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 行

설악산 공룡능선

桃溪도계 2010. 10. 3.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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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공룡능선

 

 

사람들은 말한다.

내려 올 산을 왜 오르느냐고.

 

나는 답한다.

올라 갈 산을 왜 내려오냐고.

 

새벽 한기가 조금은 칼칼하게 느껴지는 한계령.

설악을 오르는 사람들의 의지는 모두 다르겠지만 우리는 같은 길에서 동행이 되었다.

별빛이 초롱초롱한 깜깜한 밤길에 발을 들여 놓으면 알지 못할 웅혼함이 가슴으로 돋는다.

다시 별이 돋기 전에 이 산을 무사히 내려 갈 수 있을까.

내려 갈 수 없다면 비선대에서 선인을 따라 하늘로 올라야 하나.

그것도 나쁘지 않다.

어떤 길을 택하든 일단은 설악에 올라야 한다.

 

 

 

 

한계령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서북 능선 길에 올랐는데도 어둠은 입을 꾹 다문채 말이 없다.

우리도 말 없이 묵묵히 걸어 올라간다.

흡사 천국의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처럼 의연하게 걸어 갈 뿐이다.

왜 힘들지 않겠는가.

 

서북 능선 갈림길에서 대청봉으로 이어가던 중에

설악의 비는 구름에서 내리는 것이 아니라 별빛이 녹아서 내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별이 돋기 전 까지는 비가 내릴테고

우리는 운명처럼 힘든 산행을 이어가야 한다.

 

끝청 조금 못 미쳐서 희뿌옇게 날이 밝아온다.

그곳에 단풍이 든다.

설악에 단풍이 든다.

비가 내리는 설악에 단풍이 익어간다.

 

 

 

 

 

대청봉은 밤과 낮 사이에서 혼돈하며

희뿌연 구름 속에서 오락가락 우주를 저울질 하고 있다.

우리도 덩달아 우왕좌왕하며 중청으로 내려 오는 길에 공룡능선 봉우리 쪽에서 구름이 걷혀 새로운 우주를 만날 수 있었다.

 

환희!

안개 같은 구름에 가리워진 몸짓

한거풀씩 벗겨지면 실루엣이 선명해진다.

이 떨림을 그대는 알까.

혼곤한 꿈 속에서 기다렸던 그리움을 그대는 알까.

그 옛날 안견은 몽듀도원도의 스케치를 여기서 했던 것은 아닐까.

 

더 환하게 밝아지면 좋겠지만

지금은 더 이상 가려지지 않으면 좋겠다.

그대를 만나러 가노라.

그때까지 꿈에서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노라. 

 

 

 

 

 

  

 

 

 

 

 

 

 

노릇 노릇 단풍이 익어가는데 내 님 오시려나

술이 다 익어가는데 언제 오시려나

그대 오시는 날에는 빈대떡 같은 노란 단풍을 안주 삼아 마음껏 취하고 싶다.

그대 품에 안겨서 공룡을 타고 설악을 날아 오르는 꿈을 꾸고 싶다.

님이 오기 전까지는

꿈에서 깨지 않으리다.

님이 오기 전까지는 술에도 취하지 않으리라.

 

 

 

 

 

 

 

끝이 없는 길에 서 있다.

이제는 삶이 그러하다는 것 쯤은 알 법도 한데

아직도 길의 끝을 가눈다.

아희야!

인생은 끝이 없는 길이라네.

오늘 내일

아니면 이 다음 어떤 날에 삶이 끝날줄 알았느냐.

 

인생은 求道구도의 길이며

道도는 생을 마감함으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함부로 막다른 길을 상상하지 마라.

죽음으로서도 도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은

삶에서 길의 끝을 흉내내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이다.

 

묻지도 말고

울지도 말고

오늘 내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라.

걸어 온 만큼

삶의 끝에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나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삶의 색깔을 하나 더 알아가는 것일 뿐이다.

 

 

 

 

 

 

 

 

 

 

 

 

 

공룡능선 초입 신선대에서 우리는 호흡을 고른다.

많이 지쳤지만

내게 주어진 길이니까 걸어갈 뿐이다.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이기심을 내려놓고

탐욕을 버릴줄도 알고

작은 것을 소중히 생각할 줄도 알아가고

나의 배려가 세상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것도 배울 수 있으면 좋겠다.

 

오늘 공룡을 만날 수 있어서 좋기는 하다만

이것 또한 나의 집착이 아니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공룡이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

잠 든 틈에...

내가 그의 등을 밟았는지도 모르게 다녀가고 싶다.

내 거친 호흡소리에 혹시 공룡이 깨거든 정성을 가상히 여겨 조용히 엎디어서 한 숨 돌리는 틈에 그의 등을 내려 올 수 있으면 좋겠다.

일기가 불순하니 마음은 더불안하다.

그래도 공룡은 우리를 지켜 줄 것이다.

그 믿음 하나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 할 수 있다.

 

 

 

 

 

 

 

 

공룡능선 등허리에 구름이 바쁘다.

순식간에 봉우리를 덮었다가

눈깜짝할 사이에 홀랑 벗겨 놓기도 한다.

경이로운 자연의 모습에서 나는 더 엄숙해지고 삶을 좀 더 진지하게 살아 갈 수 있겠다.

내가 설악의 공룡능선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산을 내려가면

나는 한층 더 성숙해질 것이고

세상의 폭을 좀 더 넓게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내 자신에 대해서는 더 엄격해지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더 많은 아량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이유로 매번 산에 오르지만

산을 내려가면

매번 못 된 나 자신으로 되돌아 온다. 

그러기를 반복하는 것은 나만의 삶일까.

 

 

 

 

 

 

 

 

 

 

보라빛 가을 꽃...

그대와 나는 우연처럼 만났지만 운명은 아니었을까.

그대를 보면서 내 삶을 반추해본다.

내 가슴에는 무슨 색깔의 꽃이 자라고 있을까.

당신과 꼭 닮은 보라빛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가을에 피었으면 좋겠다.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보라빛 희망을 주고 싶다.

인생에서 가을은 얼추 삶의 굴레를 터득하는 계절이다.

자칫 지치기 쉽고

자칫 포기하기 쉬운 계절에

나는 그대의 희망이 되고 싶다.

공룡능선의 보라빛 가을 꽃처럼...

 

 

 

 

 

 

 

 

 

 

 

비선대로 내려오는 길

많이 지쳤다.

내 삶에서 욕되고 바르지 못한 일이 있었다면 용서를 구하고 싶다.

그 용서를 통하여 내 발걸음이 가벼워 질 수 있으면 좋겠다.

용서가 허락되지 않아도 별 다른 도리 없이 이 길을 내려가야만 하지만

다음에 산에 오를 때에는 좀 더 가볍게 이 길을 걷고 싶다.

 

이 길을 내려가면

나로 인하여 더 행복한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다음에 또 행복한 마음으로 산에 오를 수 있기를 원한다.

 

누가 왜 산에 오르느냐고 묻거든

'내가 산에 오름으로 인해 행복한 사람이 더 많이 생긴다' 라고 또렷하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설령 내가 산에 오름으로 인해 행복한 사람이 더 많이 생기지 않더라도

내 자신에게 아름다운 길 위에 있음을 자부할 수만 있다면 더 욕심 부리지 않으리다.

그것마저도 욕심인줄 나는 안다.

그래도 산에 오를 것이다.

 

 

 

 

 

내려 올 산을 왜 오르냐고 묻거든

그때 산에서 내려 올 것이다.

 

함께한 산 친구들의 건강과

무궁한 건투를 빈다.

 

 

 

 

* 일      시 : 2010년 10월 2일

 

* 산 행 로 : 한계령 - 서북능선 - 끝청 - 중청 - 대청 - 중청 - 소청 - 희운각 대피소 - 공룡능선 = 마등령 - 비선대 - 설악동

 

* 산행시간 : 15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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