많았다. 안공근은 김구의 테러활동을 기획하고 집행하는 책사이자 대리인을 맡아 중국 정부가 매달 지급하는 보조금의 인출권과 자금 관리권을 좌우했다. 그렇지만 김구는 이 모든 것을 안공근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1932년 윤봉길 폭살테러 이후 거금 60만원의 현상금이 걸린 지명수배자 신분으로 밀정과 암살자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안공근과 김구가 갈라서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38년 중국 장사에서 발생한 이른바 남목청 사건이었다. 193856,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소속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영수들이 모여 3당 합당을 논의하고 있을 때, 조선혁명당 당원 이운환이 난입해 권총 4발을 발사했다. 그 자리에서 김구, 현익철, 유동열, 지청천이 차례대로 총탄을 맞았다. 이 사건으로 현익철은 즉사하고 나머지 3명은 중경상을 입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사건 동기에 대해 여러 풍설이 돌았으나, 일제는 한국국민당과 조선혁명당 간 자금 분배를 둘러싼 내홍에 따른 김구 암살미수 사건으로 파악했다. , 조선혁명당 입장에서는 합당을 전제로 한국국민당이 무차별 대우를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차별한 것에 앙심을 품고 있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한국국민당으로서는 자금 배분 차별이라는 남목청 사건원인 제공자를 색출하는 것이 불가피해졌다. 김구는 그 당사자로 안공근으로 지명했다. 19387월 김구는 안공근의 여러 잡음에 따른 불편함과 남목청 사건을 수습하는 차원에서 안공근의 직위와 권한을 모두 박탈했다.

 

임정이 중경에 이주해 있을 때, 1939530일 안공근이 홍콩에서 중경으로 돌아와 실종되었다. 안공근의 실종을 둘러싼 여러 정황과 증언들이 있었다. 행방불명설, 강도살인설, 청부살인설, 정적제거설, 권력투쟁설, 살인멸구설 등 풍설이 설왕설래했다.

 

이와 관련하여 현재 출간 본 [백범일지]에는 관련 사실에 대한 일체의 언급이 없다. 하지만 육필본과 필사본의 경우, 안공근 기술 부분에 대한 절삭 또는 삭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육필본의 판독이 가능한 몇 개 지문에는 1)청년들에게 분파적으로, 2)용단으로 안공근의 죄상을 선포하고 6개월 , 3)대회를 선포하고 공근의 라는 지분이 남아있다. 필사본에는 1)경비를 작량 분배하든, 2),,, 3)부득이 국민당 임시대회를 소집하여 등의 지문이 남아있다. 1947년 말 백범일지를 출간하는 과정에서 육필본과 필사본의 안공근 기술 부분을 절삭, 삭제했다는 것은 그만큼 민감한 사안이었음을 입증한다. 안공근 서술 부분의 시간과 공간은 출간본 [백범일지]와 대조하면 대략 19387월경이다.

 

1932년 이래 안공근은 김구를 임정의 최고 실력자로 부상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전횡을 일삼는 등 주의 사람들의 질시와 비방의 표적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남목천 사건을 계기로 한국국민당은 임시 전당대회를 개최해 사건의 모든 책임을 안공근에게 뒤집어씌워 모든 지위와 권한을 박탈했다. 하지만 안공근 입장에서는 납득이 어려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자금 분배 문제는 한국국민당 수뇌의 의결을 거쳐야 하는 중대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안공근은 홍콩과 중경을 전전하며 김구에 대한 모종의 반격을 획책했고, 사전에 낌새를 차린 김구와 그 일당이 남화연맹에 암살을 청부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19395월 안공근의 실종과 관련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확인된 내용을 근거로 유추해보면, 남목청 사건은 애초 약속과 달리 차별적인 생활비 배분에 불만을 품은 이운환의 단독 범행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김구와 한국국민당으로서는 사건 수습을 위한 정치적 희생양이 필요하여 재무담당이었던 안공근의 출당조치를 했던 것이다. 안공근의 성품과 능력을 고려할 때, 모든 수단과 인적 연망을 총동원해 김구와 한국국민당에 대한 반격을 준비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안공근의 반격계획은 김구와 그 일당에 의해 되치기 당했다. 김구와 그 일당은 남화연맹 정화암을 사주해 안공근을 살해했고, 김구의 주치의 유진동을 시켜 시신의 각을 떠서 상자에 넣고 무거운 돌덩이를 매달아강물에 유기했다. 안중근의 막냇동생 안공근은 김구를 임정 최고 실력자로 만드는데 헌신했지만, 남목청 사건에 연루되면서 청부살인에 희생자가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는 데는 여러 정황과 증언이 있으며, 김구의 백범일지 육필본과 필사본의 절삭, 삭제 흔적은 의심을 남기기에 충분하다.

 

작가는

안공근이 임정과 김구에 기여한 공로가 크지만, 남목청 사건을 계기로 암살당했다. 문제는 남목청 사건 당시 이운환이 발사한 제 1탄이 김구를 노렸다는 사실은 문제의 제 1차적 책임이 김구에게 있었음을 지적한다. 그런 면에서 안공근의 암살은 정치적 신념이 결여된 범죄적 폭력으로 간주한다. 오랜 기간 동안 풍찬노숙을 마다않고 동고동락 했던 안공근을 김구는 자신의 지위를 넘보는 잠재적 도전자로 간주해 무참하게 살해한 것은, 테러가 의도하는 거대한 공포 확산과 무관했고, 개인적인 이해가 얽힌 범죄적 살인에 불과했다고 폄훼한다.

 

독자는

안중근의 막냇동생 안공근은 범상한 인물은 아니었다. 술수와 간계에 능했으며, 대범한 성품을 지녔다. 그는 김구와 동조하여 폭력에 의한 독립운동을 지향한 것은 사실이다. 폭력에 의한 독립이 사실상 불가능할진데 무모하게 실행한 것은 안창호와 비교하면 안목이 좁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들이 목숨을 걸고 일제에 항거하고 독립운동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김구는 왜 자신의 측근세력이었던 안공근을 처치했을까. 불협화음이나 횡령 같은 문제라면 얼마든지 개선의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김구 입장에서 안공근이 그만큼 위협적인 존재였을까. 안공근의 능력으로 보면 그럴 가능성도 충분하다.

 

책에서는 김구를 안공근 암살의 배후로 확신하고 있지만, 여태까지 이런 사실들이 알려지지 않았던 점을 감안하면 아직 더 세밀하고 집중적인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만약 책에서 제시한 내용대로 김구가 안공근 암살의 배후가 확실하다면, 김구의 사상과 그가 추구했던 국가관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며, 그의 애국 행적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 역사의 지향점은 과거의 역사를 진실에 의거하여 잘잘못을 가려내고 미래의 디딤돌로 삼고자 함이니, 본 저서를 통하여 김구를 더 정확하게 연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정적테러]

 

(민주 건국의 송진우)

19451230일 새벽 한국민주당(한민당) 수석총무 고하 송진우(56)가 원서동 자택을 침습한 괴한들에게 6발의 흉탄을 맞고 순국했다. 암살범은 민족주의 광신자 한현우 등 6명이었고, 이들에게 총기와 자금, 정보를 제공하고 송진우 암살을 사주한 배후는 1930년대 전반 김구의 한인애국단단원으로 활동했던 김영철과 임정 산하 대한보국의용단 소속 전백이었다. 이들은 송진우를 찬탁의 수괴 혹은 민족 반역자로 몰아 암살했다.

 

송진우는 189058일 전남 담양군 고지면 선곡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천성이 총명하고 집념이 강하며 비범했다. 유년 시절에는 한학을 공부했으며, 19064월부터 창평영학숙에서 영어, 일어, 산술등 신학문을 수학하면서 평생의 친구 인촌 김성수와 금석지교를 맺었다. 이들은 1908년 일본 유학을 떠나 금성중학교 등을 거쳐 1910년 와세다 대학에 입학했다. 1910년 한일합방의 충격으로 공부를 접고 귀향했지만, 부친의 권고로 재차 유학길에 올라 메이지대학 법과에 진학한 이후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자강론자로 변신했다. ‘조선유학생친목회를 결성하고 잡지 학지광의 발행을 주도하면서 최남선, 장덕수, 김병로, 신익희, 조만식 등과 교제했다.

 

1915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하여 김성수가 인수한 중앙학교 교장으로 1916년 취임했다. 송진우는 19193.1 만세운동 기획자 가운데 한 명이었지만,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자는 아니었다. 1920년 김성수가 동아일보를 설립 인가받아 창간하였으며, 19219월 송진우는 동아일보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로부터 193611월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사장직에서 물러나기 까지 15년 동안 동아일보를 굴지의 민족 언론지로 키워냈다. 그는 동아일보에 재직하는 동안 국제농민본부가 보내 온 3.1운동 기념 메세지를 동아일보에 게재했다가 정간 처분과 함께 6개월 징역형을 받았다. 1931만세보사건이 발생했을 때, 폭력행위 중지 캠페인을 주도했으며, 동아일보의 지면을 활용해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지지하고 국산품 애용에 앞장섰다. 19225민족개조론필화사건으로 궁지에 몰렸던 이광수를 도우려다가 사회적 반향에 부딪혀 동아일보 불매운동이 번지기도 했다. 19408월 동아일보가 폐간되고 난 이후에도 일제의 입장에서 보면 송진우는 애물단지였다.

 

송진우 암살범 한현우는 191811월 평북 중강진 출신으로 1929년 경성고보를 중퇴하고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1937년 와세다대학 문과에 입학, 1941년 같은 대학 정경과를 졸업했다. 19436월 동경에서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고, 19444월 국제평론사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19454월 강원도 춘천에서 격몽의숙을 개설해 청년계몽운동을 시작했다. 그해 국민대회준비회에서 송진우를 돕기도 했다.

 

19458월 해방 직후 우리민족은 독립을 희구했지만 연합국은 신탁통치를 결정했다. 194510월 미국 국무성 극동국장 빈센트는 조선에서 신탁통치를 실시할 예정이라는 구상을 공표했다. 이에 한민당 수석 총무 송진우는 찬성을 표명한 반면, 그 외 다른 정당 및 사회단체는 반대의사를 피력했다. 194512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우리 민족에 대한 신탁통치를 결정했다. 송진우는 우리 민족이 정치 경제적으로 미숙해서 자립하기 곤란하니 연합국의 보호 및 지도를 받아 자립할 힘을 길러야 한다고 역설했다. 반면 그 날 밤 임정은 국무회의를 소집해 외세에 의존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며, 우리 민족이 자립, 자존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큰 잘못이라 반박하며 신탁통치 반대와 즉시 독립을 결의했다.


1945810일 송진우는 조선총독부 하라다 경무국장의 방문을 받았다. 하라다는 종전사실을 말하고 헌병, 경찰, 검찰 등 통치권 인계를 조건으로 일본 거류민의 거주 안정과 사유재산 보호 등 종전 뒷수습을 부탁했으나, 송진우는 연합군의 동향과 임정의 존재를 의식하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1945816일 여운형이 조선총독부로부터 치안권을 인수해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이때 다수의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참여했으나 송진우는 여운형의 간곡한 요청에도 임정을 봉대해야 한다며 건준 참여를 거부했다. 더구나 96일 여운형과 박헌영은 아직 귀국도 하지 않은 이승만과 김구 등의 명의를 도용해 조선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송진우는 박헌영 등 공산주의자들의 책동에 놀아나는 여운형을 질타했다. 자주독립의 길은 오로지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이며, ‘적색정권 수립은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 그의 단호한 입장이었다.

 

송진우는 미군진주를 확인한 뒤에야 비로소 정치 일선에 뛰어들었다. 194597조선인민공화국수립을 괴뢰로 취급하며, 이에 맞설 수 있는 국민대회준비회를 발족하고 위원장에 취임했다. 그의 계획은 1) 서구식 민주주의 국가 건설, 2) 미국 중심의 연합국과 연대한 국가 건설, 3) 임정봉대론을 앞세운 우익세력의 확대, 강화와 좌익세력의 견제와 타도에 의한 민주국가 건설, 4) 국민대회개최를 통한 계급을 초월한 새로운 국가 건설이었다. 916일 한국국민당과 조선민족당 등 정당, 사회단체를 규합해 임정봉대인공타도를 내걸고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창당하고 수석총무에 취임했다.

 

19451016일 이승만 박사가 귀국하여 좌우 세력의 통합을 위해 각 정당, 사회단체를 포괄하는 독립촉성중앙협회를 발기했다. 한편, 19451123일 임정은 환국하여 임정법통론에 입각하여 독자세력화를 추진했다. 19451219일 송진우는 임시정부 개선 환영대회환영사에서 임시정부가 중핵이 되어서 모든 아류, 지류를 구심력으로 응집함으로써 국내 통일에 절대적 영도를 발휘하는 동시에 우리의 자주독립 능력을 국외에 하여 시급히 연합국의 승인을 요청해야 한다.”며 임정에 대한 절대적 지지를 표명했다.

 

같은 날 임정도 그동안의 관망적 태도를 버리고 특별정치위원회를 발족하여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별도로 정계개편을 주도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냈다. 송진우의 한민당과 임정의 협력이 본격화 되었으며, 임정의 특별정치위원회를 중심으로 통합되는 분위기였다. 1946110일에 예정되었던 국민대회가 성공리에 개최되었다면 임정 중심의 정치통합이 성공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19451230일 송진우 암살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9451228일 정오에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 안이 선포되자 국내 정치 집단은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그날 오후 임정의 비상대책연합회의에서 김구는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것이 곧 독립운동이다.’라며 울분을 터뜨렸다. 하지만 송진우는 즉시 독립선포와 미군정 접수를 주장하는 김구와 달리 민주적 방법으로 반탁의사를 표시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미군정과의 충돌을 절대 피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가 염려했던 것은 미군정을 부인하고 임정의 이름으로 독립을 선포하면 큰 혼란이 일어날뿐더러 결국은 공산당이 어부지리를 취할 우려가 있다.’고 설득했다. 임정봉대와 군정협력의 기치를 내걸었던 송진우의 입장에서는 김구의 반탁, 반미 노선은 무척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미군정과의 대립을 격화시키는 김구의 맹목적 반탁운동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19451228일 제 1차 경교장 회의에서는 거족적인 반탁운동을 위해 임정 산하에 탁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설치를 결정하고 30일 서울운동장에서 서울시민 반탁시위대회 개최를 결정했다. 19451229일 송진우는 김성수를 만나 지난밤 경교장 회의에서 김구와 임정의 강경론자들이 자신을 찬탁론자로 몰아세운 사실을 거론하며 상해에서 감투싸움이나 벌이고 있다가 남의 힘으로 해방을 맞으니 금의환향했어. 그래도 법통이 아깝다고 그들을 환영하기 위해 준비 기구까지 만들었고, 돌아오자 땡전 한 닢 없어 우리가 기금을 모아서 주었는데, 국민들의 반탁여론이 높으니까 거기에 편승해서 미군정으로부터 정권을 인수받아 정부를 구성하자는 걸세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송진우는 1229일 오전 제 1차 경교장 회의를 마치고, 오후에 잠깐 경교장을 들렀다가 귀가해서 밤 10시경 잠자리에 들었다. 그날 저녁 제 2차 경교장 회의에서 총동원위원회는 신탁 순응자는 반역자로 처단하자’ ‘대한임정을 절대 수호하자’ ‘외국 군정의 철폐를 주장하자9개 행동강령을 결정했다. 1230일 새벽 6시 송진우가 머물렀던 별채에 괴한들이 침습하여 13발의 총탄을 난사했으며, 송진우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동아일보 주필이었던 설의식은 영결사에서 광복의 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송진우의 죽음은 민족의 비극이요, 국가의 불행이라 했으며, 장택상은 대들보가 부러진 듯한 공허감을 메울 길 없다고 한탄했다.

 

수사팀은 송진우 암살의 배후를 밝히는 데 총력을 기울였지만, 한현우 일당은 배후에 대해서는 진술을 거부했다. 그러던 중 19467월 한현우의 배후로 지목된 전백을 체포했다. 한민당은 한현우와 전백이 경교장을 빈번히 들락거린 사실을 확인하고 김구와 임정을 의심했다. 전백은 한현우의 송진우 살해를 두고 용감한 처치였다’ ‘그 애국 정열을 잊지 말라며 칭찬했고, 수차에 걸쳐 현금 10만원을 지급했으며, 범행 직후 북조선 여행을 지시했다. 또 다른 배후 김영철은 1930년대 김구의 한인애국단단원으로 활동했으며, 장개석 측근들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전백과 김영철이 의기투합한 것은 194511월 말 경이었다. 전백은 남의사 시절부터 김영철과 교분을 쌓고 그의 영향을 받아 테러리스트가 되었지만, 일본 헌병대에 체포된 후 밀정으로 변신했다. 밀정 활동으로 벌어들인 적잖은 자금으로 영화기업사를 설립했다. 김영철은 송진우와 여운형 암살 그리고 정부수립 후의 이승만 암살미수 사건에도 깊숙이 관여한 인물이다.

 

세간에 충격을 주었던 이 사건에 정치적 배후는 없다라고 대법원 상고심에서 판결했다. 하지만 19489월 마포형무소 수감자이자 정치테러의 선구자로 알려진 한현우는 국제신문과의 옥중 인터뷰에서 송진우 암살사건과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관련해 국가적 견지에서 테러는 피할 수 없으며, 나는 국가적 입장에서 그른 자를 처치했을 뿐이다. (...) 나는 원래부터 임정지지자다라고 밝혔다. 1950714일 한현우는 남침 전쟁으로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의 도움을 받아 투옥 43개월 만에 마포형무소를 출옥했다. 출옥과 동시 한국독립당 당사를 찾았으나, 한독당이 김일성 괴뢰도당의 인민의용군 모집에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일본으로 밀항하여 일생을 마쳤다.

 

송진우가 김구와 임정 세력을 국운을 살릴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고 정성을 다해 모셨다. 19451124, 임정 요인들이 환국하던 이튿날 경교장을 찾아 김구에게 인사를 했으나 김구는 요지부동 고자세를 견지했다. 또한 송진우와 국민대회준비회는 임정 요인들의 환국에 맞춰 한국지사후원회를 결성하여 900만원의 거금을 모금하였다. 1125일 송진우는 경교장을 예방하여 후원금을 전달했지만, 후원금을 둘러싸고 논쟁이 일면서 후원금을 되돌려 주는 일이 발생했다. 이외에도 한민당과 임정 사이에 몇 몇 갈등이 있었다. 그동안 임정봉대를 내세웠던 송진우와 한민당 간부들 입장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실망감이었다. 결국 임정의 태도는 국내 우익진영을 해외파와 국내파로 갈라놓는 계기가 되었으며, 송진우 암살 사건은 한민당과 임정의 거리를 더 넓히는 결정적 요소가 되었다.

 

송진우는 임정봉대의 기치를 내걸고 임정 중심의 정계통합과 정부수립을 추진했다. 12월 중순 이승만이 주도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중심의 정계통합을 시도했지만, 임정과의 협상이 결렬되면서 실패했다. 당시 임정에 대한 사회 일반의 기대는 대단했고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에 환호했다. 하지만 해방정국에서 강력한 정치적 능력을 발휘했던 송진우가 반탁운동을 둘러싸고 김구와 대립하면서 정치 테러에 희생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이승만 또한 감당하지 못할 현실에 오열하며 송진우를 극진히 애도했다. 결국 송진우 암살은 해방정국의 구심력을 김구에게서 이승만으로 이동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9451229일 한국사회의 불같은 반탁운동은 미군정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하지 중장은 신뢰하는 자문위원 송진우를 불러 임시정부에 대한 설득을 당부했다. 그러나 하지의 특사격인 송진우는 그 이튿날 새벽 암살되었고(...) 하지는 송진우 암살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했다. 하지는 김구와 임정을 남한 공산세력을 저지하고 분쇄하는 반공의 방파제로 삼고자 경호원, 미제차량 등을 제공했으나 배반당한 것이다. 김구는 실패로 돌아간 쿠데타뿐만 아니라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어 하지의 신임을 받는 고문 송진우 암살을 조종했다고 주장했다. 장례식장에서 하지 중장은 조선은 송진우 씨의 불행한 별세로 말미암아 큰 손실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독립을 하루빨리 할 수 있는 기회를 잃었고, 오히려 독립하기 위하여 좀 더 많은 시련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라고 조문했다.

 

송진우의 암살 동기와 관련하여 여러 정황들과 증언들이 중언부언 많지만, 반탁운동을 둘러싼 김구와의 갈등이 결정적인 동인이라는 결론에는 이론이 많지 않다. 반탁운동으로 김구와의 갈등이 있었지만 임정봉대와 군정협력을 통해 우익세력을 집결시켜 민주건국으로 나아가고자했던 송진우의 정치적 계산은 틀어지고 말았다. 김구에게 송진우는 미군정의 앞잡이이자 감히 임정에 맞서려는 도전자 혹은 역도와 다름없는 존재였다. 김구가 반탁운동에 앞장섰던 것은 환국 당시 이미 임정 법통에 기초한 건국 플랜을 결정한 상황에서 거국적인 반탁운동을 통해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겠다는 정치적 심산이었다. 하지만 김구와 임정의 과격한 반탁운동은 국제정치를 무시한 정치적 야욕에 사로잡힌 근시안적 결정이자 정치적 헛발질에 불과했다. 결국 김구의 반탁운동은 스탈린의 정치적 야심에 휘둘리며 남북분단의 정치적 빌미만 제공했을 뿐이다.

 

작가는

송진우는 해방정국의 거물 정치인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는 철저한 민족주의자였고, 투철한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였다. 신탁통치 관련하여 김구와 첨예하게 격돌했으며, 그런 점에서 김구에게는 무언의 위협이었던 것이다. 반탁, 반미의 이상론을 주장하는 김구와 달리 반탁, 친미의 현실론을 주장했으며, 한국 최초의 친미, 반공의 정치이념을 정립시키고 극동에서 공산주의 민족해방투쟁에 대결하는 미국의 극동정책에 적극 호응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결국, 19451229일 김구와 임정의 제 2차 경교장 회의에서 찬탁론자는 반역자로 처단할 것이라는 결정은 반탁, 친미를 주장하는 송진우를 겨냥한 결정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송진우 암살 테러의 동기는 반탁과 찬탁 여부가 아니라 법통 임정의 결정에 반대했다는 단순한 이유였다. 그렇다면 송진우와 한민당이 내세운 임정봉대 플랜은 김구의 정치적 공덕심을 과대평가하고 비민주성을 과소평가한 정치적 환상에 불과했다. 송진우 암살은 정치적 신념과 무관하게 범죄적 폭력에 불과했다.

 

반탁은 애국이요, 찬탁은 매국이라 선동했던 김구는 민주적 절차를 거쳐 임시정부를 새롭게 수립한다는 모스크바 결정에 반대했다. ’신탁통치로 인해 임정법통을 상실하지 않겠다.‘거나 건국의 주체는 임정이어야 한다고 강변했다. 송진우는 법통 임정을 무시하는 김구와 맞선 김구의 적으로 간주되었다. 그런 김구를 두고 북한에서도 오늘까지 배운 것이 살인이요, 남은 것이 살인인데(...) 무슨 염치로 애국과 민주를 말하는가.‘라고 질타할 정도다. 요컨대 송진우 암살테러는 임정의 권위를 부정한 반 임정주의자의 최후를 전시하는 일종의 정치적 협박이었다.

 

독자는

송진우의 정치적 신념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와 맞닿아 있다. 그러나 해방정국 시기에는 국가의 정체성이나 이념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추기에는 불확실의 시대였다. 그런 점에서 송진우는 선지자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그는 당시에 나라가 공산주의로 독립되는 것을 경계했으며, 그것의 실현을 위해 친미정책을 고수했던 것이다.

 

임시정부를 자신의 최대의 치적으로 생각했던 김구는, 새롭게 독립하게 되는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대통령 또한 자연스럽게 자신의 몫이라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그러지 않고서는 해방 후 그의 행적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송진우 암살은 분명 우리나라의 큰 손실이었음은 부인할 수가 없다. 책에서는 그의 암살을 둘러싼 범인들과 그들을 사주했던 전백과 김영철에 대한 재판 기록 등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들의 형량이 비교적 가볍게 처리된 것에 대해서는 의문을 남긴다. 다만, 사법부가 반탁론자들의 극악한 여론을 의식하지 않았을까 하는 여지를 남겼지만, 사법부의 정의가 그때나 오늘날이나 정치권력과 여론의 눈치를 본다면 옳은 정의는 아닐 것이다.

 

저자는 하지 중장이나 여타 다른 증언들을 제시하면서 송진우의 최종 배후를 김구라고 지목한다. 그렇지만 딱히 김구가 배후라는 단서나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전백과 김영철이 김구와 관련이 있고, 김구의 임장에서는 송진우가 눈에 가시였으니 그의 암살은 김구가 최종 배후라고 추정할 뿐이다.

 

해방정국의 근대사 진실여부와 관련하여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김구의 애국과 독립운동이 지나치게 과대 포장되었던 점은 없는지 고민해 볼일이다.

 

(겉치레 공산주의자 여운형)

1947719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의장 겸 근로인민당당수 몽양 여운형이 혜화동로타리에서 괴한의 총격을 받고 즉사했다. 이 사건은 당시 평북 출신 미성년자 한지근의 단독범행으로 종결되며 많은 의문을 남겼다. 하지만 1974년 공범자들이 자수하면서 사건의 진상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신당 2인조(한현우, 신동운)’ ‘영변 3인조(한지근, 김훈, 유예근)’ “화성 2인조(김흥성, 김영성)‘ 와 공모해서 자행한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암살 테러였다. 이들에게 무기, 정보, 자금을 제공한 일당은 김영철과 신일준 등 모두 김구, 한독당 계열이었다.

 

송진우 암살 사건으로 15년 형을 받은 한현우는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지만, 김구의 비호와 형무소 간부들의 특혜 덕분에 수형생활은 큰 불편함이 없었다. 그는 마포형무소 수형생활 중에 자신을 옥바라지 하던 신동운을 사주, 공모해서 여운형을 암살했다. 한현우의 회고에 의하면, 19451230일 여운형과 박헌영 암살테러를 계획했다가 한독당 소속 김영철과 전백의 사주를 받고 한민당 수석총무 송진우를 암살한 민족주의 광신자였다.

 

여운형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 발표될 당시에는 신탁통치를 반대했다. 그러나 이내 박헌영과 함께 신탁통치 지지입장으로 돌아섰다. 여운형은 적화 혁명을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 김일성의 지지와 설득을 받아 들여 반탁에서 친탁으로 돌아선 것이다. 여운형은 남한 좌익진영 가운데 가장 열심히 찬탁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청년 대중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그의 영향력으로 들불처럼 일어났던 반탁 분위기가 시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당시 한민당을 비롯한 많은 정당, 사회단체들이 찬탁으로 돌아섰다. 반탁 진영은 김구 주석의 한독당과 몇 몇 극우 정당 및 사회단체에 불과했다. 이에 한현우는 찬탁을 저지하기로 결심하고 신동운에게 찬탁 수괴 여운형을 처단해야 한다고 갈파했다. 결국 여운형은 1947719일 피살되었다. 그의 피살 의 결정적인 동인은 찬탁운동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작 한현우는 피살 사실에 대해서는 구제적인 사실을 알지 못했으며, 전적으로 신동운과 한지근이 주도했다고 한다.

 

여운형은 18864월 경기도 양평 묘곡에서 여씨 가문의 종손으로 출생했다. 양반 가문에서 비교적 부유하게 자랐으나, 조부 및 부친 형제들의 동학당 가담 관련하여 산간으로 피신 다니며 가세도 기울었다. 유년시절에는 한학을 수학했고, 1900년 신학문에 뜻을 두고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그 후 흥화학교, 우체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학업을 그만두고 항일운동에 투신하여 양평에서 국채보상을 위한 단연운동을 일으켰다. 1907년 기독교에 입교하여 선교사의 도움으로 양평에 기독동광학교를 세우고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했다.

1910년 강릉 초당의숙과 평양 장로신학교를 거쳐 1914년 남경 금릉대학 영문과에 입학했으나, 1917년 중퇴하고 상해에서 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협화서국에 취업했다. 191811월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 것을 계기로 장덕수, 김규식 등과 신한청년단을 결성했다. 1919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외무부 차장이 되었지만, 수개월 만에 그만두고 1920년 이후 상해 한인거류민단 창설과 발전에 힘썼다. 191911월 일본 정부의 초청을 받고 동경을 방문했다. 이때 제국호텔에서의 연설로 민족지도자 반열에 올라서는 정치적 사다리가 되었다. 19211월 임정 국무총리 이동휘가 고려공산당을 결성할 때 참가하여 당 중앙위원회 번역부 위원으로 활동하며 공산당 선언등을 번역하기도 했다. 19211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여 레닌과 중국 국민당 지도자 손문과도 인적 연망을 맺었다. 19215월 이래 여운형은 안창호와 함께 임정 개혁을 위한 국민대표회 소집을 주도했다, 그 일로 김구 등 임정 옹호파는 여운형을 일본 스파이로 간주해서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 1925년 말 김구는 여운형 부부를 폭행하기까지 했다. 여운형의 피살은 아마 이때부터 그 시작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19297월 여운형은 상해에서 치안유지 위반으로 체포되어 193053년 징역형을 받고 복역하던 중 1932년 모범수 표창을 받고 가석방되어 대전형무소에서 출옥했다. 19333월 조선중앙일보 창간과 함께 초대 사장에 취임했다. 이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전향서를 써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신문사는 양반층 비리 고발과 노동자, 농민, 학생운동을 변호하며 대중의 지지를 얻었으나, 임정을 지지하고 후원하는 장개석을 비난한 사설 때문에 사회적 물의를 빚기도 했다. 194211월 시모노세키에서 일본의 패전과 조선독립을 운운했다는 이유로 유언비어 유포 및 혹란죄로 검속되었다. 19437조선민족의 관념을 완전히 청산하고 이 되어 총독의 명령에 복종하고 당국에 협력해서 국가를 위해 헌신할 것을 맹세한다.’는 장문의 전향서와 포연탄우 속에 문필로 보답하고, 나라 위해 일신을 바칠 것을 청한다.’는 자작시를 지어 제출하고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194310월 이래 여운형은 학도지원병 권설운동에도 앞장섰다. 그는 일어나라 학도여, 우리들 이천오백만 동포가 참다운 으로서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라며 독려하기도 했다. 19446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에게서 중일 화평공작에 앞장서줄 것을 요청받았고, 19456월에는 안재홍과 어용정당 조선대중당의 창당에 앞장서기도 했다. 여운형은 1937년 중일전쟁 이래 친일 협력을 본격화 했고, 일제와 천황에 대한 을 맹세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해방 후에 여운형은 1) 19458월 소련군 주둔설이 나돌자 심경변화를 일으켜 좌익세력과 연합하여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을 맡아 공산혁명에 매진하겠다며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2) 9월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과 합작하여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고 부주석에 임명되었다. 임정으로 대표되는 봉건적 잔재세력 청산과 한민당으로 대표되는 반민주주의 세력의 청산을 선동했다. 이를 두고 하지 중장은 여운형을 사기극을 조종하는 사기꾼이자 괴뢰정부의 수괴라고 비난했다. 요컨대 인공은 해방정국의 주도권을 거머쥐려는 여운형이 꾸민 강렬한 권력욕의 흉계였고, 해방정국 최악의 괴물이었다. 3) 11월 조선인민당 당수, 4) 19462월 민주주의 민족전선 의장, 5) 미군정은 여운형과 김규식을 앞세워 좌우합작을 추진하며 정치자금을 지원하였다. 여운형은 7월 좌우합작위원회를 결성하고 좌익 수석대표를 맡아 38선을 넘다들었다. 하지만 애당초 좌우합작에 반대했던 소련 군정은 여운형을 두고 좌경화한 우익 인사의 합작운동이라고 폄훼했다. 여운형은 미군정의 좌우합작을 역이용해 김일성 및 소련 군정과 남북합작을 획책했다. 이런 이유로 하지중장은 여운형은 공산주의자들과 협력한 음흉한 인물이라고 혹평했다. 여운형은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 소련 군정만이 아닌 미군정을 활용하려다 실패했다. 그 때문에 미소 양측으로부터 미운오리새끼취급을 받았다. 6) 19475월 근로인민당 당수 등의 역할을 맡아서 활동했다.

여운형이 해방 후 역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거물 정치인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친일매국노, 정치적 사기꾼, 괴뢰정부의 수괴, 우유부단한 지도자, 민족 분열주의자, 정치적 기회주의자, 김일성의 앞잡이, 친소 공산주의자라는 부정적 평가와는 달리 절세의 애국자, 영원한 스승, 레닌에 버금가는 세기의 혁명가, 진보적 민족주의자, 민족적 사회주의자라는 호의적 평가가 대립된다. 이런 논란에 대해 송진우는 몽양은 내가 보기에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오, (...) 공산주의자도 못되면서 공산주의자 노릇을 한다고 개탄했다.

 

19467월 여운형은 김일성의 권유로 자녀 12녀를 월북시켰다. 이를 두고 왈가왈부 말이 많았지만, 김일성의 인질 전략이었다는 설이 주류다. , 김일성은 여운형을 인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한편, 그를 정치적으로 활용하겠다는 속셈을 드러낸 것과 같다. 이중에 차녀 여연구는 1980~1990년대 조국통일민족전선 서기장과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결국 여운형은 김일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족쇄가 되었으며,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그의 사상적 신념을 확증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1990년 북한은 조국광복 40년을 기념해 조국의 자주적 통일에 이바지한 남과 북 그리고 해외 인사들을 표창하는 조국통일상을 제정했고, 815일 제 1회 수여식에서 여운형을 수상자로 선정했다. 그의 딸 여연구는 199111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에 관한 남북한 여성토론회에 참석하기 위해 남한을 방문했고, 45년 만에 부친의 묘소를 참배했다. 당시 김일성 주석도 화환을 보내서 여운형을 추모했다. 대한민국 정부도 1965년부터 공식 추모식을 거행했으며, 2005년 건국훈장 2등급 대통령장, 20081등급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

 

1947년 한지근은 평양에서 김인천, 백남석과 함께, 여운형이 소련을 조국이라고 하는 박헌영과 손잡았으니 매국노이고, 신탁통치를 반대하다가 교묘한 선전으로 찬탁을 선동해서 민족을 분열케 하였으니 민족분열자이고, 또 정치적 야욕을 위하여 반탁과 찬탁을 가리지 않았으니 기회주의자라고 단정하고 처단할 것을 결의했다. 이들은 정보 수집 및 사전에 장소를 답사 하는 등 치밀한 계획 하에 719일 혜화동 로타리에서 실행에 옮겼으며, 저격수는 한지근(당시 19)이 맡았다. 1947년 당시 한지근의 단독범행으로 종결되었던 사건이 27년 만에 베일을 벗은 것은 사건의 공모자들이 1974년 공범임을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검찰은 공소시효가 끝난 사건이지만 사건의 진상을 가려 역사에 남긴다며 60여명을 소환 조사했고, 최종적으로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살인사건으로 결론지었다.

 

이들은 19476민족분열을 막고 경거망동한 지도자를 각성시키자며 여운형 처단을 결의한 직후 임정대원 행동대원 김영철의 알선으로 혁신 탐정사 양근환에게서 일제 99식 권총 1정을, 백의사 총사령 염동진에게서 미제 45구경 권총 1정을 입수했다. 1946322일자 소련 군정문서는 백의사가 김구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있다. 이 단체는 중국에서 돌아온 조선인들과 일부 청년단체 회원들을 포함한다.’고 밝혔다. 당시 한독당 계열의 국민의회재정, 훈련부장 신일준은 한지근을 데리고 다니며 여운형의 예측 동선을 익히도록 했으며, 자객으로서 지켜야 할 몸가짐이나 접근방법, 기타 범행에 필요한 제반 요령을 교육시켰다고 했다.

 

여운형 암살 동기와 관련하여,

여운형은 19215월 이래 임정개조를 위한 국민대표회의 소집운동들 주도했고, 임정 고수파(김구 등)와 갈등했다. 19236월 내무총장 김구는 국민대표회의 해산을 명령했다. 김구는 여운형을 신용하지 않았다. 여운형이 참가한 임시정부회의가 일본 정보기관에 새 나가는 것을 지적하며 일제의 밀정으로 간주했다. 더구나 19458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9월 인민공화국 창설은 법통 임정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라고 간주했다. 194511월 임정 환국 이후 여운형이 김구를 찾아가 임정뿐만 아니라 국내외 다른 독립운동 세력, 사회주의 세력과 함께 협력하여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자고 설득했지만, 김구는 대화를 거부했다. 또한 여운형은 송진우의 임정봉대론에 대하여는 임정은 지리멸렬한 조직이고, 연합국의 승인도 받지 못했으며, 국내에서 투옥된 다수 혁명 지사가 존재에도 불구하고 임정만을 특별히 환대하는 것은 잘못이며, 임정 환영자들은 혁명 공적도 없고 건준의 정권 수립을 방해할 뿐이고, 임정은 국내외 혁명단체의 합동을 방해하고 분열을 조장할 뿐이라며 반박했다. 김구는 이렇게 임정을 폄훼하는 여운형의 발언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19465월 북조선 51기념 공동준비위원회는 중국 상해에서 김구의 유일한 사업은 테러단을 조직해서 진보적 인사들과 좌익 청년들을 암살하는 일이었다. 임정을 반대하는 자는 누구 할 것 없이 김구 테러단의 암살대상이었다. 또 배움을 목적으로 큰 뜻을 품고 상해에 갔던 진보적 청년 학생들이 김구 암살단의 손에 걸려 산 채로 하수도 구멍에 통김치로 담가졌다고 고발했다. 김구는 대한보국의용단 참모장 신일준에게 여운형 암살을 지령했다. 이에 신일준은 백의사 집행부장 김영철과 함께 한현우 및 신동운을 사주해 여운형 암살을 공모하고 실행했다. 요컨대 김구는 임정 법통과 반탁을 폄훼하고 찬탁을 선동하는 여운형을 임정 법통에 대한 부정과 도전으로 간주하고 그냥 둘 수 없었던 것이다.

 

여운형을 둘러싼 정치자금 수수 문제도 그의 행적을 간파하는 하나의 쟁점이다. 여운형은 19458월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면서 필요한 막대한 소요자금을 조선총독부로부터 제공받았다. 일본은 여운형과 안재홍을 매수해 평화와 질서 유지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친일정당을 만들려고 했다는 사실과, ‘일제의 잔존 세력이 여운형을 통해서 중국이나 필리핀에서처럼 친일파 정부를 세우려 했다는 지적을 고려하면 여운형을 앞세워 치안유지뿐만 아니라 친일 괴뢰 정부를 수립하려 획책했던 것은 아닐까. 아무튼 일제가 제공한 거액의 정치자금은 여운형을 정치적 거물로 키워내는 금융 원천이었다.

 

작가는

여운형은 일제가 제공한 정치자금으로 건준과 인공을 수립했고, ‘소련군 진주설에 부화뇌동해 공산혁명에 매진했다. 그는 정치란 춥고 배고픈 대중을 선동해 권력을 잡는 것이고 공산주의는 배고프고 헐벗은 사람 편에 서서 도와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겉치레 공산주의자였다. 1946년 말 좌우합작과 좌익 3당 합당에 실패하면서 좌파 진영은 그를 친일 매국노, 기회주의자, 김일성 앞잡이라 매도했고, 우파 진영 또한 소련 및 김일성과 내통했다며 등을 돌렸다. 좌파 민족주의를 자처하며 거물 정치인 행세를 했던 여운형은 남북한 어디에서도 정치적 포지션을 찾을 수 없었고, 양측으로부터 끈질긴 테러위협에 시달렸다.

 

중국 상해 임정 때부터 여운형을 밀정으로 간주했던 김구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공화국 수립을 주도했던 여운형을 임정 법통을 부정하는 반역자로 낙인 했다. 임정의 화신을 자처했던 김구의 입장에서는 여운형의 처단은 반 임정주의자의 최후를 전시하는 일종의 정치적 협박이었다.

 

독자는

여운형은 해방직후 정치적 거물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사상적 신념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는 항일 운동을 하였지만,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 조선총독부에 매수된 매국자임도 부인할 수는 없다. 또한 민족주의자임을 내세우면서 소련 공산주의자 및 김일성과 긴밀히 내통했던 사실에서 드러나듯이 그의 정체성은 모호하다. 애국과 매국을 넘다들며 신념 없이 좌우를 들락거려 아무에게도 신뢰를 받을 수 없는 테러의 표적이 된 것이다.

 

테러범들의 진술과 사후 정황에 비추어 김구가 여운형 암살테러의 최종 배후였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여지를 남긴다. 김구가 여운형을 밀정으로 간주했을 때부터 눈에 났던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해방 후 국내 활동에 대해서도 김구와 각을 세웠던 정황들을 나열하면 충분히 김구가 배후였다고 단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김구로부터 직접적인 진술이나 확실한 물적 증거는 없으므로 김구가 테러의 최종 배후라고 단정 짓는 것은 무리다. 또한 김구가 테러의 최종배후가 아니라는 단서나 증거도 분명하지 않으므로 쉬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여러 추론들을 대입해 추측할 수는 있지만,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김구가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할 때, 이에 대한 치밀하고 객관적인 연구가 필요하겠다.

 

아무튼 임정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거나, 임정의 조직에 지나친 간섭을 하면 김구는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켰다. 김구에게서 임정은 도대체 어떤 존재였을까. 그의 빈약한 사상적 무장과 일천한 철학, 인류애가 메말라버린 비인간적인 무식함을 포장하는 도구였을까.

 

(얼굴 없는 장덕수)

1947122일 저녁, 한민당 정치부장 설산 장덕수(54)가 동대문구 제기동 자택에서 경찰 제복을 입은 괴한의 총격을 받고 급사하는 암살테러가 발생했다. 암살범은 대한혁명단 소속 박광옥과 배희범이었다. 이들에게 총기. 자금, 정보를 제공한 암살 공범은 한독당 중앙위원 겸 대한보국의용단장 김석황이었고, 장덕수 암살을 부추기고 지령한 배후는 한독당 집행위원장 김구(73)였다. 이 때문에 김구는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소환장을 받고 미군정 군사법정에 서야 했다.

 

1960년 국무총리를 지낸 허정은 장덕수가 살아 있었다면 대한민국의 운명이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 장덕수의 정치적 비중은 우남 이승만 박사조차도 장덕수를 신임하고 존중했다. 김구와 임정 요인들도 그의 의견을 소홀히 하지 못했다. 김구도 장덕수를 통해 하지 중장에게 접근할 정도였다. 하지 중장 역시 장덕수를 높이 평가하고 존중했다. 만약 장덕수가 암살되지 않았다면 우남과 김구 그리고 우남과 하지 중장의 관계는 훨씬 원만하고 융통성이 있었을 것이다.

 

허정은 장덕수의 경우를 살펴 정치적 암살이 얼마나 가증한 일인지를 절감했다. 정치적 암살은 한 생명을 빼앗는데서 그치지 않고 그 나라의 운명마저 역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정치가란 국민의 어떤 자유도, 어떤 권리도, 어떤 발언도, 어떤 행동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허정은 그런 사람이 바로 장덕수였다고 갈파했다.

 

장덕수는 189412월 황해도 재령군 남율면 강교리에서 41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읍내 부농의 마름을 겸하는 자작농이어서 빈궁한 가계는 아니었다. 1901년 사립 연희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수학했지만, 1907년 열넷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가세가 기울어져 생계가 곤란해졌다. 다행히 진남포이사청의 아키모토 토요노신의 도움으로 급사 자리를 얻었다. 그는 급사 생활을 하면서 중학 강의록을 탐독하는 주경야독으로 1911년 제 1회 조선인 판임관 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장덕수는 조선총독부 판임관 임용을 포기하고 1912년 현해탄을 건너서 와세다대학 고등예과에 편입했고, 다음 해에 정치경제학과에 진학했다. 재학 중에 평생의 가 되는 인촌 김성수를 비롯해 현상윤, 송진우, 이광수, 조만식, 신익희 등과 교류하며 우정을 쌓았다. 구두닦이, 창문닦이, 접시닦이, 우유배달, 신문배달, 인삼행상 등 고학으로 학비와 숙식을 해결했다. 그리하여 19167월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 차석으로 졸업했다.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장덕수는 1917년 봄 인근 농촌에 사는 규수와 혼인을 하고. 그 해 가을 미국유학과 독립운동 방략을 모색하고자 상해로 건너가 여운형, 김규식, 선우혁과 교류했고, 191811월 신한청년단을 결성했다. 19192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귀국길에 인천항에서 체포되어 목포 앞바다 하의도에 유배되었지만, 191911월 일본 정부의 초청을 받은 여운형의 도쿄 방문을 수행하게 되어 유배에서 풀려났다.

 

19204월 동아일보 창립 때 부사장 겸 초대 주필이 되어 하노라는 창간사를 집필했다. 창간사의 요지는 민족주의, 민주주의, 문화주의에 입각해 국내 정치에서는 자유주의를, 국제정치에서는 연맹주의를, 사회생활에서는 평등주의를, 경제조직에서는 노동 본위의 협조주의를, 동아시아에서는 민족 간의 단결을, 세계적으로는 정의. 인도. 평화를 인정하는 민주주의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장덕수는 동아일보의 지면을 활용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확산에 노력하는 한편 조선교육회, 조선노동공제회, 조선체육회, 전국청년회연합회, 물산장려운동, 조선민립대학기성회 등 각종 민족개량주의 청년운동의 선봉에 섰고, 당대 최고의 명사로 이름을 떨쳤다.

 

19216월 상해에서 보내 온 레닌 자금’ 5만원을 착복. 탕진했다는 이른바 사기공산당사건에 휘말려 인신공격과 테러위협에 시달렸다. 그 때문에 청년운동도 민족주의 진영(조선청년연합회)과 사회주의 진영(서울 청년회)으로 갈리고 말았다. 사면초가에 내몰린 장덕수는 인촌 김성수와 고하 송진우의 도움으로 동아일보 부사장 겸 상주 특파원 자격으로 수학이라는 명분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234월 포틀랜드 오리건대학교 신문학과를 거쳐 192410월 컬럼비아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하고, 마르크스 계급국가론의 오류와 허구성을 폭로한 마르크스의 국가관 비판이라는 주제의 석사논문을 썼다. 19296월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대학에서 노동당 정부의 노동정책을 연구하고, 19327월 미국으로 돌아와 19365월 세계 지성사에 빛나는 산업평화의 영국적 방법이란 제목의 학위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3612, 장덕수는 136개월에 걸친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길에 올랐다. 19408월 보성 전문학교 교수로 임용되어 재직했다. 19379월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대일협력에도 앞장섰다.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1943년 학병권설대, 1944년 국민동원촉진회,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유력자로도 활동했다.

 

19463월 당시 우익진영의 유력 정당으로는 한민당(김성수), 한독당(김구), 국민당(안재홍), 신한민족당(권태석)이 있었다. 1946322일 한독당과 국민당이 무조건 합당을 선언하면서 합당 교섭은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47일 경교장 합동교섭위원회에 참석한 한민당 측 인사는 김성수, 장덕수, 백남훈이었다. 한독당은 법통 임정을 앞세워 일방적 흡수. 통합을 주장한 반면, 한민당 등 나머지 3당은 이승만의 영수추대, 당명과 강령을 개정한 신당 창당을 주장했다. 합당교섭은 이승만 추대 문제, 정강정책 조정 문제, 부서 배분 문제 등으로 난항을 거듭했다. 결국 당세가 약한 국민당과 신한 민족당은 한독당의 횡포에 항복하고 말았다. 교섭 내용은 한독당의 당명과 당헌을 계승하고 이승만이 아닌 김구를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추대하는 한편, 핵심부서는 한독당이 차지하고 나머지는 3당에 분배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194649한독당의 야욕을 간파한 한민당 중앙집행위원회는 한독당에 한민당을 바치는 헌당행위라며 합당 안을 만장일치로 부결시켰다. 그러자 김구. 한독당은 합당을 깬 장본인으로 장덕수를 지목했다. 이후 19373월에도 미소공위 재개와 반탁운동 재연에 대응해 제 2차 합당 교섭이 추진되었지만, 이는 이승만의 를 틈타 우익진영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한독당의 획책이었다. 이를 간파한 장덕수는 미군정과 정치노선의 차이, 한독당 내부의 당론 분열을 거론하며 합당 불가를 선언했다. 이 선언은 한민당 측이 19459월 이래 추구해온 임정봉대론의 전면적 철회를 의미했다. 이때, 김구. 한독당은 장덕수의 식견과 경륜에 대적할 수 없음을 통감했다.

 

19465월 제 1차 미소공위가 결렬된 상황에서 63일 이승만은 남한단독정부론’, 김구는 남북통일정부론을 주장했다. 반면, 미군정은 여운형과 김규식을 내세워 좌우합작을 추진했다. 좌우합작이야말로 공산화의 지름길이라고 간주한 장덕수는 무상몰수. 분배의 토지개혁이 포함된 합작 7원칙에 대하여 한민당을 와해시키는 독소조항으로서 인민민주주의의 정부수립 의도가 담겨있다고 간파하고 합작 7원칙을 부결시켰다. 반면, 김구와 한독당은 합작 7원칙에 대한 찬성과 지지를 표명했다. 194610월 합작 7원칙 부결을 둘러싸고 한민당은 분당사태로 이어져 창당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19475월 덕수궁 석조전에서 모스크바 3상 협정을 실행하기 위한 제 2차 미소공의가 개막되었다. 1946년 제 1차 때와 마찬가지로 우익진영은 참가여부를 둘러싸고 우왕좌왕했다. 장덕수는 제 2차 미소공위가 결렬되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 불가피할 것이라 예견했다. 장덕수는 모스크바 3상 협정 정부수립, 신탁반대의 단계론적 기능주의 관점에서 보고 613일 미소공위 참가를 결정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미소공위 참가가 유해무익한 것이라며 노발대발했고, 김구는 반탁 진영의 배신이라고 성토했다. 617일 한민당은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를 결성해 우익진영의 미소공위 참가를 이끌었다. 이는 좌파계열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세우려던 소련 측의 의표를 찌르는 신의 한 수였다. 이로 인해 1947517일 미소공위는 무기 휴회에 들어갔고, 1028일 소련대표단은 평양으로 복귀하였다. 2차 미소공위 참가 문제로 한독당은 분열했다, 국민당과 신한민족당 등은 한독당을 탈당해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에 합류했고, 신익희마저 한독당을 탈당해 미소공위 참가로 돌아섰다. 김구에게 장덕수는 옆구리에 박힌 가시같은 존재였다. 아니나 다를까 1014일 유엔 총회에서 한국 문제 결의안이 가결되었다. 이 때문에 모스크바 3상 협정은 물론이고 제 1.2차 미소공위도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고도의 정치적 결단이 필요한 미소공위 참가를 둘러싸고 장덕수의 활약과 결단은 역사의 물굽이를 돌려세우는 이었다.

 

19471114일 유엔 총회에서 1)유엔특별위원단의 구성과 파견, 2)유엔특별위원단 감시하의 19483월 말 총선거 실시, 3)국민의회 소집과 정부수립이라는 한국 문제 결의안이 압도적 다수결로 통과되었다. 감격적 낭보를 접한 장덕수는 122일 동대문구 제기동 자택에서 한민당 관계자들과 저녁 식사를 겸한 총선 대책을 논의했다. 그날 저녁 650분경 자택 현관에서 경찰 제복을 입은 괴한이 쏜 카빈총 2발을 맞고 급사했다.

 

1947124일 박광옥과 배희범이 체포된 뒤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임시정부 측에서 노덕술에게 박광옥의 배후를 캐지 말라는 압력이 심하다는 정보를 받았다. 화가 치민 장택상은 박광옥을 시흥 별장으로 연행해 직접 취조했다. 박광옥은 배후에 김구의 측근 김석황이 있다며, 김구로부터 장덕수는 내 제자이지만 죽일 놈이다. 한민당이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석하게 된 것도 장덕수의 장난이고, 미군정을 연장하려고 음모를 꾸미는 것도 장덕수이다. 민족 반역자는 단호히 없애버려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실토했다. 김석황은 또 장덕수를 해치우고 나면 이승만의 앞잡이 배은희, 윤치영, 조병옥, 장택상 등 정계 요인 28명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자백했다. 그는 김구와 한독당이 정계요인은 모조리 제거해버리겠다.’고 벼르고 있다며, 장 청장도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19478월 중순 김석황은 경원여관 15호실에서 조상항, 신일준, 손정수와 화합해 김구가 민족반역자 장덕수, 배은희, 안재홍의 처단을 원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튿날 암살 지령 여부를 확인하고자 이들은 경교장을 찾았다. 김구는 그 자리에서 장덕수, 배은희, 이종영은 나쁜 놈들이니까 숙청하라고 지시했다. 김석황 일행은 그길로 경원여관에 돌아와 국민의회 대의원 김중목에게 김구의 지령을 전달했다. 사흘 뒤 김석황이 경교장을 찾아가 장덕수 살해계획을 보고하자, 김구는 아 그런가.’하고 반응했다. 장덕수, 배은희, 안재홍이 이들의 표적이 된 것은 한독당과 국민의회의 정치적 입장과는 달리 미소공위에 협력하고, 민족대표자회의와 국민의회의 합동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1947826일 김중목은 한양병원에 입원해 있던 최중하와 협의해 민족 반역자 처단을 위해 대한혁명단을 결성하고, ‘조선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한다.’는 혈서를 작성했다. 조직원은 최중하, 박광옥, 조엽, 배희범, 박정덕, 김철 6명이었다. 훈련부장 신일준과 재정부장 김중목은 한독당 외곽단체로부터 자금을 조달해 수차에 걸쳐서 단장 최중하에게 활동자금을 제공했다. 김중목은 이들에게 수류탄과 권총을 전달하고 가슴에 혈서를 붙이고 태극기 앞에서 사진 촬영을 했다. 최중하와 조엽은 사진 사본을 송종옥 의원을 통해 경교장 김구에게 전달했다. 사본을 받아 든 김구는 그 정신은 좋지만 조심하라. 그러한 청년은 많으나 성사를 못 하더라. 학생은 공부해야 한다. 그러나 나라를 위해서는 궐기해야 한다.’고 격려했다. 박광옥의 셋집 책상 서랍에서 발견된 이 사진은 나중에 장덕수 암살사건 수사의 결정적 단서가 되었다.

 

19479월 초순 이들은 구체적인 실행을 위한 역할 분담을 결정하였으나, 두려움을 느낀 조엽, 박정덕, 김철이 대한혁명단을 탈퇴했고, 단장 최중하도 건강상의 이유로 계획의 변경이 불가피했다. 19471020일 이들은 당초 계획을 변경해 장덕수만을 처단하기로 결정했고, 박광옥과 배희범이 실행 책임을 맡기로 했다. 박광옥과 배희범은 장덕수 암살을 위해 약 30일 전부터 정보수집에 착수했다. 1947122일 한민당 수위와 운전기사에게서 당일 저녁 장덕수가 자택에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오후 5시경 경원여관을 찾아 최중하에게 당일 거사 실행을 보고했다.

 

종로경찰서 소속 경사 박광옥은 경찰 제복을 착용하고 카빈총을, 배희범은 검은색 외투를 걸치고 권총을 휴대했다. 이들이 오후 6시경 제기동 장덕수 자택에 도착했을 때는 어두워져 있었다. 이들은 마당에서 빨래를 걷고 있는 식모 박은희(12)에게 장덕수가 집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면담을 청했다. 손님들과 저녁식사를 하던 장덕수가 잠깐 나와서 이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집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몇 분 뒤 총성이 울렸다. 먼저 배희범이 4~5발을 발사했지만, 모두 불발이었다. 그러자 박광옥이 카빈총으로 2발을 발사했다,

 

임정 주석 겸 한독당 집행위원장 김구는 1948312일 제 8, 15일 제 9회 두 번에 걸쳐 군사법정에 증인 신분으로 출두했다. 피의자 김석황, 조상황, 신일준, 손정수, 김중목이 한 결같이 장덕수 암살의 배후로 한독당 김구를 지목했기 때문이다. 당시 김구의 정치적 입지를 고려하면 법정소환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미국군사위원회는 트루먼 대통령의 명의로 발부한 소환장에 조선 서울시 중앙청 제 1회의실에서 개정하는 미국 군율재판위원회에 귀하를 소환하오니 1948312일 오전 9시에 출두할 것을 명기했다. 이에 김구는 미국 대통령에 대한 국제예양을 존중한다며 법정 출두했다. 김구는 두 번의 법정 심문에서 자신은 모른다.’, ‘그런 적이 없다‘,’사실이 아니다는 답변으로 일관했다. 검사와 재판장이 모략의 실체를 집중해서 추궁했지만 김구는 답변을 거부했다. 이를 보다 못한 재판장이 검사 심문에 답변을 거부하는 것은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오.‘라고 쏘아붙이자, 김구는 미국 대통령의 요청이 있어 국제예양을 존중해서 증인으로 나왔는데, 마치 나를 죄인처럼 취급하는 듯하니 불만이오.‘라며 자리를 박차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문제는 김구의 증인심문 이후 피의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허위자백을 주장했다. 그들은 CID조사관에 의한 고문 및 구타에 의한 진술이었다고 구체적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이에 제 19회 공판에서 CID 조사관을 출두시키고, 20회 공판에서는 수도경찰청 조사과장 노덕술을 출두시켜 고문 여부를 심문했다. 그 결과 재판부는 취조와 심문과정에서 고문 사실이 없었다고 결론지었다. 이 사건으로 피의자들은 범행 가담 정도에 따라 교수형 및 중형을 선고 받았다. 그런데 법정 심문에서 한결같이 김구 선생의 지령이 있었다.’고 진술했는데도 김구는 왜 법률적 처분을 면했을까.

 

당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취조 과정에서 김구의 혐의를 포착하고 경교장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발령하려 했지만, 하지 중장의 저지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당시 미군정 검찰총장을 역임했던 이인의 회고에 의하면 이 사건으로 임정 주석을 체포하게 되면 일반 시민들의 격화를 누가 수습할 것인가라고 증언했다. 실제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내한해 5.10 총선을 결정했고, 김구, 김규식의 남북협상 논의가 급물살을 타는 와중에 김구에 대한 법적 처분은 정치적 부담이 적지 않았다. 이문제와 관련해서는 하지 중장이 정치적 처벌을 선택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사건은 당시 상당한 충격을 안겼다. 국민들은 김구의 암살 지령이 드러날 때마다 김구가 암살테러의 배후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이 사건의 배후를 둘러싸고 여러 이론이 있었지만, 증인으로 출석한 박은혜는 민족대표자대회와 국민의회의 합동설이 있었을 때 장덕수는 합동운동에 노력했지만 김구와 의견이 충돌하면서 알력이 생겼고, 김구가 임정을 조선 정부로 한다고 해서 물의를 자아낸 모양이라고 증언했다. 최중하도 처음에 반탁을 지지했던 한민당이 미군정의 눈치를 살피면서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하겠다고 돌아서는 바람에 반탁 전선에 분열이 일어났다. 이에 반탁진영의 김석황 등이 이 사실을 알고 분개한 나머지 장덕수를 제거하게 되었다고 자백했다. 배희범은 정권을 잡기 위하여 신탁을 시인하는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했기 때문에 살해했다고 진술했다. 장덕수 암살은 차고도 넘치는 물적 증거와 함께 피고인 진술 그리고 증인들의 생생한 법정 증언을 고려할 때, 김구와 한독당이 자행한 명백한 음모, 교사범행이었다.

 

또한 이 사건의 군정재판 회부에 대해서도 여러 이견들이 분분했다. 송진우 암살사건 공판 결과를 두고 나온 극악 졸렬한 판결이라는 거친 비난과 여운형 암살사건 발생 직후 한독당 계열 김두한이 군 선에서 더 수사 선을 확장하면 당신 신상의 위험은 물론 아이들과 친족까지 사살하겠다.’며 조재천 부장검사를 위협했던 사실, 1947124일 장덕수 암살사건 주범 박광옥과 배희범 체포직후 임정 측에서 박광옥의 배후를 캐지 말라는 압력을 행사했던 사실 등을 고려하여 검찰과 사법부에 대한 사법테러를 저지하고 공정성과 신속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군정재판으로 진행했다는 사실에 무게의 중심이 쏠린다.

 

작가는

장덕수는 인품이 훌륭하고 이 땅에 자유의 물결을 인도하고 자유의지의 소중함을 일깨운 진정한 자유의 전도사이자 그 자유혼을 불어넣어 나라 만들기의 대하드라마를 연출한 장본인이고, 대한민국 건국과 번영의 정치적 주춧돌을 깔았던 얼굴 없는 국부가운데 한 명 이었다고 정의한다. 장덕수는 국제정치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천부적 재능과 발군의 리더십을 발휘해 미소공위를 결렬시키고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시켜 가능한 지역에서 총선거라는 국제정치의 기적을 일구어낸 대한민국 건국의 위인으로 평가한다.

 

이 사건의 피의자들은 한결같이 김구에게 암살 지령을 받았다고 자백했다. 그 결과 김구는 법정에 서야만 했고, 이는 정치적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김구는 정치적 활로를 찾고자 19484월 남북협상에 앞장서서 김일성을 만났고, 5.10 총선을 보이콧했으며, 대한민국 전복을 획책했다. 김구의 입장에서 장덕수는 임정의 법통을 부정하고 권력 장악을 가로막고 나서는 장애물이었다. 그래서 장덕수만 제거하면 김구의 원대로 정권을 장악 할 수 있다는 망상에 빠지게 된 결과 하수인을 동원해 장덕수를 무참하게 참살했던 것이다. 결국 장덕수 암살테러는 정치적 신념과 무관한 폭력적 범죄였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독자는

장덕수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었으며, 이는 한민당의 정치이념에도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그래서 한민당은 공산주의를 폭력, 기만, 독재, 매국 이론이라 규탄했고. 공산당과의 정면대결을 선언했다. 이러한 한민당의 선명한 반공 노선은 대한민국 정부로 계승되면서 반공이데올로기의 뼈대를 이루었다. 그는 미국 유학을 통해 신자유주의 이론가로 세계적 명성을 쌓았으며, 자신의 정치사상을 조국에서 펼쳐보자고 노력했다. 그는 북한을 위성국가로 만든 소련이 남한마저 소비에트화시키려는 야욕을 버리지 않는 한 좌우 합작 혹은 미소공위를 통한 통일정부 수립은 불가능하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우선 남한 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해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한다는 남한 단선단정론을 주장했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사상적 배경이 탄탄한 장덕수에게 주먹구구식 김구의 임정법통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은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부딪힐 때마다 김구의 무자비한 폭력에 의한 암살테러는 무식하게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김구의 신탁통치 반대 운동은 설득력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정치를 통찰하는 혜안도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김구의 반탁 운동은 힘을 잃고 유엔에 의한 남한 단독선거가 결의 되어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이 실행된 것이다.

 

본 사건에서 김구는 분명히 장덕수 암살 테러의 최상위 꼭지 점에 위치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많은 피의자들의 진술과 증언이 반증하고 있으며, 미군정의 본 사건에 대한 시각과 사후처리 방법을 고려해 보면 김구는 변명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김구가 처벌되지 않았던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에 장덕수가 암살당하지 않았거나, 김구가 이 사건으로 처벌당했다면 우리나라의 역사는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김구는 해방 후 혼란한 정국에서 임정 법통에 의한 정부수립을 고집하면서 자신이 대통령이 되는 조건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정치 사상적으로 논리적 설득력이 있고,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대한 확신이 견고했던 송진우나 장덕수 등에 대하여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 모자랐던 것이다. 김구 자신이 임정 때부터 가장 잘했던 폭력에 의한 제압을 해방 후 정국에서도 가감 없이 자행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 결과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등 민족과 자유주의 이념을 기초로 해서 국가의 안정된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던 재원들을 잃어버렸다.

 

우리나라 근대 역사에서 김구는 신화로 포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신화를 김구 자신이 만들고 꾸몄다는 점을 지적한다면 어떤 변명을 내어 놓을 수 있을까. 주류 사학계에서 조차도 김구를 신격화해서 초중고 교과서나 각종 전기에서 버젓이 김구의 독립 운동에 대한 자랑이 일색이다. 만약에 김구의 행적에 대해서 반대 여론을 내 놓는다면 그 징치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이다. 정치적으로 자신의 행보에 걸림돌이 된다면 가차 없이 제거 된 사례들이 김구에 의해서 자행된 것이 사실이라면, 김구는 역사적으로 재평가 되어야 한다. 독립운동 경력만으로 자신의 정치적 야심에 의한 비극을 모두 덮을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역사의 오류가 될 것이다.]

 

[에필로그]

작가는 테러리즘을 정치적 목적을 위해 특정 비무장 민간인을 대상으로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주의 혹은 정책으로 정의했다. 다시 말하면 테러리즘은 정치적 목적성이 행위와 수단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독특한 정치학 개념이다. 작가는 김구의 테러활동을 조명하고 그가 내세웠던 테러의 명분과 의지를 반영해서 항일. 밀정. 정적 테러 세 가지로 구분하고 테러의 피해자, 목표, 수단, 동기, 의도를 실증적으로 분석했다. 테러는 민족, 이념, 종교 등 정치적 목적과 신념에 따라 동기화되는 특수한 폭력이다. 그렇지 않은 폭력은 범죄에 불과하다. ‘테러리즘 있는 테러테러리즘 없는 테러를 구분하는 기준은 정치적 목적성의 유무다,

 

김구가 자행한 테러에 대하여 구조, 특질, 논리를 정리하는 것으로 에필로그를 대신한다.

 

테러리즘의 구조

 

1. 치하포의 약장수, 쓰치다 조스케

198638일 자행된 치하포 사건은 재물탐심에 의한 살인강도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는 김구의 비상한 충성심혹은 국모보수는 신화가 아니라 사실이라며 치하포 의거라고까지 치켜세웠다. 김구 자신도 의거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국모보수를 주장했다. 하지만 1천 냥에 달하는 재물을 강탈하고자 일본인 매약상을 살해하고도 일본인 장교국모보수를 강변했던 것은 바로 치하포 사건을 뜨거운 애국심에 동기화된 항일 테러이자 우국지심의 화신으로 둔갑시키기 위하여 지어낸 명백한 거짓말이다. 치하포 사건의 진상은 정치적 목적이 아니라 재물탐심에 의한 엽기적 살인 행위였던 것이다.

 

2. 난봉꾼 테러리스트 이봉창

19321월 쇼와 천황의 폭살테러를 자행한 이봉창은 감투정신 및 희생정신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그는 원초적으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기, 횡령, 절도를 가리지 않는 난봉꾼이자 협잡꾼이었다. 더구나 살상력이 미미한 마미탄을 사용했다는 것은 애당초 실패하도록 설계된 폭살테러였음을 의미한다. 그는 천황 폭살만이 독립의 지름길이라는 김구의 뀀에 넘어가 어설픈 테러를 자행한 난봉꾼 테러리스트였다.

 

3. 한 사랑의 독립전사, 윤봉길

윤봉길은 부모 형제와 처자식을 두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압록강을 건너 김구가 건넨 타살용 폭탄 외에 자살 폭탄까지 가지고 세기의 폭살테러를 감행했다. 윤봉길의 테러는 상해정전협정파기를 중일전쟁의 재발. 확전으로 연계시켜 독립의 토대를 마련하겠다는 정치적 노림수가 분명한 테러였다. 그의 테러가 정치적 목적에는 실패했지만, 그는 조국과 민족에 대한 한 사랑을 실천했던 철석의 심장을 지닌 진정한 의미의 테러리스트였다.

 

4. 사회주의 항일혁명가 김립

김립은 1918년 동아시아 최초로 사회주의 정단인 한인사회당을 창립하고 이동휘와 함께 임정에도 참여한 인물이다. 김구는 레닌이 상해 임정 앞으로 제공한 모스크바 자금을 횡령한 파렴치범으로 몰아서 김립을 살해했다. 하지만 자금의 성격은 레닌이 공산주의 세계화를 위해 한인사회당 혹은 고려공산당에게 제공한 사회주의 혁명자금이었다. 더구나 코민테른 조차도 자금의 횡령과 유용은 없었다고 결론지었다. 공금의 횡령, 탕진 운운은 김구의 기만에 찬 사설일 뿐이다. 김구는 모스크바 자금이 고려공산당 상해파에 넘어가 임정의 분열과 파괴의 원천이 될 것을 우려했다. 그런 이유로 김립은 암살되었다.

 

5. 만들어진 밀정 옥관빈

옥관빈은 타고난 기업가적 마인드와 발군의 수완을 갖춘 젊은 인재였고, 대성학교 스승 도산 안창호에게 사상적 감화를 받아 비폭력 자강주의와 실력양성주의 독립운동을 실천했던 진정한 독립 운동가였다. 김구는 옥관빈을 밀정으로 몰아 남화연맹에 암살테러를 청부했다. 흥사단 유력자 조상섭 목사에 대한 무장 강도 사건에 분노한 옥관빈이 반격의 움직임을 보이자 김구는 자기 방어적 암살테러를 자행했다. 실제로 김구의 입장에서는 한인 거상인 옥관빈의 보복 의지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위협이었다. 옥관빈 밀정 운운은 김구가 만들어낸 프레임에 불과했다.

 

6. 안중근의 막냇동생 안공근

안공근은 냉철한 판단력을 갖춘 지모와 간계가 뛰어난 인물이었다. 김구는 안공근의 치밀한 두뇌와 발군의 수완을 빌려 상해의 뒷골목 깡패 수준에서 세계적인 테러리스트이자 임정의 헤게몬(hegemon)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19385남목청 사건이 발생했고, 안공근은 그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내쳐졌다. 이는 그동안 김구를 위해 견마지로를 다했던 안공근의 처지에서는 참기 힘든 배신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해서 모종의 반격을 획책했지만, 낌새를 알아챈 김구와 그 일당은 공세적으로 암살테러를 자행했다. 이는 임정과 김구 자신에 대한 안공근의 도전을 무력화하기 위한 살인 범죄였다.

 

7. 민주 건국의 원훈 송진우

송진우는 민족불멸, 일제필망, 독립필치의 정치적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자생적 자유주의자를 대표한 인물이다. 해방 후 조선총독부가 권하는 치안권 인수를 거부했고, 임정봉대와 군정협력을 앞세워 한국 최초의 보수우익 정당인 한국민주당을 창당했다. 반탁 문제를 둘러싸고 반탁. 친미의 송진우는 반탁. 반미의 김구와 격돌했다. 김구는 반탁은 애국, 찬탁은 매국이라는 정치 프레임을 송진우에게 덮어씌우고 찬탁론자로 내몰았다. 그리하여 민족주의 광신자 한현우를 사주해 암살했다.

 

8. 겉치레 공산주의자 여운형

여운형은 조국과 민족을 신탁통치와 좌우합작에 끌어들여 적화통일의 희생양으로 삼고자 공산혁명에 매진했다. 일제가 제공한 막대한 자금으로 건준과 인공을 창설한 여운형은 극우와 극좌의 이념적 혼란의 주요 인물이었다. 하지만, 임정의 법통 위에 새로운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김구의 입장에서는 공산주의자와 손잡고 건준과 인공을 수립하고 나선 여운형을 용인할 수 없었다. 임정의 법통과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자 일종의 반격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9. 얼굴 없는 장덕수

의 자질을 두루 갖춘 장덕수는 그릇이 큰 정치가였다. 1946년 이래 한독당과의 합당, 좌우합작, 미소공위 참가, 단독정부 수립을 주도했다. 그 과정에서 김구의 한독당과 불화했다. 김구는 법통 임정을 앞세워 우파 헤게모니 장악을 획책했지만, 장덕수가 번번이 이를 가로막고 나섰기 때문이다. 김구는 장덕수를 제거하고 나면 정권이 자신의 수중으로 굴러들어 올 것이라 망상했다.

 

[이상 김구가 자행한 테러 사건 가운데 정치적 목적성을 지닌 테러리즘 있는 테러는 윤봉길 폭살테러 1 건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모두 시종일관 테러리즘으로 반대파를 숙청 또는 암살했다는 지적대로 테러를 개인적인 재물탐심, 개인적인 보복, 정적 제거의 수단으로 삼았던 테러리즘 없는 테러였다. 김구에게 테러는 일제의 부정의에 맞서는 신성한 수단이 아니라 야만의 정의를 구현하는 비열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그는 오늘날 한국인들의 환상과 달리 자타가 공인하는 테러리즘 없는 테러리트스였다.]

 

테러 활동의 특질

김구의 테러는 몇 가지 특질을 가려낼 수 있다.

 

첫째, 야만의 폭력성이다.

치하포 사건에서 청년 김구는 거금을 강탈하고자 일본인 약장수 스치다를 맨주먹으로 쓰러뜨리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잔인하게 난도를 쳤다. 그리고는 대동강 물에 대다버렸다. 유족들이 적절한 장례를 거쳐 원혼을 달랠 기회조차 박탈했다.

 

안중근의 막냇동생 안공근은 김구의 참모장으로 활동했고, 1932년 이래 한인애국단이 자행한 모든 테러활동을 실질적으로 지휘한 인물이다. 하지만 19385월 김구를 저격한 남목청 사건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내쳐졌다. 안중근의 간계와 반격을 우려한 김구와 그 일당은 살인 청부업자 정화암을 사주해 그를 살해했다. 쓸모를 다한 안공근은 뼈와 살이 발린 채 사체는 돌덩이를 매단 상자에 담겨 강물에 내던져졌다.

 

19465북조선 51기념 공동준비위원회는 김구를 일러 오늘까지 배운 것이 살인이요, 또 남은 것이 살인인데, 이제 또 무슨 새삼스럽게 정치가가 된다고?, 무슨 염치로 애국을 말하고 민주를 말하는가.” 라고 질타했던 점을 상기해 보면, 과연 밥 먹듯이 살인을 자행한 김구에게 조선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역량이 있었을까 의문이 든다. 설령 지도자가 된다 해도 그에게서 어떠한 정치력을 기대를 할 수 있었을까.

 

둘째, 모략과 협잡이다.

김구는 감언이설로 이봉창을 꾀어서 성공 가능성 없는 일본 천황의 폭살테러에 동원했다. 그는 이봉창과의 첫 대면부터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정체불명의 백정선을 참칭했다. 이봉창 자신이 김구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것을 알게 된 것은 폭살테러 당일 일본 경시청 취조실에서였다. 더구나 김구는 이봉창에게 파열강도가 극히 낮은 마미탄을 제공했다. 이봉창은 대한단 위력의 폭탄이라는 김구의 말만 믿고 폭살테러를 감행했지만, 폭탄의 위력은 형편없었다. 결국 김구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난봉꾼 이봉창을 소모품으로 사용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19326월 도산 안창호 비방 투서를 계기로 한인청년단 소속 이규서와 연충열이 김구와 그 일당에 대한 피의 복수를 다짐하고 나섰다. 그러자 김구와 안공근은 193211월 남화한인청년연맹 고문 우당 이회영의 죽음이 이들의 밀고 때문이었다는 거짓 정보를 유포시켰다. 그러자 김구. 안공근의 가짜 정보에 제대로 속아 넘어간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이규서와 연충렬을 상해 외곽으로 유인해 교살하고 사체를 강물에 투기해 버렸다, 이는 반간지계와 차도살인을 배합한 고강도 암살테러를 자행했음을 시사한다.

 

김구의 테러활동은 하수인을 앞세운 사주 및 청부테러였다. 그 하수인 대부분은 연고자, 청소년, 문맹자 들이었다. 실제로 해방 직후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를 암살했던 범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조국 광복을 위하여 독립을 해치는 존재를 제거하였다고 취조관에게 말할 뿐 아니라 심지어 자기는 가 되기 위하여 역할을 하였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김구는 지각도 없고 분별력을 결여한 청년들에게 그릇된 관념을 주입시켜 테러의 하수인으로 동원했다.

 

셋째, 거짓과 위선이다.

치하포 사건에서와 같이 김구는 일본인 약장수에 대한 구타살해, 사체훼손, 사체유기, 금품강탈을 자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범일지에서 치하포 사건의 동기를 국모보수의 의살이라고 강변했다. ‘백범일지에서 약장수를 일본군 장교로 둔갑시켜 절대 악으로 규정하고, 그 대척점에 있는 자신을 용감한 영웅으로 분식했다.

 

정화암을 매수해 옥관빈을 암살하고는 다년간 일제의 밀정 노릇을 해 온 간역 옥관빈을 처단했다고 강변했지만, 옥관빈은 비폭력 자강주의 독립운동을 실천했던 상해의 한인 거상이었다. 그에게는 일제 밀정 노릇을 해야 할 경제적 또는 사상적 동기가 없었다. 옥관빈의 암살은, 그가 독립자금을 출연하라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거절했다는 점과, 김구의 흉폭저돌주의 독립운동 노선을 경멸했기 때문이었다. 옥관빈을 두고 밀정, 의 죄상을 운운하는 것은 거짓이다.

장덕수 암살테러에서 보듯 박광옥 등 피의자들이 일제히 김구로부터 지령을 받고 테러를 자행했다고 진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김구는 검사의 심문에 궤변으로 응수했고 불리한 심문에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더욱 황당한 것은 동족과 조국을 사랑해서 왜놈 이외에는 죽이라 한 적이 없다는 거짓말이었다. 민족의 지도자 행세를 했던 김구는 뻔뻔한 위선에 거침이 없었다. 이런 점에서도 그는 정치 지도자의 자격은 애초에 갖추지 못했다.

 

테러활동의 논리

김구의 테러활동 가운데 가장 많은 건수와 피해자를 기록한 것은 밀정테러였다. 그렇다면 김구가 그토록 많은 한인을 밀정이란 불도장을 찍어 살해했던 동기 혹은 논리를 살펴보자.

 

종래 김구의 테러활동을 반공논리로 설명하는 경우가 있었다. 1985년 김일성은 잡지세카이와의 인터뷰에서 김구는 해방 전 상해 임시정부 자리를 차지하고 다수의 공산주의자를 살해했던 유명한 반공분자였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김구라면 치를 떨었을 정도였다고 증언했다. 김구가 지독한 반공 주의자였기 때문에 다수의 공산주의자를 살해했다는 주장이다.

김구는 과연 반공 주의자였을까.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19194월 임정 수립 이래 독립노선을 둘러싸고 이동휘의 공산주의와 이승만의 민주주의가 대립하는 와중에 한민족 독자성과 자존성을 지키고자 공산주의에 반대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백찬기는 당시 김구파도 조선의 독립과 공산주의 운동을 병행했다고 정반대의 사실을 증언했다. 단지 김구파가 추구하는 공산주의 운동의 특징은 소비에트를 건설해서 사회주의 조국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 가맹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조선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김구는 투철한 반공주의자를 자처했으면서도 ‘1926, 1942, 1944년 적어도 세 번에 걸쳐 이념을 달리하는 공산주의자들과 연합했다. 더구나 194511월 환국 직후 한민당과 이승만이 대한독립촉서중앙협의회 참여를 거듭 촉구할 때도 좌우합작이 자신의 기본노선이라며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19451225일 임정 산하에 특별정치위원회를 별치해서 인공과 합작 혹은 좌우익을 망라한 정당통합을 추진했다. 김구와 한독당은 194710, ‘좌우합작 7원칙에 대해서도 ‘8.15이후 최대의 수확이라며 좌우합작을 지지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1948년 남북협상에도 앞장섰고, 북한을 민주기지로 삼아 남한을 소비에트화시켜 인민공화국 통일정부를 수립하자는 연공 합작에도 합의했다. 김구는 19485.10 총선을 보이콧했다.

 

김구의 학력은 서당 3년이 전부였다. 양산학교 제자이자 테러의 하수인으로 활동했던 오면직의 증언에 의하면 의 통찰력이 아둔했기 때문에정치적 야심가들에게 휘둘리기 쉬웠다. 그는 장기간의 중국 체류에도 불구하고 기초 중국어조차 구사하지 못하는 평균이하의 지력자였다. 그런 김구가 공산주의 이념과 철학을 독해하고 반공 주의자를 자처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앞서 김일성이 김구를 두고 지독한 반공주의자라 운운했던 것은 19484월 남북협상에서 김일성의 감화를 받은 김구가 반공에서 연공으로 돌아서게 되었던 전향의 획기성을 강조하는 한낱 수사에 불과했다. 김구는 반공주의자가 아니라 친공주의자 혹은 전체주의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김일성의 주장과는 달리 반공주의자도 아닌 김구가 왜 그토록 많은 공산주의자를 살해했을까.

 

1946년 북조선 51기념공동준비위원회는 경무국장 시절 김구의 유일한 사업은 테러단을 조직해서 진보적 인사들과 좌익 청년들을 암살하는 일이었다. (...) 해외의 진정한 애국주의자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전체가 임정의 존재를 반대했다. 그런 이유로 이들은 김구 테러단의 암살 대상이었고, 또 직접 그들의 마수에 걸려 쥐도 새도 모르게 매장 당했다. 또 배움을 목적으로 큰 뜻을 품고 상해에 갔던 진보적 청년. 학생들이 김구 암살단의 손에 걸려들어 산채로 하수도 구멍에 통김치 담가졌으며, 진리와 진보를 찾아 헤매던 청년들이 온데간데없이 행방불명 된 자의 수는 아마 김구 자신도 헤아리기 어려울 것이라고 폭로했다.

 

당시 진보적인 인사와 청년. 학생들이 임정을 반대했던 이유는 임정 내부의 치열한 지방열과 감정대립은 수많은 밀정을 만들어 냈고 무고한 희생자를 발생시켰다. 1940년대 작가 김사량은 정권욕에 눈이 먼 임정의 지도자 간 당쟁이 격화되면서 온갖 음모와 술책, 모해, 이간, 테러가 임정의 유일한 사업이었다. 이 당파 싸움에 가담치 않거나 혹은 반대한다는 연유로 많은 애국열사와 혁명 청년들이 피를 흘리고 양자강의 물귀신이 되었는지 모른다.‘고 폭로했다. 북한 사회과학원도 임정은 허구한 날 파벌싸움이나 벌이고 애국 동포들로부터 금품이나 빼앗아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부패하고 타락한 반인민적 성격의 봉건 통치배들 집단이었다고 질타했다. 진보적인 인사 및 청년. 학생들은 이념이 아닌 지역 중심의 시대착오적 작태에 분개하고 험담을 하는 것은 당연했다. 김구는 이러한 이들의 언동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194677일 김구는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에서 나를 테러의 수괴라 하였으니, 나 자신이 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 나는 조국 광복을 위해서는 이 이상의 방법이라도 취했을 것이라고 강변했다. 하지만 김구에게 테러는 조국의 광복이라는 고귀한 이상이 아니라 항일의 기치를 내걸고 거대한 권력욕을 채우는 비열한 수단에 불과했다. 임정 주석 겸 한독당 집행위원장 직함의 벼락출세는 임정 간판을 앞세운 강력한 권력의지, 이를 뒷받침하는 광폭한 테러활동, 그의 쓰임새를 제대로 알아본 장개석의 후원 덕분이었다. 임정의 화신을 자처하며 전체주의 충동에 사로잡힌 김구는 썩은 동아줄에 불과한 법통 임정이야말로 건국의 주체 세력이라 억지를 부렸다. 그래서 김구는 임정을 부정하고 폄훼하는 정적들을 가차 없이 제거했다. 한민당 당수 김성수는 물론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이승만도 발치 대상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오늘날 김구의 조작된 허구가 장엄한 역사로 둔갑한 데에는 먼저, 박정희 정권 시절에 독립 운동가들에 대한 무비판적 우상화가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1980년대 중반 종북 주사파들의 사회악의 모든 근원을 친일 미 청산에 있다는 인식에 기초해서 이승만을 깎아내리기 위해 김구를 띄우기 시작했던 점을 들 수 있다. 그들은 북한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단독 정부는 안 된다는 김구의 말을 인용했다. 종북 주사파 역사상 가장 성공한 프로젝트로 회자되는 김구 띄우기와 이승만 깎아내리기의 역사 공작은 통일의 화신 김구, 분단의 원흉 이승만이라는 거짓 프레임으로 재구성되면서 한국인들은 세뇌되어왔다.

 

그런 세계적인 테러리스트 김구를 두고 대한민국 국부혹은 자유와 통일의 메시아라 환상하고 하는 것은 지독한 정신분열이자 끔찍한 위선이다. 요컨대 김구는 테러리즘 없는 테러리스트이자 임정극단주의를 가장 권력적으로 완성해 영세불망의 지위에 오른 루갈(Lugal)이다. 이것이 바로 김구의 민낯이자, 이른바 독립운동이라는 미명의 잔인한 진실이다. 김구는 종북 주사파가 만들어 낸 역사적 허구이자 한국인들의 무지함과 천박함을 조롱하는 우상에 불과하다. 더 이상 시대착오적 우상숭배와 터무니없는 환상공망에서 하루빨리 깨어나기를 바랄 뿐이다.

 

 

 

 

 

 

[맺음말]

저자는 전라남도 광양 출생으로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교토대학에서 일본 경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동아시아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서울대학교 객원 연구원 등을 역임했으며,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학술연구 교수로 재직 중이다.

 

본 저서는 근대 역사의 분기점이었던 일제 강점기와 해방 전후 시대를 배경으로 활약했던 백범 김구에 대한 단면을 고발하는 성격의 책이다. 그동안 우리가 알았던 김구의 독립운동사에 대해 단기필마로 대척한다. 작가 역시 우상으로 여겼던 김구의 테러리스트 적인 단면에 대하여 충격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이 책의 특징은 시간과 공간을 명백하게 적시하고 그 진실성을 강조했다. 그런 점에서 논문에 버금가는 연구 성과라 할 만하다. 책 분량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주석이 그것을 입증한다.

 

독자 역시 이 책을 들고서 한참을 망설였다. 우리는 그동안 김구의 업적에 대하여 애국충절과 독립운동가로 각인되어 있는 세포를 들추어내어 환기시키고 저장 파일의 일부를 업데이트해야 된다. 더군다나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버금가는 역사적인 사료로 알았던 일제강점기 시절의 백범일기의 일부가 거짓과 위선이었다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의 한 획이었던 김구의 독립운동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해석이 필요한 시점이다.

 

저자는 김구가 테러한 인원이 총 81명 이었다고 적시했지만, 나중에 다시 정리한 결과 총 96명 이었다고 한다. 그 중에 항일 테러는 총 3명이며, 93명은 한국인이었다고 한다. 항일 테러 3명 중 치하포 사건에서 살해된 스치다 조스케는 항일 운동과 전혀 상관없는 개인적인 재물탐심에 의한 단순 살해사건이었다. 결국 윤봉길 폭살테러에 의해 암살된 2명만이 진정한 테러리즘에 의한 정치적인 테러였다. 그리고 실증적 자료로 추적할 수 없이 사라진 사람들은 얼마나 더 있는지 추산이 어려울 정도다.

 

김구는 한국인 93명의 암살은 일본의 밀정이었다고 명분을 내세웠지만, 책에서는 밀정이 아니라 김구 노선에 반대하거나 정치적 대척점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실제로 밀정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임정 내부의 분열과 혼란에 의해 사라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왜 이런 무자비한 폭력을 같은 민족끼리 자행했을까. 우리 지도자들의 과한 권력욕과 일천한 국제정세 인식과 민주주의에 대한 철학의 부재가 낳은 비극이 아닐까.

 

본 저서에서는 김구의 숭고한 애국충절과 독립운동에 대한 면면을 소개하지는 않았다. ‘테러리스트라는 단면만을 다루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및 해방 전후 김구의 독립운동이나 애국운동 전체를 통찰하는 자료로서는 부족하다. 그래서 이 책의 논지에 대한 반대 의견에 대해서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김구를 세계적으로 유명한 정치적 암살자로 규정한 것은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완전히 무시한 일제 제국주의의 관점에서 역사를 해석하는 오류를 범한다.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안중근, 윤봉길 등의 항일 투쟁을 현대의 테러리즘과 동일시하는 것은 역사적 맥락을 완전히 무시한 주장이다. ‘한국인들이 환상하는 김구는 종북주사파가 만들어낸 역사적 허상이라는 주장은 김구의 독립운동 업적과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공헌을 전면 부정한다. 독립운동의 정신과 가치를 훼손하고, 국민의 역사 인식과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를 극단적으로 왜곡하려는 시도다.]

 

이러한 반론에 대해서도 작가는 역사적인 맥락을 이해하는 측면을 고려하여 답하여야 할 것이다.

 

김구는 왜 굳이 임정의 간판을 지켜야 한다고 고수했을까. 그로 인해 수많은 한인들이 희생되었다. 그에 대한 설명이 분명하지 않으면, 김구의 독립운동사는 재해석이 필요하다고 작가는 주장한다. 김구 독립운동의 정당성과 긍정적인 이면에 자행된 반 임정주의자에 대한 암살테러는 반인간, 반민족, 반문명, 반사회적이고 전체주의적인 폭력이었다고 규정한다.

 

일부 반대론자들은 작가 정안기는 뉴라이트계로서 역사를 왜곡할 목적으로 이 책을 저술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작가는 춘원 이광수의 작품을 연구하다가 백범일지를 접하게 되었다. , 백범일지 간행본은 이광수의 작품이라는 것이다.(백범일지 원문은 한자로 작성되었다. 김구는 한글을 유려하게 구사 할 능력이 없었다) 작가는 백범일지 속에 열거된 사건에서 치아포 사건, 김립 암살 사건 등 여러 암살 사건들을 접하고 정리하다가 문제의식이 발동해서 이 작품을 썼다고 말한다. 그는 이 주제가 얼마나 어렵고, 위험스러운지 잘 알기 때문에 모든 자료를 논문에 준하여 준비하고, 반대 여론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해서 목숨을 걸다시피 집필했다고 한다. 만약에 이 작품에서 허점이 발견되면 작가는 무지한 공격을 당한다는 것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작가는 김구의 신화로 포장된 독립 운동사를 재정립해야 하며, 건국사도 다시 정리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김구가 근현대사에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 근현대사는 진실성이 결여된 부분이 많고, 논거가 빈약하기 때문에 세계사에 내 놓기에는 부족함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근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부단한 연구가 절실하다고 주장한다.

 

독자는

SNS 정보를 통해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범상치 않은 제목이어서, 한 이틀 숙성시켰다가 책을 들었다. 첫 페이지를 읽는 순간 독후감을 써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초등학교 때 방학숙제로 한두 번 억지로 독후감을 쓴 경험이 있지만, 그 후로는 한 번도 독후감을 써 본 경험이 없어서 미숙한 점이 많다. 그렇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본문은 실재에 근거한 시공간의 사건들이 나열되는 형식이어서 한꺼번에 읽고 독후감을 쓸 자신이 없어서 단락별로 독후감을 썼다. 막상 독후감을 쓰자니 마음 같지 않았다. 중언부언 엇갈려서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독후감이라기보다는 거의 요약하는 수준에 불과했음을 자인한다. 누구에게 평가 받거나 보여주기 위한 독후감이 아니라, 방대한 책의 내용을 요약본 수준으로 정리하여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함이었다.

전체적인 책의 구성은 김구의 독립활동 중 테러에 의한 암살 사건을 주요 내용으로 다룬다. 문제는 암살의 동기가 항일 독립 운동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임정 또는 김구의 노선에 반대하거나 걸리적거리면 무자비하게 테러를 자행했다는 점에서 책을 다 읽은 시점에서도 적잖이 충격이다. 이 책을 접하기 전까지는 추호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김구의 수많은 암살테러 중, 윤봉길 의거는 정치적 목적이 뚜렷한 테러였다. 그런 점에서 윤봉길 의사의 정치관과 역사관, 세계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점, 숭고한 애국정신에 대해서는 존경할 만하다. 그리고 송진우와 장덕수의 손실은 국가의 장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특히, 장덕수의 죽음은 우리나라 역사의 물줄기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아무리 역사에 가정은 의미가 없다지만, 그가 지향했던 방향대로 우리나라가 정립되었다면, 6.25전쟁, 4.19, 5.16 같은 현대사의 질곡을 피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책 한 권의 내용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미신처럼 빠져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이번 기회에 김구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공과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적시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역사에 대하여 부끄럽지 않는 역사를 후대에게 물려 줄 수 있도록 공부하고 연구해야 할 것이다.

 

일제 암흑기에 잃어버린 나라의 독립을 구하고, 해방 후에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헌신했지만, 정치적인 사상이나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무고하게 희생된 학생, 청년, 독립운동가, 선지자분들의 명복을 빈다.

 

2024. 09. 20.

 

 

 

테러리스트 김구.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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