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올슬랭 박물관
뚜올슬랭 박물관
1960년 캄보디아에서 조직된 공산당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폴포트는 12년간 당서기로 봉사했다.
그는 노로돔 시아누크 정부와 론놀 장군의 군사정부에 대한 정적으로서
폴 포트는 크메르 루주 게릴라 부대를 이끌고 1975년 론놀 정부를 전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는 1976년부터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으로 정부가 무너진 1979년 1월까지 크메르 루주 정부의 총리로 일했다.
폴 포트 휘하의 크메르 루주 정부는 1975~79년 강제노역·기아·질병·고문·처형 등으로 약 200만 명의 사람들을 희생시킨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폴 포트는 베트남이 지원하는 신(新)캄보디아 정부에 대항해서 싸우기 위해 크메르 루주군을 이끌고 캄보디아 남서부 산악지대로 철수했는데,
신캄보디아 정부는 폴 포트가 공산당의 지도자로 있는 한 크메르 루주군과 평화협상을 할 생각이 없다고 발표했다.
1985년 공식적으로 폴 포트는 크메르 루주의 정치적·군사적 지도자직에서 물러났다.
1997년 6월 자신의 과거 동료들에게 체포되었으며 7월에 열린 공개재판에서 반역죄를 선고받고 감금되었다가 이듬해 사망했다.
1975년 4월17일, 중등학교였던 이곳은 S-21이라는 수용소로 변하여,
담에는 철조망이 올려지고. 교실은 고문실이나 감옥으로 개조되었다.
폴포트 정권은 자급자족, 농업 현대화및 산업의 기술개발을 기치로 내걸고,
국민들로 하여금 도시를 떠나 대규모 농업협동조합이나 산업체에 종사하도록 강요하였다.
이에 동의하지 않은 약 200만명의 인구를 처형(당시 총인구는 8백만명)했다.
킬링필드의 총 본산이었던 이곳에는 당시 지식층이었던 승려, 교수, 의사, 학생, 정치범 등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이 사진들은 처형하기 직전에 번호표를 붙여서 찍었던 사진으로서
사진 속의 눈동자에는 그들의 고뇌와 슬픔이 묻혀있다.
특히, 아이를 안은 462번 번호표를 받은 여인은 당시 외무부 장관의 부인 이었는데,
그가 흘리는 눈물은 보는이로 하여금 가슴을 뜨겁게 한다.
천인공로할 학살을 자행하였던 폴포트,
그도 인간이었을까.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한가하게 서 있는 야자나무는
30년 전의 슬픔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저 야자나무의 열매 속에서 그 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새겨져 있을 것 같다.
학교를 개조하여 수용소를 만들고
혹시나 있을 자살자를 방지하기 위하여 가시철망으로 둘렀다.
폴포트의 두려움은 무었이었을까.
왜 그는 무자비한 살인을 조건없이 행하였을까.
박물관을 관람하는 동안 아무리 생각을 되새겨도 이해 할 수가 없다.
교실 내부에 벽돌을 쌓아 허술한 독방을 만들었다.
바닥에는 쇠 사슬과 밥그릇 하나,
그리고 용도를 알지 못할 탄환통이 있다.
이곳에는 주로 고급정치범들을 가뒀다 한다.
이곳에 수용되었던 사람들은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다.
당시에 사용되었던 여러 고문기구들이 전시되어 있고 벽에는 고문행위를 그림으로 그려놓았다.
지금으로부터 기껏해야 30년 전의 일 치고는 너무나 끔찍스럽다.
벌렁거리는 가슴이 추스려지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폴포트가 정권을 잡은 3년 7개월 동안 전체 인구의 30%에 해당하는 이백만 이상의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했다.
단순하게 환산하면 하루에 이천명 이상을 처형해야 한다.
사람이 개미를 잡아도 그렇게 하기는 힘든 숫자다.
당시에 프놈팬 시내에는 모든 사람들이 도망을 가서 도시가 텅 비었다 한다.
어떻게 죽였을까.
왜 죽였을까.
자신의 정권 유지 때문이었을까.
고작 3년 7개월을 버티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여야 했나.
폴포트...
도저히 지울 수 없는 잔인한 이름이다.
아직도
가슴이 벌렁거리고 머리가 지끈거린다.
박물관 밖에서는 다리가 잘린 걸인들이 목발을 짚으며 돈을 구걸한다.
특히 외국인에게는 바싹 달라붙어서 사람을 송구하게 만든다.
그는 폴포트가 왜 그 많은 사람들을 그렇게 죽였는지 알까.
생각할수록 소름이 돋는다.
폴포트는 단순한 정권욕 때문이었을까.
그에게는 어떤 저항감이 핏속을 프르고 있었을까.
나는 평생을 두고 이 충격을 이해하려 할 것이다.
결국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
* 일 시 : 2009년 11월 1일
* 장 소 : 캄보디아 프놈팬 시내